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에서 420여명의 여성인권운동 활동가들이 무주 태권도원에 모였습니다. 한국사회 여성인권운동 역사상 (광장에서의 집회 외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페미니스트 420명이 1박2일동안 웃고 떠들고,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는 역사적인 이 자리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즐겁고 설레는, 감동적인 경험이었습니다.
1일차 단체사진
이 자리의 시작은 아마도 이 기사 그리고 이 기자회견이었을 것입니다.
위 기자회견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번 정부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위시하여 당선된 이후, 2024년 예산 수립 과정에서 젠더폭력 피해자 지원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하려는 시도가 포착되었습니다. 이는 젠더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기관(가정폭력/성폭력 상담소 등등)들을 통합해버리려는 꼼수였습니다. 예산삭감 시도는 단순히 돈의 사용을 줄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피해자 지원 현장 각 영역 활동가들과 기관들에 누적된 전문성을 무시하고는 겉보기에 뭔가 더 효율적인 것처럼, 피해자에게 유리한 것처럼 포장하여 결국은 여성가족부를 축소함으로써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신경쓰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은 행보였습니다. 여성폭력 피해자들을 직접 지원하는 현장 단체들은 2024년 삭감된 예산안을 폐기하고 더 나은 성평등 정책의 실현을 촉구하기 위해 모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현 정부가 보이는 성평등 정책의 후퇴와 백래시라는 엄혹한 정세 앞에, 여성폭력 현장단체들은 서로의 상황과 생각과 의견을 모아야 할 필요를 확인하였습니다. 각각의 기관들은 직접 지원하는 대상의 피해 유형에 따라 가정폭력상담소 및 피해자보호시설/성폭력상담소 및 피해자보호시설/성매매피해여성상담소및 피해자보호시설/이주여성상담소 및 피해자보호시설 등등등 협의회로 연결(네트워킹)되어 있고, 하나의 단일한 조직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현 정부의 기조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야할 필요가 있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더 자주 만나고, 많이 이야기 하고, 더 치열하게 논의해야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가 바로 <2024 여성폭력 대응 현장활동가 전국 워크숍>이었습니다. 각 단체들을 위기에 빠트린 것이 현 정부인데, 그로 인해 우리는 더욱 가까이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더 강고한 연대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고도 했으니, 우리는 지금의 위기를 딛고 더 높이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참고글] 자료집 <2024 여성폭력 대응 현장 활동가 전국 워크숍: 우리, 연결된, 큰 걸음> 중 여는 글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들은 여성폭력 생존자를 지원하고, 성차별과 여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여성폭력 생존자들에게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고, 사회의 폭력과 차별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끊임없이 맞서 싸웠다. 특히, 최근 대통령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과 함께 정부의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감축 문제, 한국 사회 내 여성혐오와 연일 보도되는 여성살해 사건 등 굵직굵직한 여성폭력 관련 이슈로 어느 때보다 숨 가쁘게 달려온 지금, 잠시 멈추고 우리가 지나온 길, 현재를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본 행사를 기획한 여성폭력피해자지원현장단체연대는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데이트폭력, 스토킹, 디지털성폭력, 그리고 이주여성, 장애여성에 대한 여성폭력 등 모든 형태의 여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인식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전국의 현장 단체 총 502개소가 결성한 연대체이다. 