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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회복

기리와 함께 춤을!
  • 2011-10-27
  • 267



나 : 풀어봐.
기리 : 쌤, 이건 다 아는 거잖아요. 숙제로 해요~
(오늘 기리는 눈꺼풀이 무거워 보인다.)  

나  : 아냐, 지난 번에도 다 안다고 해서 숙제로 내줬는데, 몰라서 그냥 가져왔잖아. 이것도 모를 지도 몰라.
기리 : 안다구요오~~~~~~
나  : 내기할래?
기리 : 네!
나  : 니가 풀면 쌤이, 못풀면 네가 커피 타주기.
기리 : 좋아요!
(잠시후)
기리 : 쌤, 어렵잖아요오!
나  : 히히, 거봐. 네가 졌다!
기리 : 알았어요, 쌤. 
하곤, 씽 하게 정수기로 달려간다. 

기리와 공부할 땐 심심할 겨를이 없습니다. 
피곤하다고 눈이 반쯤 감겨 있을 땐 커피타주기 내기를 하기도 하고, 삼천포로 빠질 때는 다시 제자리로 데려오고, 
친구들과 있었던 얘기를 신이 나서 할 때는 손뼉치며 듣고. 
한 시간 반이 지나면 혼이 쏙 빠지곤 합니다. 
그래도 공부에 제대로 '삘 받은' 기리가 이것 저것 물어보고, 시키지도 않은 예습까지 해 오는 걸 볼 때는 
비타민 드링크 세개를 먹은 것 보다 기운이 쑥 돋곤 합니다. 
도대체 기리에겐 무슨 재주가 있을까요?
 
< 기리 = 비타민 드링크? 이런 맘을 기리가 좀 알아줬으면. ㅎㅎ>

기리와 공부를 시작한 지 세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만나서 수학과 영어 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여느 과외와는 좀 다릅니다. 
기리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고 있는 진도를 열심히 뒤쫓아가는 게 아니라
기리와 내가 소화 할 수 있는 만큼만 공부하려 합니다.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게 우리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기리가 "샘! 이거 모르겠어요!"라고 말 할 때 가장 즐겁습니다. 
모르니까 알고 싶다고 하는 거니까요. 
알아가는 재미. 그게 공부라는 걸, 기리와 함께 공부하면서 진~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엔 여느 과외선생처럼 학교 진도에 뒤지지 않도록 따라오라 다그쳤습니다.
그 때 기리는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는 것 처럼 열심히 끄덕였습니다. 
저는 기리가 아는지, 모르는 지도 모른 채 그저 채찍질만 했습니다. 바보같은 선생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사교육을 받아 본 흔적이 없는 친구. 
모르는 부분이 있어도 섬세하게 짚어주는 보호자가 곁에 없었던 친구. 
그런 기리에게 학교 진도를 따라가도록 다그치는 일은 고문같은 것이었을 텝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미안합니다. 

고문같은 공부. 기리가 "저 안할래요!" 라고 뛰쳐나간 후, 저는 정말로 정말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돈 받고 하는 과외아르바이트였다면, 부모님에게 당장 '애가 말을 안듣습니다. 저도 안할래요.'하곤 잊어버렸을 텝니다. 
그런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저는 정말 '공부란 걸 싫어하게 만든 마귀할멈' 이더군요. 
진도 정해놓고 이만큼 따라오라고 다그치고, 숙제는 태산같이 내 주고 무조건 해 오라 하고, 못해오면 이유는 믿지도 않았으니. 
아마. 많은 '어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독단적이고, 이기적이고, 대화하지 않고, 맘대로 정하고 따라오라고 하는. 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요. 
생각해 보니 저는 그런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리덕에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기리가 모르는 것만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몇 학년 것이든 상관 없이. 
이제까지 기리가 모르는 상태인데도,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찾아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기리가 영어도 수학도 재미있어해서 제가 다시 욕심을 부리는데, 또 '배우는 재미'를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습니다. 

기리는 솔직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기리가 말하는 건 '정말' 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나는 어린 친구들이 하는 말을 '정말'로 믿지 않은 적이 많았습니다. 
'숙제 안하려고 하는 거지?' '꼼수 부리는 거 아냐?' 하고요.

기리는 재주도 많은 친구입니다. 
요리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잘 (한다고) 하고, 오카리나도 잘 분대요.(요건 확인해 보지 못해서. ㅎㅎ)
이제까지 나는 어린 친구들의 그런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친구들은 말이 많으니까, 그저 하는 말이거니 했지요. 

지금은 기리의 말을 믿고 귀담아 듣게 됐습니다. 
덕분에 남의 말 잘 안듣는 저의 태도도 확인했구요!

이번 여름과 가을. 
나는 이제까지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공부하려고 잔뜩 벼르며 하던 일도 그만뒀고, '취미삼아' 기리를 가르치는 일을 자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과 가을동안 돈을 주고 배웠던 어떤 것들보다 가장 큰 배움은 기리를 이해하는 것. 사람을 이해하는 것.
조금이지만, 진심으로 말입니다. 


 이 글은 지난 여름부터 기리 과외를 해 오신 우성희 선생님께서 써 주신 글입니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