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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화운동

성폭력에 맞서기 위해 대안적인 관계, 일상, 실천을 만들어가는 성문화운동을 소개합니다.
[2006]We do Self-Defense 자기방어훈련, 그 짜릿한 즐거움의 가능성!
  • 2007-09-11
  • 3376
We do Self-Defense 자기방어훈련, 그 짜릿한 즐거움의 가능성!
 

나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점심시간에 농구 축구로 온 몸이 땀범벅 되어 들어오는 남자애들을 넋 놓고 보며, 저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궁금해 한 적은 있다. 고등학교 때 헤드락을 심하게 거는 남자애가 있었는데 나는 그냥 점잖게 타일렀고, 누군가 나를 탁 치고 도망가도 그저 천천히 걸으며 걔를 싱겁게 했다. 운동하고 땀 흘려? 한자라도 책을 더 봐야지 무슨 소리! 똑똑하고 점잖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만이 예쁘지도 않은 내가 그나마 어필하는 애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대학에 갔을 때, ‘어필’의 세계는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내 기대와도. 남자선배들은 차례로 (무슨 차례?) 동기 여자친구들을 찍어서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여자친구들은 친구들로부터 점점 멀어져 남자선배 무리 속에 고립됐다. 당구장에서, 길거리 오락실 펀치기계 앞에서 남자선배들 윗도리를 가슴에 안고 기다리는 장면이 그렇듯 말이다. 그 무렵, 남자선배들이 동기 여자선배들 얼굴, 몸매, 성격을 1등부터 꼴등까지 점수 매긴 게 발견된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다. 동기 여자애 한명은 끈덕지게 작업 거는 남자선배에게 “다시 이러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서슬 퍼렇게 응대했는데, 남자선배들은 그 애를 싸가지 없는 년, 재수없는 년으로 만들었다.  
 
여자로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건가? 짜증나고 재수없는 일들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포르노 본 이야기를 꺼내며 시시덕거리는 남자선배를 똥씹은 표정으로 견디고 있다가 여자애들은 더 이상 술자리에 가지 않기로 했다. (걔를 내보냈어야 했다!) 내가 무척 좋아하던 여자선배는 체력단련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역기를 들어보는 순서에서 번쩍 들었더니 남자애들이 낄낄거리고 선생도 씩 웃으며 동조한 사건이 있었다. (체력단련을 하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연애 중이던 여자친구는 어느 날 남자친구가 가지 말라고 몸통으로 구석까지 몰아 누르고 손목을 잡아 제압했다. 친구는 도무지 혼란스럽고 무섭기도 하다고 울상이었다. (그 지랄하려고 갑빠 키웠구나) 다른 친구는 지하철 성추행 피해가 많았는데 칼을 들고 다녔다. 휙 지나가는 그 손들 다 잘라버려야 했다. 성추행 스트레스가 소중한 하루들을 날려먹고 있었으므로. (당신들이 한 짓이 어떤 것인지 알 날이 오길) 여름날 밤 자취방서 나는 이상한 낌새가 들어 창밖을 봤는데 창문 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내 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놀란 나는 며칠을 창문도 못 열었다. 문 밖 출입도 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지만 그림자 사건이 있던 날 나는 옷을 거의 입지 않고 있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 내 자신에게 말해야 하나? 알 수 없다. 옷은 좀 입고 살어라? (더운데!) 열쇠는 좀 튼튼한 걸로? (정말 꼭 그래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짜증나고 재수없었던 개개별 사건들은 점점 더 커다랗고 미세하게 스며드는 무언가가 되고 있었다. 불안, 편하지 않음, 위축 또는 공포.
 
 
자기방어훈련. 여성주의 호신과 만나다!
 
여성주의 호신이라니! 처음 호신이라는 말을 접하고 난 흥분했다. 반신, 반의 - 여자들에게 정조를 지키라고 은장도를 쥐어주는 그런 걸까? 할 수는 있을까? 이게 뭔가 어울리는 조합인가? 뭐가 달라지나? 그와 동시에, 반쪽의 나는 - 내 몸은 스르륵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뭔가 좀 움직이고 싶어! 마음껏 뻗고 싶어! 새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기 운 이.
 
