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선언문
한국성폭력상담소 30주년 비전 선언문
균열을 일으키는 용기, 일상에 스며드는 변화
말하기 시작하자 균열이 일어났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가족, 학교, 일터, 길거리, 온라인 등 모든 공간에서, 아는 관계와 모르는 관계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은 흔히 일어났다. ‘농담’이나 ‘실수’, 심지어 ‘본능’이나 ‘역할’로 불려온 것들을 우리는 ‘강간 문화’라 명명했다.
우리는 예민한 것이 아니라 부당함과 불의에 분노한 것이다. 갈등을 만든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언어와 대안을 만들어온 것이다.
침묵을 뚫고 나오는 파열음 같은 말하기를 마주한다. 생존자의 말하기는 문화예술이나 정치이론만큼 힘있는 진실로 세계의 범주를 넓히며 변화를 만들었다. ‘정상성’ 규범에 어긋나는 목소리, 불평등한 성별 권력 구조에 무시됐던 목소리는 존엄한 삶을 여기로 가져왔다. 우리의 안테나는 낯선 표정, 새로운 말, 용인되지 않은 감정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으며 서로 신호를 보내고 받는다.
의미들이 반짝이고 가슴 벅찬 감동으로 공명하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어온다.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로 바라보고 피해자가 ‘얼마나 강하게 저항했는지’, ‘보호할 만한 여성인지’ 따져 묻던 가부장적 법과 판례를 바꾸었다. 피해자의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와 지침을 마련했다. 피해자를 쉽게 의심하고 비난하는 성폭력 통념을 깨고 '피해자다움'이란 없음을 밝혔다. ‘동의 없는 성적 행위는 성폭력’이라는 새로운 인식과 담론을 확산했다.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맞닥뜨릴 때도, 거대한 권력과 위력 앞에서도,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때도 우리는 계보 있는 자신감 위에 서서 길을 잃지 않는다.
공공의 영역은 이윤에 부쳐지고 권리를 가질 자격에 증명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피해자의 권리로 만들어 온 법‧제도적 절차와 기준은 자본이 대거 투입된 ‘시장’에서 가해자를 지키는 자원으로 악용되고 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성차별, 소수자 탄압, 약자혐오를 확산하는 몸부림, 이를 부추기는 정치가 사회 곳곳에서 퇴행을 만들고 있다. 사회적 연대를 경험하기보다 절망과 무력감만을 반복해서 마주한 세대는 고립된 채 각자 생존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 할 만큼 하지 않았냐고 할 때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 권리를 특혜라고 이름 붙이며 박탈하려고 할 때 강고한 연대로 맞서겠다. 말할 자격, 피해자 될 자격을 묻는 위계를 거부하고 ‘자격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꾸겠다. 여성과 소수자들이 변화의 주체로서 모여 분열된 삶을 통합하고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재구성하는 공론장을 열겠다. 다양한 조건과 삶의 불평등을 살피고, 서로 의지하고 돌볼 수 있는 관계, 평등하게 나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 고립되고 지쳐 주저앉는 대신 연결되고 기대어 불안정한 시대를 모험하겠다.
균열을 일으키는 용기가 무력해지지 않도록, 일상에 스며드는 변화가 풍요롭게 퍼지도록,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만드는 새로운 시대를 환대하자.
2021. 10. 7.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