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의 개념
성폭력의 개념은 사회적 통념과의 투쟁 과정 속에 변화합니다.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성적, 경제적 통합성(integrity)을 침해하는 젠더기반폭력으로, 강간, 추행, 성적 괴롭힘, 비동의 촬영·유포 등 상대의 동의 없이 행하는 성적 행위를 말합니다.
지난 30여년 간 한국의 여성운동단체는 성폭력을 특수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중심적 문화나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해오면서 성평등한 인식의 변화를 위해 활동해왔고,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한 국가와 법, 사회의 공적인 책임을 요구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여성운동단체는 성폭력이란 피해자가 수치스러워야 할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의 경험은 더 심한 피해와 덜 심한 피해로 구분하거나 경중을 나눌 수 없으며, 피해 이후 주변인들의 왜곡된 성인식과 통념에 의해 발생하는 2차 피해가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려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폭행·협박의 증명을 중심으로 하는 법적인 성폭력의 판단 기준은 대다수의 성폭력이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며, 가해자들은 폭행이나 협박이 없이도 친밀함이나 권력적 위치를 기반으로 가해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과 현실의 괴리는 한국의 미투운동을 촉발시켰고, 성폭력 피해자들은 점차 사회변화를 촉구하는 연대와 책임의 정치적 주체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폭력의 법적 판단 기준을 폭행·협박 여부가 아닌 자유롭고, 의식적이며, 자발적인 적극적 합의의 문제로 이동하기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성폭력이란 상대를 성적으로 존중하고 상대가 처한 조건과 맥락을 고려하여 몸과 마음이 통합된 존재로 바라보는 성적 통합성(integrity)을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되기를 제안합니다. 이를 통해 성폭력을 피해의 경중, 물리적 증거 여부, 피해자 책임의 문제가 아닌 관계적이고 상호적인 개념으로 바라보고, 사회적 권력 관계 속에서 성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성폭력의 개념은 해당 시대에 성폭력을 둘러싼 통념들과 이에 대한 저항적 투쟁의 과정 속에서 변화합니다. 따라서 성폭력의 개념과 정의는 기존의 주류 질서에서 누락되어왔던 여성, 소수자, 피해자들의 경험에 기반하여 열려있고 변화하는 개념으로 늘 새롭게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