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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활동가 인터뷰] 활동가 인생곡선 2: 오매 편 관리자 ㅣ 2020-09-01 ㅣ 74

벌써 세 번째로 찾아온 활동가 인터뷰! 지난 4월에는 환갑을 맞은 활동가 지리산과 사자를, 6월에는 2030 활동가인 주리-유랑-낙타를 인터뷰했습니다. (4월 활동가 인터뷰) (6월 활동가 인터뷰)
이번에는 2000년대 초반, 상담소 자원활동을 시작으로 상근활동가가 된 두 사람을 인터뷰해 보았습니다. 상담소 부소장인 오매와 여성주의상담팀의 감이가 그 주인공인데요, 어떻게 상담소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두 사람이 직접 그린 <인생곡선>과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함께 보시죠!

인터뷰어: 세린(), 승은(), 닻별()

인터뷰이: 오매(), Y.감이()

 

2. 오매의 인생곡선

오매가 그린 인생곡선.

 

: 오매의 인생곡선은 훨씬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요.

: 저는 마이너스 플러스가 엄청 높진 않네요. 저는 80년에 태어났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인생이 약간 힘들었어요. (일동 웃음)

: 그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서울에서 살았거든요. 근데 인천으로 이사하니까 빈부격차가 애들의 사교 현황과 너무 찰떡으로 붙어있는 거예요. 아파트 사는 애들과 아닌 애들. 또 학부모들이 선생님한테 촌지를 줘서 누가 학급회장, 걸스카웃, 보이스카웃을 하는지가 결정되고. 판이 이미 짜여 있다는 게 전학생이기 때문에 더 잘 보였던 거 같아요. 사회 계층의 문제를 그때부터 되게 많이 느꼈어요. 선생님들이 이미 다 육성회와 결부되어 있는 상태에서 학생 평가가 이루어지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해도 어떤 인정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가 자신과 같이 다닐 친구로 저를 찍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걔는 인기가 많다 보니까 성적 대상화 되기도 했고, 집에 돈이 있어서 좋아하는 선생님들도 있었어요. 뭐랄까, 아이돌 같은 존재? 그 친구가 저에게 많은 돌봄을 요구했는데, 등교할 때부터 하교 이후에 걔네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의 시간을 같이 등교도 하고, 목욕탕 가면서 함께 보냈죠. 사실은 남자애들한테 관심이 없으면서도 사교생활을 하고, 부모님이 사업하느라 집에 잘 안 들어와서 외로워하는 걸 곁에서 보면서 많은 감정이 들었어요.

송도유원지 사생대회에 참여한 9살 오매. (1988)

10대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어른들은 잘 모르잖아요. 그 친구와 제가 되게 친하다고 생각해서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 계속 같은 반을 시켜줬어요. 그래서 그 시기에는 해맑게 보내는 시기, 혼자서 보낼 수 있는 뛰노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요. 근데 그 친구랑은 지금도 연락해요. 제가 활동가로 일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그 애의 연예인스러움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요.

 

(일동 웃음)

 

: SNS 셀럽 아냐?

: 완전 셀럽이구요. 이름만 말하면 (안다), 이런 게 아니라 내가 본 일반인 중에  “아 셀럽이란 이런 건가?” 싶게 사교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에요. 

다음엔 중학생이 돼서 걔랑 같은 학교로 배정이 됐는데 반이 처음으로 갈린 거예요. 그게 짐승의 여중생 시절. (일동 웃음) 트롤같이 살았던 거 같아요. 신발도 잘 안 신고 다니고, 씻는 것도 학교 등교해서 씻고. 먹는 거부터 시작해서 누가 누구 찍어서 사귀자고 했는데 거절하고, 여중생들 사이의 온갖 정념이 섞여서 난리 버거지였어요. 애들이 에너지가 뻗쳐서 도시락 까먹고 매점 가고, 도시락 냄새, 땀 냄새, 발 냄새 이런 것들이 섞여 있어서 참 좋은 곳이었다….

 

우리 집은 인천에서 중산층이 사는 동네에 있었는데, 제가 빈곤층이 있는 먼 중학교로 배정이 됐어요. 곧 폐교를 하고 이름을 바꿔서 우리 동네로 이사 올 예정이었거든요. 이 여중 언니들이 동인천에 가서 밤새 술을 먹고 본드를 불다가 건물이 불타버려서 신문에 나고 난리가 난 거예요. 그래서 교육청에서 학교를 폐교시키기로 결정했어요.

: 스케일이 장난 아냐.

