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화운동
<불처벌> 서평 #2: 성매매 여성의 처벌의 역사
장원아님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성매매 집결지가 정리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한국의 성매매 역사를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남겨진 흔적을 찾고자 한다. 또한, 이 흔적 속에서 성매매 당사자로서 착취와 폭력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절대 빈곤의 혼란 속에서 노동 환경 개선을 통해서 성산업에 종사하고자 한 여성들의 집단 파업 사례를 통하여 성매매에 대해서 노동자라 하더라도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애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성산업에서 일어나는 포주의 학대 및 성폭력 행위, 정상적인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한 것은 노동 쟁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중구 묵정동, 종로3가, 용산구 도원동, 서울역 앞의 양동 등은 일제 강점기의 공창이 자리했던 곳으로, 현재는 비인가 업소인 사창가가 있었다는 진술만 전해진다. 공창은 성병통제와 군대 ‘위안’의 기능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강력한 군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또한, 여성을 특별지역 안에 가두어 강제적으로 성병검진을 받게하고,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면서까지 그들의 몸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착복하고자 했던 사회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공창제는 1947년 미군정 하 남한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서 결의되어 48년 2월에 폐지되었는데, 이는 여성 불처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공창과 사창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수 산재되어 있었던 상황에 대한 임시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공창제 폐지 이전의 1908년부터 시행된 창기 단속령에 의해 여성이 구류처분을 받았지만, 남성은 엄중한 설유(따끔한 훈계)를 받고 풀려났다는 기사 등을 통해 이때부터 여성만 처벌하는 금지국가의 틀이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다. 1914년의 조선총독부의 행정집행령은 잠입수사의 원조격이다. 자유로운 주거 침입으로 단속이 가능했고, 상습적 밀매음 대상자는 성병 검진을 주기적으로 받도록 할 만큼 성병이라는 공중보건 상의 해악을 관리하고자 했지만, 이미 성병 확진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1916년의 대좌부창기취제규칙은 유곽의 설치에 대한 조건과 창기의 외출 금지를 규정했다. 각 도의 경무부장의 고시에 따라 유곽이 설치되었고, 창기는 유곽 밖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었다. 다만, 유곽에 많은 여성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으므로, 조선인 창기는 예외로 치부하여 유곽 근처에서 살아가게 하고 세부 규칙이 엄격히 확립되지 않아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기와 작부와 마찬가지로 창기는 관할 서에 서류를 떼러가거나 성병 검진 및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외출이나 숙식, 기거의 자유 모두가 허용되지 않았다. 창기가 만 16세 이상 미혼 여성이어야 하며, 법정 대리인이나 친권자의 승낙서가 있어야만 고용되는데도 그 수가 많았다는 것은 이들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다는 셈이 아닐지 생각해보았다. 성병 검진을 담당하는 공의는 포주로 인해 심한 안면 구타를 당했다고 진술하는 피해 여성에게 이를 인정하지 않고, 양심적 의료 행위를 자체적으로 거부하고 피해 규모를 축소하는 진단을 내렸다는 호소문이 신문에 실리기도 할만큼 여성들이 의지할 곳은 없었다. 특히, 성병으로 인해 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한시적으로 세금을 면제하는 공제 규정도 없었거니와 이들에게는 이렇게 해서라도 여성이 영업하여 세금을 납부하면 이득이니, 권력층인 업주를 비호하여 구성원 모두에게 세금을 거두는 국가의 재정운영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아직도 3종 업소는 지각금은 아니더라도 생리 휴가를 쓸 수 없고, 여러 비품 명목으로 여성에게 빚을 지게 하니, 이러한 아이디어가 근 100년을 이어온 것이다. 한편, 조선인 여성은 피식민인으로서 더욱 노동환경이 열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1925년에 여성과 아동에 대한 인신매매 금지 국제 조약을 맺었고, 일본에서 폐창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있었음에도 대만과 조선과 같은 식민지는 논의 대상으로조차 올려지지 않았다. 