전국에서 2천여 명 이상의 활동가들이 피해자 지원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피해자 지원 기관들은 다양한 구조 등을 통해 상시적으로 소통하고 있으나, 전체 활동가가 한자리에 모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모두의 활동이 여성폭력 생존자를 지원하고, 성차별과 여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것에는 다름이 없지만, 고유 업무 영역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해 자신의 활동을 돌아보고,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아갈 힘을 가지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본 행사를 기획하였다. 워크숍의 목적 ○ 여성폭력에 대한 비전, 관점, 정책, 예산이 부재한 현황에 맞서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과 대응 활동을 하는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데이트폭력, 스토킹, 디지털성폭력, 이주, 장애, 긴급지원, 원스톱 지원 분야 실무자들이 모여 현장 단체의 사회적 역할과 기여를 확인하고 지지의 장을 이룬다. ○ 한국여성인권향상의 역사, 현장성, 협력적 네트워크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내고, 미래 활동을 위한 주제별 토론 및 향후 과제 논의를 통해 개별기관, 개별협의회의 어려움과 쟁점을 교류하면서, 향후 여성인권운동의 관점과 방향을 모색한다. ○ 다르지만 닮아있고, 닮았지만 각기 다른 여성폭력 대응 현장에 대한 상호 이해를 통해 서로 배우고, 연대를 통한 협력의 기반을 강화한다. ○ 연결된 힘으로 현실을 바꾸는 여성인권운동 활동가의 정체성과 삶의 비전을 나눈다. |
이렇게 전국의 활동가들이 강원도 무주로 모였습니다. 서울에서는 기차를 타기도 하고, 강남과 은평 일대에서 전세버스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도 단체 이동이 있었지요. 개별적으로 차량을 이용해서 오신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멀고 먼 거리를 피곤함과 지루함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달려왔습니다.
행사장에 도착해보니, 부지런한 준비스탭분들이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벌써 감동이 사작됩니다.) 각 기관들에서 이 워크숍에 참여한 활동가들에게 제공해주신 각종 선물들과 자료집, 그리고 멋들어진 티셔츠까지 한아름 선물을 받아안고 강당에 모였습니다.
첫번째 순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이미경 이사님의 기조발제 “세상을 바꾸는 젠더폭력 대응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미경 이사님은 한국사회 반성폭력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여성인권과 젠더폭력에 대항하는 치열한 활동상들을 하나씩 짚어주셨습니다. 반성폭력운동 역사의 순간순간을 직접 경험하신 선배 활동가의 생생한 증언과 겸손한 조언은 참가한 활동가들 각자의 마음에 작은 파도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조금씩 힘을 내어 성평등한 사회로의 변화의 속도를 높여서 130년 이 아닌! 빠른 시간안에 성평등 한국을 만들어 보자는 전의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살아생전에 그 모습을 지켜봅시다!”
활동가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미경 이사님의 발제
두번째 기조발제는 한국여성의전화의 송란희 상임대표의 “지금 이곳, ‘통합’ 정국과 방향 모색”이었습니다. 역사를 훑어보았으니 이제 현제 정세를 톺아봐야지요. 왜 현 시점에 “통합”이라는 키워드가 우리 눈앞에 와 있는가, 지금까지 현장활동 단체들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던 변화이자 함께 앞으로 나아감으로서의 “통합”과 현 정부가 몰아붙이는 일방적 “통합"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보고, 앞으로 우리의 방향을 설정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같이 기조발제를 들으며 고민하고 공부했으니, 마음과 몸을 푸는 시간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체크인 시간은 꿈누리장애인성폭력상담소 소장이자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이신 최현진 활동가님이 진행해주셨습니다. 전문 레크레이션 강사라고 소개해도 철썩 같이 믿었을 것 같은,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위트넘치는 진행이 대단했습니다. 진지하기만 했던 활동가들이 신나게 이내 웃고 떠들고 춤추고 움직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으시더라고요. 진행자의 주문에 맞추어 옆사람의 어깨를 주무르고, 율동을 따라해보았습니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바쁘게 작은 물건을 옆으로 옮겨보다가 저는 그만 음악이 머추는 타이밍에 걸려서 좌절하기도 했는데요. 춤에는 영 젬병인 저는 역동적인 다른 활동가분들의 댄스를 넋놓고 바라보며 박수만 치기도 바빴습니다. 와~ 이렇게 잘 노는 활동가들! 정말 대단하다! 했지요.
그 다음 시간은 5분 스피치 순서였습니다.