: 제가 학교에 배정됐을 때 이 언니들은 뉴스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그 동네 언니들이고 우리 신입생은 교복이 바뀔 예정이라서 교복도 없이 사복으로 다니는, 좀 잘사는 동네 애들이었던 거죠. 그래서 언니들이 우리를 되게 미워했어요. ‘니네 잘 살면 얼마나 잘 살아, 우리는 학교가 없어진다고!’ 이러면서. 그럼 우리는 ‘왜 저런 표정?’ 하곤 했는데.

그런 시기를 거쳐서 고등학생이 됐어요. 제가 외고를 갔는데, 빈부 격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옆 자리 남자애는 집안 사람들이 다 의사여서, 본인 꿈이 교사라고 했더니 엄마가 5일 동안 밥을 안 줬대요. 희한한 시간이었어요. 어떤 애들은 옷을 말할 때 항상 브랜드를 말하고, 심지어 아이스크림을 말할 때도 브랜드를 말했어요. ‘어디에 있는 그 아이스크림 먹어봤어?’ 이런 식으로. 지금은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저는 '그런' 얘기를 그 때 처음 들어봤거든요. 애들이 좋다 싫다는 표현을 되게 많이 했어요. ‘나 걔 싫어. 걔 스타일 싫어. 걔 입은 바지 봤어?’ 저는 이런 얘기에 뭐라고 반응해야 될지도 몰라서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었어요. 

* * *

: 1999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2004년엔가 졸업했을 거예요. 남녀공학 대학이었는데, 여자애들을 연애 가능한 애들과 아닌 애들로 계속 나누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개강파티 때 남학생들한테 그만 좀 연락하라고 말한 여자 동기도 있을 정도로. 제 윗 학번이 진짜 ‘우애’가 좋기로 유명했는데 남자 선배들이 여자 언니들을 얼굴, 몸매, 성격 이렇게 항목별로 점수를 주고 순위를 매긴 게 학과 방에서 발견됐어요. 이런 모습들을 관찰자처럼 지켜보는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운동권이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 활동하는 거 보는 것도 되게 재밌었어요. 대자보 읽는 것도 좋았고, 집회 가면 글씨 빽빽한 찌라시 같은 거 나눠주잖아요. ‘어디에서 무슨 FTA가 진행되는 걸 아십니까!’ 이런 류의 신문에 안 나는 일을 담은 거를 받으면 너무 좋아서 처음부터 끝 글자까지 막 다 읽고.

: 그런 걸 실제로 다 읽는 애가 여기 있었구나. (일동 웃음)

: 핵발전소, 핵폐기장이 왜 문제냐. 프랑스에서 개발된 걸 우리나라로 버렸는데 이 때 무슨 자본이 붙어가지고…. 뭐 이런 거 읽고.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 대신 수업에 안 들어갔죠. (일동 웃음) 왜냐면 수업에 사람도 너무 많고 수업을 찬찬히 듣는 게 좀….

: 나도 진짜 수업을 안 갔어.

: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이 터져가지고 파병한다 이러고 있었는데 찌라시를 A버전으로 할지 B버전으로 할지를 놓고 논의하고. 전쟁을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걸프전에서 폭탄이 터지길 밤새 기다려서 찌라시 나눠주고. 그 때 무기회사 간판에도 올라갔어요. 여의도 종합상가. 가택물 침입죄로 잡혔죠.

: 혹시 빨간줄 있는 사람이에요?

: 아니. 기소되지는 않았고 유치장 두 번 정도 갔었어요. 난 그런 고급 사람은 아니고. 그리고 저 학교 다닐 때 구청 앞에서 동계 철거 반대 운동도 있었어요. 지금은 동계 철거는 금지돼 있는데 그땐 겨울에도 다 철거시켰거든요. 한미 FTA 체결 때는 소 떼 끌고 와서 다 갈아엎고, 무 감자 이런거 돈 안 된다고 다 불태워 버리고. 

: 지금 옛날 사회문제 공부하는 거 같아.

: 트랙터 가져와서. 곡괭이로 경찰들 막 때려 부수고. (일동 웃음)

: 신났어.

: 자기의 운동적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잖아. 

: 이거 영화로 만들어야 될 거 같은데요.

: 그런 때였어. 페미니스트 언니들은 집회할 때 치마 입고 오고.

: 엄청 재밌게 했었어.

: 그 때 여성성을 탈각시키고 다 형이라고 불렀잖아요. 저 처음에 대학왔을 때 선배들을 형이라 불렀거든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너무 대학이 브라더후드다, 남성 동성 사회화 됐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죠. 586세대 언니들 보면 지금도 형 이러잖아요. 그래서 언니들이 집회 때 치마 입고 오고, 힐 신고 오고. 자기답게 꾸미는 그런 것도 많이 있었고.

