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변화
2012년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요청에 의한 낙태 시술자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1항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소송의 계기가 된 사건은 폭력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상대 남성의 고소로 인해 제기된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이 이 사례와 같이 상대 남성 등으로부터의 폭력과 협박, 고소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헌법재판소는 임신 당사자가 국가와 타인의 통제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승인해주고 말았다. 국민 모두가 지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과 그 불가침의 권리를 국가가 보장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는 헌법 제10조에 위배되는 판단이었다.
낙태죄의 존치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 임신중단은 규범적, 사법적 단죄 대상 이전에 여성의 몸과 삶으로 겪는 현실이다.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하며, 여성도 국민이다. 국가가 오히려 사회구성원의 안전과 기본권을 침해해 온 역사와 단절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전환을 목도하는 지금, 헌법재판소가 헌법 가치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며 시대에 역행하지 않는 판단을 내리길 기대한다.
공개변론을 앞두고 다시 헌법재판소 앞에 선 우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보장받기 위해 ‘낙태죄 폐지’가 반드시 선결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위헌 의견을 밝힌다.
하나, ‘낙태죄’는 생명을 선별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가 정책의 역사를 통해 작동해 왔으므로 위헌이다.
‘낙태죄’는 1953년 대한민국 형법 제정 당시 기존 형법의 존치안과 삭제안이 표결에 붙여진 가운데 존치안이 다수표를 얻어 유지된 것으로 1912년 일제의 의용형법에 근거한 것이다. 이후 1973년 유신체제 하의 비상국무회의에서 모자보건법이 제정되었으나 모자보건법 14조의 허용사유는 다분히 우생학적 의도에 근거하고 있다.
임신 당사자의 임신중지 결정을 처벌하면서 한편으로는 우생학적 목적에 부합하는 임신중지는 허용한 ‘낙태죄’ 존치는 국가가 인구관리 계획에 따라 여성의 몸을 통제의 도구로 삼아 생명을 선별하려 했던 역사다. 이와 같은 역사를 볼 때 국가는 지금까지 ‘낙태죄’의 존치 근거로 ‘태아의 생명권’을 내세워왔지만 실상 그 책임은 임신 당사자인 여성에게만 전가했을 뿐이었다.
‘낙태죄’를 존치시킴으로써 국가는 오히려 실질적으로 장애나 질병이 있는 생명, 사회적으로 불리 하거나 열악한 조건에 있는 생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국가적, 사회적 책임을 방기해 왔고, 심지어 한센인 강제단종의 사례와 같이 적극적으로 생명을 선별하는 국가 폭력을 자행할 수 있었다.
이에 우리는 ‘낙태죄’의 역사 자체가 사실상 국가폭력의 역사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명백한 위헌임을 천명한다.
하나, ‘낙태죄’는 여성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므로 위헌이다.
‘낙태죄’는 사회적, 성적으로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여성들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
‘낙태죄’를 유지시키는 현행 법체계에서 형법 269조와 270조는 임신중지에 대한 여성의 자기 의사와 요청에 기준을 두고 처벌 요건을 명시하고 있으며, 모자보건법 14조에서는 배우자 동의조항을 두고 있다. 임신 과정과 임신중지 여부의 결정 과정에 책임이 있는 여러 당사자들 중 다른 이들은 책임을 면하는 반면, 여성만은 어떤 식으로든 그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다.
‘낙태죄’에 따른 그간의 판례를 보면 이와 같은 불합리한 법체계로 인한 여성들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실제 모자보건법상의 배우자 동의조항을 이용하여 상대 여성을 악의적으로 고소하고 폭력적인 관계를 유지시키려 했던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일례로 2013년 의정부지방법원에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은 여성의 경우 남편에 의해 심각하고 지속적인 주취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편이 임신 중인 부인을 칼로 위협하기까지 한 상태에서 여성은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병원에 동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낙태 방조죄에 무죄를 주장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여성에게만 벌금을 선고했다. 지금까지의 ‘낙태죄’ 관련 판례는 이와 유사한 사례가 다수이다.