Real Knockouts 라는 책의 저자는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이렇게 말한다. “여성이 싸우지 못하는 것은 마음 속에서 이미 지기 때문이다” 아니, 싸움이라고? 내가 겪은 일들이 ‘싸움’이었다고? 그렇다면 내 인생에서 수많은 싸움이 있었고, 내가 졌던 건 마음으로부터 졌기 때문? (그럼, 마음으로부터 이기면?)
여자들은 대부분 싸움이란 걸 생각하지 못하도록, 싸울 수 있는 몸이 되지 못하도록 키워진다. 2차 성징 시기를 생각해보라. 전후 대비가 명확하다. 친구들과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니 이런!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우악스럽고 물불 안가리던 시절이, 온갖 무용담이 터져 나온다. 동생 손모가지를 문턱에 넣고 방문을 닫았던 사람, 깐죽대던 남자애 팔을 물어 살점을 본 사람, 아빠에게 부당한 혼을 나고 나오며 쌍욕을 내뱉던 사람. 온갖 경험과 승리(?)의 역사가 내 몸에서 되살아난다.
만만치 않은 싸움판을 벌이고 반격 fight-back 하면서 살고 있는 여자들 얘기도 알고 보니 참 많다. 자취방에 칼을 들고 들어온 강도와 몸싸움을 벌이고 “너 이 새끼 얼굴 똑똑히 기억했어!” 를 연발해 결국 쫓아낸 얘기, 지하철에서 다른 여자에게 추행하던 놈을 차문 닫히기 직전 발차기로 밀어 차버린 얘기, 지하철 성추행범을 잡아 꿇어 앉혔다가 (손가락 하나로 지시했다고!) 경찰에 넘긴 이야기. 헉! 심장과 팔뚝, 다리근육이 움직거렸다. 도전정신이 불타올랐다. 
생각해보니 여성에 대한 온갖 종류의 성적 공격은, 여자들이 ‘반격’ 자체를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버럭 화내지는 못하겠지” 하며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손목을 꺾어버리지 못할 거야” 하며 추행을 일삼고, “신고 못하고 눈 부릅뜨지도 못하고, 부끄럽고 무서워 주저앉아 울 거야” 하며 바바리를 젖히는 것이다. (따옴표 속의 생각은 사실, 아예 상상조차 못되고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해볼 만한 것이 참 많다. 그리고 그렇게 내 선에서 해결을 좀 보면 다른 여자들이 피해를 덜 보게 될 것 같은 것도. 이거 좀 멋지다 - 으흠.
내 몸은 신기하게도 ‘싸움’을 시뮬레이션 하기 시작했다. 온 몸에 눈이 달린 것처럼, 지하철에 앉아있을 때도, 걸어갈 때도 힐끔힐끔 나를 보는 사람이 보이면 그 진원지를 탁 잡아챈다. 동시에 5분 뒤 저 인간과 한판 하는 그림을 머릿속에서 좌르륵 그린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조용하게 욕을 찌끄려주는 버전, 양 팔을 허리에 다리는 어깨넓이로 벌려 서고 녀석의 입술이나 귓불을 붙들어 쥐고 조용히 틀어당기는 버전 - 상대는 순간 아~ 아~ 아파하며 상체를 찌그러뜨려 끄달려온다 - 등 몇 가지 견적을 뽑는다. 당연히 주위 환경, 내 현재 상태 등도 계산에 착착 들어간다.
 

