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는 동물과 다름 없다'라는
말이 불편했었다
안백린
필자는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동시에 지향하는 에코페미니스트이며, 우리 사회 속에서 억압받는 동물들을 여성과 연결 지어 강의를 하곤 한다. 호응을 받기도 하지만 이따금 이런 비꼼을 듣게 된다. "어떻게 여성을 동물 취급해요? 여성을 (비인간) 동물에 연결하는 것이야말로 여성 혐오가 아닌가요?"
그러한 피드백들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처음엔 필자 또한 불편했기 때문이다. 첫째, 주체적인 여성들을 '죽임 당하여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에 비유하는 것이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혹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 상승을 위해 싸우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성들은 동물과 같은 처지다'라는 말이 지금도 불만스러운 자신의 위치를 더욱 격하시키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생태주의자인 필자는 그래도 여성과 동물의 비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희망을 느낀다. 그 말인즉슨, 이 사회 속에서 비인간 동물들의 처지가 여성의 위치보다도 훨씬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인간 동물들의 처지가 정당화되는 이유는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간 우월주의, 종차별주의에 기인한다. 인간은 더 똑똑하니까, 동물들은 항상 그렇게 대접받으며 살아왔으니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동물들을 다스리라고 명하셨으니까. 불과 백 년 전에 우리 사회는 여성을 두고 같은 생각을 했다. 남성들이 더 우월하니까, 여성들은 항상 하찮은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으니까, 성경에서 아내들에게 남편을 순종하라고 명하셨으니까. 종차별, 성차별 모두 전통적인 권력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여성과 동물을 연결하게 된 것이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친척에게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시인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내가 만약에 남자였으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었을 거야.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여성 차별, 여성 혐오가 싫은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동물의 감정까지 고려할 수 없어." 필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고민에 빠지게 됐다. 페미니즘은 불평등에 저항하는 정의 운동인가? 아니면 여성의 권리만을 찾는 운동인가?
'비건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쉬울까? 페미니스트가 비건이 되는 것이 쉬울까?'
글로벌 동물권 단체, 피타(PETA)는 여성을 상품화한 캠페인을 자주 한다. 헐벗은 여자가 '나는 가죽을 입기 보다 벗을래요'라는 캠페인을 하여 이목을 끈다든지, 동물 보호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포르노 사이트를 개설한다는 등, 평상시 동물보호에 관심 없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적극적인 홍보수단으로 여성의 성을 활용한다고 PETA는 주장한다. 이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노골적인 성차별주의, 성의 상품화라는 이유로 반발한다. 개인적으로 피타가 하는 활동의 골자는 이해할 수 있지만,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데에만 치중하다 보면 그 본질이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 상품화는 '괜찮은 것'으로 비추어지거나, 동물권 운동이 (여성)인권은 무시하고 동물권만을 위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필자 또한 동물과 여성을 연결하는 내용으로 여성단체를 통해 강의하였을 때 분노하는 코멘트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여성을 이용하여, 동물권을 주장하지 마세요." 물론 그분들은 필자의 강의를 듣지 않고 피타와 같은 동물권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과 동물을 동일시하는 것은 동물권을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진 선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여성이 느끼는 차별은 동물에 가해지는 차별과 맞닿아있으며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 둘 다 억압의 구조에 대한 항쟁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성(性)을 소비하고 있는가?
두 억압의 구조의 연결성은 놀랍게도 여성 축산동물이 많이 착취되는 구조로 강화된다. 고기란 결국 대규모 생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강제 임신을 통해 만들어진 여성 동물 성폭력의 부산물이며, 우유는 암소를 강제 임신한 후 송아지를 뺏어가고, 출산한 소에서 잠시 동안 나오는 우유를 짜내는 것이다. 더 이상 우유가 나오지 않으면 다시 임신 시키며 자연조건하에서 1회 분만을 하는 20년 수명의 암소가 7번의 임신을 거치며 보통 4년 만에 단명한다. 그렇게 죽은 암소는 육우로서 팔리며 저렴한 패티로 만들어진다. 계란을 생산하기 위하여 암탉은 A4 용지보다 작은 공간에서 빽빽하게 길러지며, 생산성을 위해 밤새 조명을 밝혀 안 재우기도 한다. 자연의 암탉은 수컷과의 교미를 통해 연 12-18개의 달걀을 낳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만들어낸 지금의 암탉은 20개월 동안 200개의 알을 낳다가, 생산성이 낮아진 노계가 되면 죽임을 당한다. 자연조건 하의 닭의 수명은 15~20년으로서, 인간 나이로 치면 영유아 때에 '노계'로 불리며 죽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렇게 생산된 계란과 우유는 곧 여성 동물의 부산물이다. 계란을 낳지 않는 수평아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대부분 죽음을 맞이한다. 수소 또한 거세하여 암소처럼 육질이 부드럽게 만든다. 결국,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동물성 식품은 비남성인 것이다.
약자를 바라보는 약자
만약에 이런 면이 불편하다면, 또 많은 여성이 고기로 비유되고 있었던 역사를 알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고기를 편하게 먹을 수 있을까? 여성의 차별에 민감한 사람들은 동물이 느끼는 고통에 마음이 저리지 않을까? 하지만, 최근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에서는 그래 보이지 않는다. (약간의 스포일러 주의) 영화 속에서는 세 부류의 가족이 등장한다. 지상에 있는 부잣집, 송강호 가족의 반 지하 집,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벌레 같이 기어 올라오는 또 다른 가정이 있다. 영화 속에서 부잣집만 약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 또한 자신보다 더 약자들을 혐오하고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두 약자가 연대하지 못했던 것일까? 페미니스트가 여성차별을 비판한다고 하여 사회의 모든 차별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현실 속에서, 너무나 많은 윤리적 기준 때문에 지쳐 의욕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자들이 연대한다면, 비인간 동물들의 처지를 성차별과 별개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면, 더 강력하고 정의로운 운동이 되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