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언론에 난 상담소

2018.05.11. [경향신문] [안희경의 일상과의 대화]예비 꽃뱀과 예비 강간범…이 시대의 ‘사랑’은 어디로 관리자 ㅣ 2019-06-12 ㅣ 395
기사제목 : [안희경의 일상과의 대화]예비 꽃뱀과 예비 강간범…이 시대의 ‘사랑’은 어디로

보도날짜 : 2018년 5월 11일

언론신문 : 경향신문

보도기자 : 필자 안희경

기사원문 :

그날 밤, 티라미수 케이크는 달콤했고, 캐모마일 차는 쌉쌀했다. 카페 창밖으로 손님을 싣고 강을 건너려는 택시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선배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며 한층 생기가 돌았다. 일주일 전에 아들의 여자 친구와 함께 아들이 복무하는 부대로 면회를 다녀왔다고 했다. 남친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 남친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새벽길을 나선 스무 살 아가씨가 스스럼없었다고도 했다.

선배는 긴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꼰 다리를 풀고 자세를 낮추었다. ‘아들 앞길 지키기 팁’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아들 친구의 엄마들이 직장맘인 선배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 엄마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강남 거주민으로, 대체로 세상의 부당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이다. 그 팁은 대학생 아들의 지갑에 수표를 넣어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아들의 ‘원나이트 스탠드’를 양해하겠다는, 그러니 그때 이 수표를 사용하라는 당부의 일환이었다.

나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선배가 덧붙였다. ‘화대’라고. 상대 여성이 강간으로 신고할 때를 대비한 예방이라 했다. 선배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술렁이게 한 청년 여성 이야기를 꺼냈다. 갓 대학생이 된 남성과 성관계를 맺고 경찰에 신고하는 일을 반복했다며, “꽃뱀은 있다”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아들을 둔 엄마들에겐 자신의 불안을 잠재워줄 ‘(대가를 지불한 관계였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청춘이 몸으로 나눈 욕망은 합의였다는 증명이 있어야 하고, 합의가 아니었다면 더더욱 화대를 지불했다는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 수표는, 애타는 모정이 못 미더운 아들의 행동에 들어놓는 일종의 부적 같은 보험이었다 

내 머릿속에 작은 균열이 생긴 듯했다. 나는 그동안 이렇게 생각했다. 남성은 태어날 때부터 (마치 지구상에서 백인으로 태어난 것처럼) 태생적 권력을 부여받으며, 더 강하고 높은 권력에 쉽사리 도달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있기에 여성과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여성은 부와 지위에 상관없이 거리의 폭력, 가정의 폭력에 노출된다. 남성들이 일부 남성의 일일 뿐이라고 남성 전체를 ‘예비 강간범’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말할 때, 이를 기울어진 사회구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어깃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성들이 ‘예비 꽃뱀’으로 취급받듯이 남성들도 ‘예비 강간범’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남성들의 억울함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아들 지갑에 수표를 꽂아주는 모성은 어지간히 당혹스러웠다. 그 순간에는 의문을 풀어줄 뭔가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열흘 뒤 대구에서 북토크를 할 때였다. 행사 말미에 주제가 페미니즘으로 넘어가면서 뒷줄에 자리한 남성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내 딴에는 남성들이 갖는 난처함도 고려해보자는 의도로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를 옮겼다. 하지만 섣불렀다. 내가 충분히 익히고 고르지 못한 말들은 한 청년 여성의 항의에 직면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성폭력을 고발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 가족, 직장, 인간관계까지 죄다 걸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좌절해야 하는 현실인데 섣불리 거짓 고발을 할 수 있겠냐는 질책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인데, 왜 나는 어설픈 화합을 하겠다고 나서며 현실 속에 엉켜 있는 억압의 구조를 뭉개고 말았을까. ‘예비 강간범’ 프레임과 ‘예비 꽃뱀’ 프레임이 작동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잊고 말았다. 남성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강간범이 되지 않을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에게는 꽃뱀이 되지 않을 선택권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도처에 만연한 성추행과 성폭행 실태를 발설하는 순간, 여성들은 꽃뱀으로 낙인찍힌다. 성폭력 범죄의 경찰 신고율은 1.9%(2016년 여성가족부 성폭력 실태조사)에 불과하다. 2차 피해가 만연하기에 더욱 입을 다문다. (2차 피해율 25%, 2014년 한국 성폭력상담소 발표) 신고됐다 해도 사건의 반은 법정 문턱을 못 넘고 불기소 처분된다. 강간 사건 불구속률 또한 91.6%(2016년 경찰 범죄 통계)이다. 꽃뱀 프레임은 여성에게 법적·사회적 형벌로 작동하며 도리어 가해자를 보호하고 있다.


(...)

원문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111642005&code=210100#csidx8023111716178938a26df4c4e74a995

첨부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