발표자마다 20장의 PPT를 준비하여 자동으로 슬라이드가 넘어가 5분 내 발표를 마치는 방식이었습니다. 잠시도 딴소리를 할 수 없이 숨가쁘게 진행되었지만, 각 활동가가 준비해오신 발표 내용에 빠져들고 감동받으며 함께 웃고 울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총 여덟분이 발표를 해주셨는데, 모든 분들의 발표마다 각양각색의 울림이 있었어요. 그날 발표해주신 여덟분의 활동가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RESPCT!
잠시의 쉬는 시간 후에는 저녁 연회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활동하는 지역, 각자의 배경과 환경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단지 “여성인권운동단체 활동가” 라는 정체성만을 공유하고 만났습니다. 무작위로 추첨을 하여 테이블이 지정되고, 낯선 활동가들과 통성명을 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육류가 대부분인 식단이라 비건인들은 별도의 도시락을 사전에 신청하여 신선한 도시락을 제공받았습니다. 식사 후에는 전국연대 활동가들이 준비한 교류의 시간이 진행되었습니다. 데면데면하는 활동가들이 같은 조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조 이름을 짓고, 함께 몸을 움직여서 미션을 성공하는 등 빠른 적응력과 단결력을 뽐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원 다섯 명이 직접 종이컵에 손을 대지 않고 고무줄과 줄을 이용하여 종이컵을 다른 테이블로 옮기는 게임은 고도의 집중력과 단결력이 필요했습니다. 생존게임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물건들과 실제로 조난되었을 때 생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해보게 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예상보다 생존에는 물과 두뇌회전이 중요했습니다.
둘째날 아침에는 이번 워크숍의 하이라이트이자 백미! 모둠토론 및 피날레 퍼포먼스가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오매 소장의 사회로 무주 태권도원의 T1경기장에서 진행되었어요. 엄청난 규모의 경기장을 가득채운 활동가들이 7~15명씩 36개 모둠으로 나뉘어 모둠토론을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열띤 토론의 현장!
각 모둠들은 아래 중 하나의 주제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주제 1. 세상을 바꾸는 젠더폭력 대응 운동
주제 2. 지금 이곳, ‘통합’ 정국과 방향 모색
주제 3. 정부의 일방적 통합 추진에 맞서, 우리가 토론해야 할 쟁점 - 성평등, 복합차별, 전문성
주제 4. 사이버성폭력 '불법화 이후' 의 과제
주제 5. 페미니스트가 지구를 구한다
주제 6. 이주여성, 차별과 경계를 넘어
주제 7.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주제 8. 지역여성운동에도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주제 9. 통폐합 정국에서 쉼터운동의 비전
주제10. 나는 왜 반성매매운동을 하는가
모둠 토론을 마치면서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무엇에 주목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적어서 제출했는데요. 각각의 문장들을 엮어서 즉석으로 하나의 선언문이 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역시 활동가들은 다릅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할 것이 좀 더 명료해진 순간이었습니다.
함께 모여 선언문을 읽었다
젠더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기관들은 적게는 3인 많게는 20인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되다보니, 이렇게 대규모 인원을 동시에 수용가능한 곳이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고, 그곳에 우리와 같은 일을 하는 전국의 활동가들이 모여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쾌적한 공간을 찾아서 참여자들이 모두 편안하고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걱정없이 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이번 워크숍을 준비한 모든 스탭분들께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활동가라면 모두 저와 같은 고마움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활동가들 모두 늘 이런 행사들을 준비하고 실무를 맡아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모두 별도의 독립적인 단체들이기 때문에, 이번 행사는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100%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전체를 아울러 의견을 청취하고 실무를 준비하기 정말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어려운 일을 자처하여 기꺼이 해주신 스탭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흔쾌히 마음을 내어 함께 해주신 모든 참여자와 공동주최 단체에도 뜨거운 연대를 보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한 걸음 더 연결됩니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의 감이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