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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역량강화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일상회복과 치유를 위한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소개합니다.
[2009. 여섯번째 작은말하기 후기] 피해경험이 우리에게 남긴 것_나랑
  • 2009-10-21
  • 3126

여섯번째 이야기

 

 
침묵을 ‘들어주는’ 법
어진에게 말하기 대회 사회를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야말로 쏘! 쿨~하게 알았다고 했다. 그냥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담담한 반응이었는데, 막상 받아놓고 보니 왜 그렇게 후달리는지, 먼저 사회를 봤던 아오리에게 황급히 SOS를 쳤다. 사회 어떻게 보면 되냐는 나의 질문에 아오리의 대답은 “침묵을 들어주면 된다”고.....이건 뭥미? 암튼 긴장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막상 당일이 되자 긴장했는지 합정역에 내려서 출구로 나와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2호선 타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오리는 왜 “침묵을 들어주면 된다”고 했을까. 난 침묵이 싫은데...
나는 사람 사이의 침묵을 참 불편해 한다. 절친과도 대화를 하다보면 중간에 끊겨서 침묵이 흐르기도 하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엔 더더욱 그러한데, 그럴 때마다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해한다. 무슨 얘기라도 꺼내서 이 침묵을 깨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다보니 얘기를 하면서 다음 얘기를 생각하고 있어야 해서 집중을 못할 때도 많다. 그래야 중간에 침묵 없이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병적으로 침묵을 싫어하는 나에게 침묵은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침묵이 흐르면 내가 생각 없는 사람(할 말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들통 나는 것만 같아 두렵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거부당할까봐, 친해지지 못할까봐 두렵다. 사실 작은 말하기 사회를 제안 받았을 때도 가장 두려웠던 건 침묵이 흐를까봐 였다. 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그 침묵을 어떻게 견디지?
그날도 순간 순간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날의 침묵은 나를 불안하게 하거나 내 가슴을 무겁게 하지는 않았다. 그날 사회를 보면서 나는 침묵을 초조하게 ‘견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듣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그 순간에도 우리들 위로 공감의 에너지는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피해경험이 우리에게 남긴 것
추석연휴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조촐하게 모인 우리. 처음 온 그녀들, 오랜만에 온 그녀들, 꼬박꼬박 출석하는 그녀들.
상담을 받기 시작한 그녀의 웃는 얼굴, 처음엔 가해자를 ‘그 분’이라고 말하던 그녀가 이제는 직장상사에게 성폭력 상담을 받으러 가야해서 반차를 쓰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해졌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맑아진 얼굴, 요새 많이 편해졌다면서 남자 말고 헐크족 같은 종족이 하나 더 있어서 남자들도 좀 괴롭힘을 당해봐야 한다면서 우리를 웃겨 준다.
아주 오랜만에 온 그녀는 작은말하기 식구들과 관계맺기에 대한 연습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전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친밀한 관계맺기가 작은말하기 식구들과 가능함을 깨닫고, 다시 시도를 해본다고 한다. 우리 모두 흥쾌히 그녀와의 친밀도 높이기 놀이를 즐겨주리라!  
오늘 처음 온 그녀들은 참 다정하다. 조근조근 말이 없는 듯 하지만 찬찬히 보면 말이 참 많다. 그리고 참 잘 한다. 말소리가 참 따듯하다. 서로에게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 그녀들. 좋아보인다.
조두순 사건을 접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우리들. 들끓고 있는 사람들의 분노가 반갑지만은 않은 우리들.
이 사건이 이렇게 알려지는 것을 나영이 본인은 원하고 있을까, 피해자 자신의 결정권 없이 이렇게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분노하는 것을 나영이는 나중에 어떻게 생각할까.  또 그만큼 잔인한 사건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이토록 관심을 가졌을까. 이 사회에서 가르쳐주는 성폭력 예방수칙은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는 것인데, 낯익은 사람에게 당하는 성폭력은 어쩔거냐고. “영원히 여자구실 못하게 됐다”며 성폭력 피해경험을 두고 끝난 인생, 버린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짜증난다. 나영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성폭력 피해자라고 불쌍하게 여기기보다는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음 좋겠다....
그래. 성폭력 피해경험은 확실히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겼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불신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볼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세상이 바라보고 싶어하는, 그들의 틀에 우리를 구겨 넣지는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성폭력 피해도 한 인생을 끝장낼 수는 없다. 
 