 

학내에서 반성폭력 운동 한다고 학칙 제정도 하고, 농활 같은 데 갈 때마다 반성폭력 규약을 만들었어요. 남자 선배들은 마치 지금 pc 논쟁처럼, ‘농민들은 그냥 농민일 뿐인데 왜 성희롱하지 말라고 그분들한테 주입하냐. 너무 계몽적이다.’ 이런 얘기 하고. 상담소에서 그 때 대학에 와서 강의를 많이 했어요. 그런 강의에서 활동가라는 사람을 처음 본 거죠.


활동가들이 대학에서 강의를 활발히 하던 시절의 지리산(왼)과 오매(오). (2006)

: 제가 사범대를 다녔는데 교생실습을 하면서 교직사회가 얼마나 위선적일 수도 있는지 많이 느껴서 학교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2003년에 상담소 자원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때가 페미니스트 친구들이랑 본격적으로 유흥의 시기, 유흥과 치정극과 여성운동이 한몸이 되어 있는 혼돈의 시기였어요. 이를테면 3월에 한국 여성의 날이 있으면 그 때 몇 커플이 탄생했는가.

: 말할 수 있는 수위만 말하라고 해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많이 못 말할 거 같다고 아쉬워했어요. (일동 웃음)

: 우리 상담소의 굉장히 많은 모임들에서 그런 치정극이라고 해야 하나요. 러브 어페어들이 되게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어떤 행사에 가면 어긋난 애정관계의 상대들이 만나고 누구는 중간에 나가고. 그런 일들이 되게 많았던 후덜덜한 시기였습니다. 한 번 술을 마시면 일주일 동안 집에 안 갔어요.

: 열심히 일하느라고 안 간 게 아니었어.

 

말하기대회 뒤풀이에서 음주 중인 오매. (왼쪽 두 번째, 2004.)

: 저는 상담소에서 자기방어훈련이랑 성문화운동팀 활동을 했었어요. 그 때 상담소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들, 의식주나 여러 가지 내 삶의 환경이 물들어서 변하는 것. 상담소에서 하는 의제 활동, 상담소로 어떤 페미니스트들이 유입되는지 이런 게 다 연결되어 있던 환경이라고 해야 하나. 특히 대학 내 페미니스트 단체랑 되게 교류가 많았던 때였던 거 같아요. 

일일호프에서 자료집을 팔며 교류의 장에 흠뻑 젖어있는 오매. (오른쪽 두 번째, 2004)

제가 2010년도에 상담소를 한 번 그만두고 2016년까지 다른 일을 했어요. 2017년에 다시 상담소에 와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는데. 2016년 이후는 상승세처럼 보이지만 그러고 싶다는 바램을 담은 곡선이라고 봐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직선이 아니라 거친 건 미세한 균열과 진동들이 있다는 의미에요. 

 

인생 곡선에서 마이너스가 꼭 부정적인지는 모르겠는데 2010년부터 2016년까지가 참 고민이 많은 시기였어요. 나는 누구인가, 왜 인간은 태어나는가, 100살이 될 동안에 뭘 하다가 가야 되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나는 그런 때가 2년 정도 저 시기 안에 있었어요. 저 때 구립 기관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상담소보다 훨씬 많았어요. 그래서 캠퍼가 돼가지고 시름을 잊으면서 안빈낙도, 현실 회피의 삶을 살고, 퇴근하면 맨날 북한산에 달려가서 저무는 해를 보면서 커피를 혼자 마시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2017년에 다시 상담소에 왔죠.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오매. (2018)

 

: 설마 65살 이후로는 일을 하진 않겠지.

: 인생 곡선에서 중심축 위아래로 선이 있는 것은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는 의미인가요?

: 그쵸. 

: 맞아요, 어떤 시기든 다 공존하니까. 이야기 정말 잘하시는 거 같아요.

: 유투브를 하셔야 될 거 같아요.

: (활동가) 모두가 밀고 있다니까요.

두 사람의 파란만장 페미니스트 라이프와 상담소와의 접점이 궁금하신 분들은 오늘부터 연재될 8월 활동가 인터뷰를 기다려 주세요. 내일은 활동가로서의 감이와 오매, 그리고 상담소로 돌아옵니다.

수요일 오후 6시에 또 만나요!

 

기획/편집 : 세린, 승은, 닻별

녹취록 작성 : 세린, 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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