나와 친구들은 격투도장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조심하는 게 기본인데” 운운하던 평범한 남자 도장 사범은 곧 우리의 기운을 알아채고 수많은 호신술과 근육단련, 유연성 훈련, 무술의 기본기를 쏟아냈다. 매일 저녁 우리는 광분, 광분! 발차기, 지르기, 손으로 잡기, 꺾기 기술을 몸에 익도록 연습하고, 서로 상대가 되어 공격하고 받아치는 훈련도 한다. 이 때는 최선을 다해 공격하고 받아쳐야 진짜 의리있는 자매라는 걸 명심! 공격은 내 온 힘을 들이고 던져야 하기도 하지만 상대의 중심을 뺏고 빈 구석을 치고 들어가는 것일 때가 많다. 상대의 움직임을 그대로 흘려보내서 넘어뜨리는 방법,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해서 쓰러뜨리는 방법을 훈련한다. 어떤 요일에는 윗 팔과 손목, 배와 등, 뒷다리와 앞다리 근육을 키우는 연습을 한다. 다른 요일에는 손가락부터 전신의 유연성을 훈련하고.
대련과 수련은 일상사가 됐다. 플랫폼에서 열차 기다릴 때, 걸어가던 길에 친구와, 넓은 마당이 있는 곳에서 모임 할 때 우리는 안낚으로 발을 걸고, 회목을 치고, 빗장을 붙이며 상대를 기습공격한다. 음하하 지금 생각하면, 보기에 참 신기하고 그냥 막 접근했다간 큰 코 다칠 것 같은 분위기였을 거다. 여자들이 꽥꽥거리며 온 몸을 팍팍 부딪혀 싸우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배꼽을 잡고 깔깔거리는 모습. 감동과 열광 그 자체다. 
 
 
내 몸과 마음의 변화? 이 부분은 처음 예상과 참 다르다. 사람마다 다를 것 같고 과정 마다 다를 것 같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자기방어훈련의 진정한 묘미이기도 하다. 
몸이 변하자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서 몸도 변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나’를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이미 매순간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런 나를 실시간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 저런 무용담을 나도 해봐야지, 로 시작한 자기방어훈련은 강해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이 나에게 무엇인가? 그런 주제를 매우 입체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음미하게 한다. 내가 어떤 감정, 어떤 관계, 어떤 구도에서 상처를 받는지, 생각보다 별 신경 안 쓰이고 상처받지도 않는 부분은 어디인지, 나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한다고 느끼는지, 나는 나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 나의 강점과 약점, 나의 도드라지고 패인 곳을 매순간 느끼게 한다.  
분노의 순간이 짧아지고 강해진 것도 변화다. 한번은 싸움이 끝나고 몇 시간 뒤 문득 놀란 적이 있는데, 손이나 심장 떨리는 것도 전혀 없었고 싸웠다는 사실 조차 잊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 같으면 두고 두고 길게 길게 점점점 분이 쌓이고 이가 갈리고 가슴이 답답해져 오던 것을 단번에 단 칼에 한판승! 아니면 한판패! (우씨- 다음에 두고 보자. 끝!) 쪽으로 몸과 마음의 반응이 가는 거다. 싸움이 온다! 싶으면 - 나에게 오는 공격 뿐 아니라 다른 여자들이 당하는 공격도 내 싸움으로 접수! - 마음이 확 커지고 시뮬레이션도 휙. 몸은 슉 뻗어갈 것처럼 시동 걸리고. 상황이 지나가면 결과와 상관없이 ‘잘했어! 히히’ 로 마무리하는 것. (아 물론, 경찰에 넘기는 등등 과정 포함!) 
  
그 외에 얼마나 신나고 흥미진진한 여정이 나에게 많았겠는가? 많을 것인가?
나는 오늘도 자기방어한다. 나를 위한 파워업 프로그램이자, 세상을 향한 나의 작은 활약.
이 글을 읽고 멋지게 단련하고 연습하고 싸우는 언니들 소식을 더 많이 듣게 되면 좋겠다.
아자자자자자! 그럼, 모두 파이팅! 
 
 

Women's Fighting Spirit!
우리는 지금 보다 더 강하게, 그리고 자유자재로-

(한국성폭력상담소 2006년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주말도장 광고문)
 
 

* 이 글은 언니네 방(언니네 사람들, 갤리온)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퍼가실 때는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