‘작은 말하기’에서 뽕 맞고 가는 여자들
올해는 연말에 파자마 파티를 하자는 의견이 오고 갔다. 시간 참 빠르다 하면서 올해 4월 작은 말하기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려본다. 오기 전 수없이 망설였고, 내가 이해받을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 따뜻하게 손 잡아준 그녀, 내 무릎 위에 손을 얹고 나를 토닥여 준 그녀가 있었다. 이 곳에서만큼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웃고 울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 설사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이 나에게 상처로 와 꽂히지는 않는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작은 말하기에서 뽕을 맞고 가는 기분이다. 더 많은 성폭력 생존자가 이 사심없는 지지와 공감의 에너지 속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 
여러분, 작은 말하기에 오셔서 뽕 맞고 가세요!!!^^;  
 
-나랑-
 

댓글(8)

  • 유다
    2009-11-30

    후기보다가 왜 눈물이 흘렀는지. 나랑의 사회가 털털해서 낯선 공간에서도 낯익은 느낌을 만나기도 하였고, 반대로 오랜만에 날카롭지 않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들을 수 있어서 기분 좋았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동과 만나고 싶다는 낮잠에게, 그리고 분노가 아닌 현명함이 필요한 저에게 앞으로도 좋은 공간이기를. (몇시간만에 정들었다고, 11월 말하기에 나랑이 없어서 아쉬웠어요)

  • 나랑
    2009-10-23

    와~ 여러분, 댓글 감사! 나만 상담소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ㅋㅋ 김밥 많이 먹는다고 구박받던 때도 있었지만, 사회보는 날 위해 푸드스타일리스트가 만든 샌드위치를 준비해주다니...어진, 감동이었어.^^ 다들 너무 보고 싶다!!! 근데 나 이번 달 못 가는 거 있죠. 11월 5일에 있는 생존자말하기대회에서 꼭 만나요!

  • 어진
    2009-10-22

    샌드위치 또 한표~ ㅋㅋ

  • 달가루
    2009-10-22

    나랑의 생각, 나랑의 느낌. 어쩜 나랑 같을까요? ㅋㅋ 나랑님의 재미있었던 진행이 아직도 생각나고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 다음 말하기 때 또 만나요~

  • 어진
    2009-10-21

    세상에게 칭찬받다니 너무 좋은걸요..^^ ㅋㅋ

  • 세상
    2009-10-21

    나랑~ 조용히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오른쪽 사진 참 감동이에요 딱 이정도를 선택하기까지의 배려가 엿보이는데요ㅋ 다만 샌드위치 단독샷이 없어서 아쉽~ 진짜 맛났는데^^

  • 2009-10-21

    나랑의 후기를 읽으니, 사회자가 되기까지 첫 걱정이 무색하게도, 얼마나 많이 듣고 느끼고 사랑의 기운을 뿜어냈을지 느껴집니다. 말이 없지만 말이 참 많은 우리들! 이거 진짜 멋진 말인 것 같아요.

  • 어진
    2009-10-21

    이번 사진이 좀 그렇지요? 추적50분도 아니고, 처음으로 샌드위치고 있었고, 감자튀김도 있었고 그렇게 나름 상큼하고 좋은 세팅이었음을 알립니다.^^ 사회자인 나랑이 특별히 빵을 좋아하여, 큰 맘 먹고 빵을 선택하였습니다. 아주 맛났지요~ 조금 있으면 또 만나겠네요. 이제 겨울이고, 바람도 많이 불고, 추워지고. 추운건 싫지만 나름 좋네요. 이번엔 따뜻한 오뎅국물이라도 한잔 했으면 하는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