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화운동
낙태 금지 논란 - 소모적인 생명 논쟁, 그 벽을 넘어서
낙태는 여성이 선택할 권리다
<레프트21> 26호 | 발행 2010-02-27 | 입력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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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전화가 울린다. ‘낙태’를 해야겠는데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시술을 거부당했다며,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묻는다. 의사도 전화한다. 강간 피해로 임신했다는데 낙태시술을 해 줘야 하지 않겠냐며 ‘불법’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며칠 전 한 방송국에서 하는 토론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시술 고발로 잔뜩 위축된 산부인과 의사들 때문에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여성들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윤상 소장
‘남자친구의 강간으로 갑작스레 임신한 여성. 남자친구를 고소하고 낙태하려다 남자친구의 사과와 설득으로 고소도 취하하고 낙태도 포기. 그러나 남자친구 결국 변심하여 연락두절. 고소를 취하하고 나니 의사들은 낙태 시술 거부. 고소ㆍ낙태 기회를 모두 잃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는 나의 분노 섞인 질문에,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에 선 어느 나이 지긋하신 남성 교수님은 “그 여자가 실제로 강간당한 건지조차 불분명”하다고 응수한다. 그래서? 합법 낙태인지 증명할 수 없으니 낙태는 불필요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
우리 사회는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항상 초미의 관심을 가져 왔다. 강간인지 화간인지, 임신인지 아닌지, 낙태하려 하는지 낳으려고 하는지.
수십 년 전에 한반도에 인구가 너무 많다고 호들갑 떨던 시절, 국가는 여성들의 자궁 속을 열심히 단속했다. 아니다. 이미 더 오래전부터 이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 꽃뱀인지 아닌지를 가리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가부장제의 역사가 길다.
재생산권 쟁취는 여성운동의 오랜 과제였다. 모든 이의 출산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서 여성계가 무상보육, 무상교육, 무상급식 등 사회적 인프라를 확보하려 오랫동안 투쟁해 온 역사가 풍성하다. 비혼모에 대한 편견, 한부모의 사회ㆍ경제적 인프라, 동성애자의 가족구성권과 출산권, 10대 섹슈얼리티의 권리 등은 페미니스트들의 오랜 관심거리이자 토론 주제다.
상담소를 운영하고, 새로운 공간이 필요한 이들의 쉼터를 만들고, 공동육아를 실험하고, 대안학교를 만들어서 희망을 일구는 일, 이 모든 것은 국가도, 의사회도, 법조계도, 철학자도 아닌, 소외된 약자들의 손과 손을 이어가며 이루어졌다.
벼랑 끝
우리 사회 약자들의 역사에서 낙태권 이슈가 진작에 제기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재생산권의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보장되는 것이 없고, 낙태만 하더라도 원하지 않는 낙태가 강요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나마 원할 때 낙태시술을 받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선택권마저 논쟁적 안건으로 꺼내 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법 낙태 시술 병원을 고발함으로써 낙태할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여성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프로라이프 의사회.
△낙태 시술이 차단되면서 많은 여성들이 절박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사진 임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