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화운동
남성성 김장 후기!
성별이분법에 틈을 내는 실천 간담회 - 남성성 김장하기
지난 1월 15일은 김장날이었습니다.
바로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 #그건_강간입니다 기획단 중 남성성과 성별이분법이라는 주제에 대해 특히 더 이야기를 해보고자 모인 5명이 몇 주간 토론을 하면서 준비한 간담회, <성별이분법에 틈을 내는 실천 간담회: 남성성 김장하기>가 있는 날이었는데요.
▲ 당일 굉장히 긴장하고 있는 발제자들과 사회자!
▲ 이안젤라홀이 꽉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와주셨습니다.
남성은 성욕을 참을 수 없고, 여자가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을 때 성관계를 하지 않으면 남성적이지 않고 정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남성성에 대한 왜곡된 생각은 성폭력의 원인이 됩니다. 또한 개인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러한 인식과 사회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기란 무척 어렵고, 남성이 여기서 혼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성성 김장하기는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그러한 ‘남성성’을 생물학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틀거나 벗어날 수 있는 만만한 주제로서 다뤄 보자는 의도로, 소금을 뿌리고 숨을 죽이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준비했습니다.
첫 발제 <남성성과 여성성을 깨고,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는 성별규범을 따르는 것이 현재 사회에서 일견 편리한 관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한계점도 크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법을 깨기 위한 두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첫 번째는, ‘게이 같다’라는 표현을 단순한 비유가 묘사가 아닌 혐오표현으로 쓰지 않으며 더 나아가 ‘게이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퀴어한 남성성과 ‘헤테로hetro 남성성’의 경계를 흐려보자는 것이다. ... 그 동안 자신이 터부시했던 ‘남자답지 못한’ 행동들을 실천해보자는 의미이다. 이는 가부장적 이성애 사회에서 게이 혐오를 타파하는 길이기도 하며, 동시에 가부장적 남성성을 낙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신화를 깨트리는 것이다. (이런 제안 역시 다소 이성애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내 앞의 상대가 남성 혹은 여성이며 이성애자라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없다는 이성애 신화는 개인을 이성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남성 혹은 여성으로 위치하게 만든다.
그녹 - 남성성과 여성성을 깨고,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중에서
두번째 발제 <관계 안의 폭력은 남성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 일까?> 는 죄책감이 남성의 가해를 미화하면서 ‘착한 가부장’으로 스스로 위치시키는 함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천적인 대안으로 ‘타자와의 관계성’ 추구를 제안했습니다. 또한 ‘동의’가 교묘한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동의를 구했는지의 여부 이전에 관계 안에서 충분히 소통해왔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조금 전에 서술한 내용은 조금은 극단적으로 서술한 것이지만 남성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페미니즘을 연결시키고자 할 때 쉽게 미끄러지기 쉬운 정서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지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이에 대한 자가비평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죄책감을 통해 이를 소화시킨다면 그것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성차로 인한 권력의 간극을 ‘아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페미니즘은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억제하고 통제하기 위한 매뉴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미묘한 우위에서 여전히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단지 자신의 행동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변명하는 방식으로 죄책감을 줄이게 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페미니즘이던 다른 어떤 소수자 저항 담론이던 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세계 내 ‘나’에 대한 중요함의 과대해석이며 그것을 자의식 과잉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나 하나가 마음속으로 엄청난 반성과 성찰을 한들 그것은 사실 이 거대한 세계에서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일환으로 소비되는 페미니즘이 죄책감로 이어지는 경향을 지적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고민에서는 타자와의 관계성이 부재하기 쉽다. ...
동동 - 관계 안의 폭력은 남성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 일까? 중에서
마지막 <남성의 몸으로 페미니즘을 실천한다는 것은?> 은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의 몸’을 인식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결의 감정들을 이야기하고, 페미니즘의 언어로 타인이 아닌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고, 그리고 특정성별이 아닌 페미니스트의 몸으로 스스로를 인식하자고 제안합니다.
페미니즘의 언어로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였다. 내가 페미니즘의 당사자가 아닌 연대자처럼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소극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내가 경험한 가부장제의 폭력과 억압 그리고 차별이 있음에도 나에게는 없었던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페미니즘의 언어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실천해보고 있다. 비록 소극적이고 단순한 전환일지 몰라도 이러한 방식들을 통해서 나는 ‘남성’의 몸이 아닌 ‘페미니스트’의 몸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보다 상세히 위협이 되는 몸이란 것을 인지하고 섹스와 젠더에 의한 체계 또는 가부장체제에 대해서 대항하는 행동을 해나가는 페미니스트의 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몸이 되면서 나는 ‘남성’이라고 호명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으로 교차된 다양한 정체화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사소한 변화는 내가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데 그리고 이해하는 데 나의 위치를 확실하게 하기도 하며 나의 위치를 재위치 지음으로서 실천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단청 - 남성의 몸으로서 페미니즘을 실천한다는 것은? 중에서
... 타인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갖기 전에 자신의 경험을 먼저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감수성은 그 이후에야 가능하며 그때 타인과도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자신의 경험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저항의 언어로 이야기할 때 혐오를 받기 때문이죠. 남성성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성 경험을 묻거나, 야동을 돌려 보거나, 함께 성매매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 남성성은 서로의 예외 없음을 확인하고 탈락자를 혐오할 준비를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는 사람들 없이, 단지 감수성을 갖자는 말만으로는 절대 성폭력이 일어나는 사회에 대해 제대로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감수성이라고 부르는 그것 역시 용기가 아닌가 합니다. 강자에는 누구나 쉽게 이입할 수 있습니다. 그건 본능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약자에게 이입하는 감수성은, 단지 감성이 충만하다고 해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를 악마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악마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도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의 모습도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것과는 다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게 이입하는 감수성은, 용기와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기 오신 분들의 용기에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감수성이 아니라, 서로의 용기를 응원하고, 또 혼자서는 내지 못할 용기를 함께 내는 그러한 기회로 이러한 자리가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 사회자 가온의 말
▲ 이날의 발표문은 2월 중 배포될 전체 캠페인 자료집에 실립니다. 이날의 토론 내용도 함께!
2월 14일 {동의하고 하는 행진}에도 함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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