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변화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 릴레이 '정치 에세이' 두번째
👟'릴레이 정치 에세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선거를 앞두고 느끼는 고립감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 속에서 길어올린 우리가 바라는 가치, 정치, 정책에 대한 글입니다.
걱정 없이 거리를 다니고 이웃과 소통하며 살고 싶어
유랑 (한국성폭력상담소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
‘지난 2016년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됐다. 사건 직후 강남역 10번 출구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 메모 행렬로 온통 노랗게 뒤덮혔다. ⓒ사진=필자 제공
「안방으로 와라.」
내일은 처음으로 혼자 기차여행을 가는 날. 샤워를 끝내고 기분 좋게 잠들려는 찰나, 가슴이 철렁해지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일 몰래 집을 떠나려는 것을 들켰나? 엄마가 방 안에 숨겨둔 여행 가방을 봤나? 원래 이러려던 계획은 아니었다. 며칠 전, 성인이 되자마자 가장 하고 싶었던 혼자 여행의 꿈을 이루기 위해 1주일간 ‘내일로’ 기차여행 계획을 최대한 세세하게 짜서 부모님에게 보여드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혼자서 위험하게 어딜 가려고? 안돼.”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몰래 다녀와서 혼자 가는 여행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리 숙소와 교통편을 다 예약해두었고 장롱 안에 배낭을 숨겨두고 조금씩 짐을 쌌다. 그리고 여행을 하루 앞둔 전날 밤, 이런 호출을 받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몰래 여행계획은 들통났고 그날 거의 1시간 넘게 부모님에게 혼이 났다.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어디로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날 밤, 울면서 처음으로 실감했다.
외박 투쟁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밤늦게 친구와 이야기하다 친구의 고민 상담이 시작되어서 위로해주고 싶을 때, 그날따라 알딸딸하고 기분 좋게 술이 취해서 흥이 올랐을 때 집에 들어오라고 불호령을 내리는 엄마와 나 사이에 늘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받는 것 같았다. 나는 귀가 시간을 통제하는 부모에게 계속 저항했지만, 동시에 밤길을 걸을 때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핸드폰을 보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4년이 지난 2016년, 강남역 노래방의 남녀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범인은 남성 몇 명을 지나 보내고 여성을 노려 살해했고, 범행 동기를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또래 여성이었고 노래방은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장소였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방문한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많은 여성들이 추모하고 있었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것은 여성혐오 범죄다’라는 내용이 넘실거리는 포스트잇에 나도 한마디를 보탰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하게 “정신이상자”의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이름 붙여졌다. 경찰과 정부는 남녀공용화장실을 분리시키겠다, CCTV를 더 설치하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 사건의 원인을 정신장애인에게 돌리며 장애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여성의 안전을 책임지겠다며 정부가 내놓는 정책은 나를 전혀 안심시키지 못했다. 식당이나 가게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몸에 이미 새겨진 두려움은 밤길에서 남녀공용화장실로 확대되었을 뿐이었다. 마치 첫 혼자 여행을 시도할 때 엄마가 내게 말한 것처럼 세상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위험하게 어딜 가려고? 안돼.”
지난 2023년 8월 24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은 서울 관악구 목골산 등산로에서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을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정부의 대책이 성공했다면, 더 이상 살해당하는 여성은 없었을 것이다. 2023년, 또 한 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이번에는 밤길도 아니고, 화장실도 아니었다. 출근하는 길 산책로였다. 이번에 정부는 ‘가석방 허용하지 않는 무기징역’을 도입해 강력 범죄자를 엄벌하겠다고 나섰다. 이전에 발생한 흉기난동 사건 대응과 겹치며 평범한 거리에 장갑차가 등장했다. 정부는 성폭력 대응을 ‘(물리적) 힘이 없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힘이 센’ 범죄자를 공권력, 군사력과 같은 ‘더 큰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상근활동을 하는 성폭력상담소에서 조직한 긴급행동은 “성평등해야 안전하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새겨진 두려움이 공원으로 확대되기 전에 여성들이 모여 산길을 밟으며 추모했다. 구호를 외치며 추모하는 행렬은 신림역까지 이어졌다.
CCTV 설치나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치안 강화나 엄벌주의만이 젠더폭력의 해결책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여성이 자꾸 희생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차별적인 사회가 여성을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여성이 희생되는 젠더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미봉책에 불과한 정책을 내놓을 뿐 성범죄 무고죄 처벌을 강화하겠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언설로 오히려 성차별을 조장했다. 공원에서 외쳤던 구호처럼 성차별을 해결하지 않으면, 젠더폭력은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내가 갓 성인이 된 시절로 돌아가서 몰래 여행을 들킨 날, 울면서 내일로 티켓 예약을 취소하려고 했으나 취소가 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타협해서 당일치기로 처음으로 혼자 기차를 타고 단양을 다녀왔고 이때 느낀 설렘과 자유로움이 계속 다른 여행을 도전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곳을 더 많이 걷고 다녀보고 싶어서 활동명도 ‘유랑’이라고 지었다. 우리에게는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 있을 자유가 있다. 범죄자를 분리하고 CCTV를 설치해 “안전한”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여성의 공간을 제한하는 정책일 수밖에 없다. 걱정 없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여성차별을 철폐하는 모든 공약이 젠더폭력 대응 정책에 포함되기를 바란다.
*위 글은 여성신문에 '4·10 페미니스트가 꿈꾸는 세상'이라는 연재명으로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4·10 페미니스트가 꿈꾸는 세상] 걱정 없이 거리를 다니며 살고 싶어 < 4·10 페미니스트가 꿈꾸는 세상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여성신문 (wome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