창기가 탈출하면 규정에 따라 반드시 신고하고 경찰과 함께 붙잡아야 하며, 현상 수배를 내걸어도 괜찮은 존재였던 일본인 여성의 인권보다 낮은 조선인 여성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산 것일까. 공제 대상이 아니었던 자유폐업(자유의사에 따른 집단 휴업)은 일부의 사회적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그 시도가 성공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1920년도부터는 노동자 및 농민 봉기가 활발했기에 그 틈에서 창기들의 자유폐업에 대한 시도 및 계약 조건 개선, 사회단체의 개입으로 문제를 조정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관찰되었다고 한다.1937년 함경북도 성진 욱정유곽의 창기 파업의 한 여성은 업주로부터의 강간 피해가 당연한 것은 아니며, 쉰 밥이 아닌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하라는 등의 계약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였다고 하는데, 이 시대가 더욱 억압적인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김대현 님은 국가가 형법을 통해 처벌하는 형사 처벌을 제외하고도, 사회적으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미시 구조에 모두가 참여하고 있으므로 역사 속에서 매번 새롭게 발견되고 변화하는 사회구조를 직시해야 함을 지적한다. 그 중에서도 해당 챕터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을 가능하게 한 장치와 이로 인해 구현된 이미지를 살펴보는 데 주안점을 둔다. 1961년 윤방법 제정 이후 성매매여성들이 즉결 심판으로 약식처분을 받았다. 실제로 검사 기소나 구류 단계까지 가지는 않고, 벌금형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들에게 이득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대다수가 같은 법령 아래 보호 지도소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여성들은 즉결 처분을 받기를 원할만큼 강제 수용에 대한 격렬한 저항감을 표출하였는데, 해당 산업에 노출 위험이 있는 개연성이 높은 여성들은 미리 보호하여 사회를 방위해야 한다는 느슨한 논거에 의해 경찰에 의한 마구잡이식 수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는 국가보안법의 형식상 논리와 일치한다. 실제로 서울역 앞의 양동과 도동의 전업 주부 두 명이 성매매를 했다는 오인을 받아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에 수감되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윤방법에서 살펴보았듯, 성매매에 대한 처벌 기조는 상위법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이를 구체화한 시행령 및 규칙 등의 제도·행정적 차원에서의 구속력은 없었던 데다가 동시간대의 특별 지역의 설치는 이를 적극적으로 묵인하고 조장해 온 것이라는 연구 동향을 상기하자. 1962년도에 각 지역마다 설치된 윤락여성선도대책위위원회는 후에 보건사회부에서 근거 법령을 제시하여 토대를 세웠는데, 재건 국민운동본부와 같은 반관반민 단체였기에 조직적 비리가 많았다. 선도 지역 내에서의 포주의 행위가 금지되었는데도 대책위의 장으로 임명된 사례는 해당 조직이 어떠한 운영을 했을지 짐작하게 한다. 본래 선도위의 목적이 윤락 여성을 등쳐먹는 펨프나 기둥 서방 등을 뿌리뽑고 저축 습관과 생활에 유용한 자활 기술을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였다지만, 1966년에는 지역 포주가 경찰과 선도위 자체에 상납을 했음이 기사회될 만큼 목적과 달랐다. 보호소에 수감되지 않아도, 지역 주민들은 일반주택가에서 자신들과 이웃으로 섞여 살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정화반을 만들어 주택가에 경찰처럼 주거 침입하여서 이들을 내쫓고자 했다. 보호 목적의 시설도 여성들은 위한 제도는 아니었다.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의 설립 초기부터 근 10여년간 소장으로 재직했던 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은 수용소와 재활 시설의 성격을 합친 복지시설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재활 훈련으로 수행된 교육 훈련은 수감자의 현실과 맞지 않는 과목이었다. 사업 목표가 정신 교도의 강화, 바른 예절과 고운 말 쓰기 훈련 강화, 신생활 운동과 정신 영양 고취, 초보적 군사 정훈 교육 및 결집 교련의 실시 등이기에 탈출하는 여성에 대한 사건보도가 연이어 계속되었다. 관련 기관자들은 성매매 유입 요인을 개인적 자질에서 찾았고, 성매매 행위를 변태적이거나 정신 이상, 동성애로 보았다고 전해진다. 필리스 체슬러가 자유와 정의야말로 여성의 정신 건강에 기적을 행한다고 하였는데, 보호소에 수감되거나 ‘윤락 행위를 할 만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수용한 것은 정신 건강에 얼마나 큰 해를 입혔을지 실마리를 제공해 준 것 같았다.
박정미님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유곽업창기취제규칙 등을 통하여서 한국의 유흥 문화와 집단적 남성성에 대해 고찰한다. 창기인 일본인 게이샤와 조선인 기생만이 밀매음을 하도록 허락되었는데, 1930년대의 조선 총독부는 남성에게 ‘유흥’을 제공하는 모든 업종을 접객업으로 지정하여, 남성의 유흥에는 여성의 시중과 성행위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 등치시켜 버렸다. 춤과 노래 등의 공연을 선보였던 예기와 잡일을 담당했던 작부 역시 부업으로 성을 팔았다는 것은 현재의 1차와 2차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지적을 상기시킨다. 이들의 행위는 밑바닥의 윤리라고 법명으로 못 박아 놓고서는, 재산상의 이익이나 화폐 등의 대가까지 지불하며 성매수를 한 남성은 성매매 여성들의 상대자 정도로 해석하여 교묘히 그 행위성을 희석시키고 감추었다는 것은 여성을 지배하는 것을 남성적 욕망의 근간으로보는 야만성을 승인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으려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느꼈다. 창기의 창은 논다는 뜻인데 정작 일하는 여성은 자신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확보되지 않는 신체 침범적 상황 속에서 느끼는 모욕적인 정서까지 억압해야 했을테니, 이는 성매수 남성에게만 존재하는 망상적 판타지였을 것이다.
해방 이후 공창제 폐지령이 ‘남녀 평등의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폐지되었음을 밝히고 있지만, 작부나 예기에 대한 언급은 일절 생략되어 있을 뿐더러 폐지 실행 이틀 전에 접객부 영업 규례를 발표하여 남성만이 즐길 권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음을 보여주었다. 1951년 두 차례 수복과 탈환이 반복되고 극심한 가뭄까지 겹쳐 모두가 허덕이던 때에 고관대작들이 지프차를 몰고 요정에서 작부들과 떠들고 웃는 소리가 가득했다는 식의 기사의 상세한 묘사는 코로나 19의 재난 상황에서도 줄지 않았던 성매매에 대한 수요를 떠올리게 한다.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비난 여론을 의식하여 접객이 이루어지는 카페, 요리점, 바를 대중 음식점으로 전환하고, 영업시간과 판매 음식의 종류를 제한하는 등의 편법을 썼는데, 이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보건후생부는 51년 12월 18일, 고급 요정과 외국 빈객 접대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우방 각국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참전하고 있는 현 상태에 거국적으로 보답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고급 요정을 폐지하지 않았다. 냉전 시대 각국의 혈맹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여성의 성적 자원과 서비스를 동원해야 한다는 논리는 87년 아시안 게임과 88서울 올림픽 시기 거리 정화 운동을 벌이면서도 유리방에 샷시 대출을 감행한 정부의 행보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51년 10월에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 지시에 관한 건’을 결재하여 유엔군의 요청이 있을 경우 민간 위안소 설치를 허락했다는 사실은 군사외교와 군국주의와 같은 정치적 영역과 성매매가 무관하지 않음을 입증한다 할 수 있겠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줄리아 오코넬의 성구매 남성 심층 면접에서 성매매 여성의 사회적 죽음이 더 큰 쾌락과 권력을 가져다 준다는 지적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성매매 여성 처벌은 성구매자 남성만이 안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전제가 되어왔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콘텐츠기자단 '틈'의 원영님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