2010년과 2013년에는 낙태를 도와주겠다며 비혼인 임산부를 유혹하여 흉기로 위협하고 강간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모자보건법’에서는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 임신 24주 이내의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피해자 대부분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해당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여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의료진 또한 형법 270조 1항에 따른 책임을 면하기 위해 시술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 제 때에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와 같은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낙태죄’의 존치는 경제적 자원과 사회적, 성적 위계에서 여전히 매우 불평등한 조건에 있는 여성들의 현실을 더욱 불평등하고 열악하게 만드는 일이며, 이처럼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임신 지속을 강제함으로써 여성과 아이 모두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우리는 위와 같은 현실을 방기하고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낙태죄’는 헌법 10조의 행복추구권과 11조의 평등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므로 위헌임을 천명한다.
하나, ‘낙태죄’는 여성의 생명권과 건강권을 침해하므로 위헌이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합헌 판결이 있은 지 불과 3개월 후인 2012년 11월, 임신 23주째의 10대 여성이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받던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여성은 안전하게 시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지 못해 어머니와 함께 온라인에서 수소문 끝에 찾아간 병원에서 현금 600만원을 내고 시술을 받았으나 결국 시술 도중 사망했다.
지난 2012년 헌법재판소 판결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존엄’하며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고 본다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 역시 이에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과정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사회경제적 자원이 없는 10대의 학생이자 비혼 상태였던 이 여성은 임신 후기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도 상담을 할 수 없었으며, 출산 이후 자신과 태어날 아이에 대한 사회적 보장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러한 상태에서 결국 혼자 책임을 떠안고 고민하다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조건에 있는 여성들일수록, 사회적 보장은 기대하기 어렵고 처벌의 책임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전하지 못한 시술 상황에 놓이거나, 시술 후에도 후유증 등의 문제로 건강과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해 심각한 의료사고 피해를 입었을 때조차 대응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인공임신중절이 엄격하게 규제되거나 의료 환경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나라들에서 위험한 공급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과 소수자 여성이 직면하는 합병증과 사망은 그 사회의 사회경제적 정의의 문제이자 공중보건의 문제”라고 규정하고 있다.
UN여성차별철폐협약 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임신중절을 비범죄화하고 처벌조항을 삭제할 것,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절로 합병증을 겪는 경우를 포함하여 임신을 중단한 여성에게 양질의 지원 체계에 대한 접근을 제공할 것’을 재차 촉구해 왔다.
이에 우리는 여성의 생명권과 건강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낙태죄’는 헌법에 위배되므로 반드시 페지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하나, ‘낙태죄’는 섹슈얼리티 통제와 함께 작동하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므로 위헌이다.
궁극적으로 ‘낙태죄’는 국가의 인구관리 정책 하에 작동하는 것으로써 이를 위한 섹슈얼리티와 자기결정권의 통제를 근간으로 하여 유지되어 왔다. 여성에게만 전가되는 ‘낙태죄’ 처벌은 국가의 인구관리 계획에 따라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기 쉬운 상태에 두기 위해 존치되고 있다. 때문에 임신중지 뿐 아니라 성관계와 피임, 임신, 출산의 전 과정에서 장애나 질병이 있는 여성, 제도적 혼인 상태에 있지 않은 여성, 십대 여성, 이주 여성 등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선택’이 가능한 사회적 보장조차 취약한 상태에 복합적으로 놓여 있다.
지금까지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마치 ‘태아의 생명권’과 대립되는 것처럼 논의되어 왔으나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생명’으로서 존중받고 살아가야 할 사회적 조건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낙태죄’로 인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는 사회정의의 문제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는 국가의 인구관리 목적에 따라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데에 기여하는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의 위헌 사실을 헌법재판소가 반드시 확인해야 함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헌법재판소가 이번 판결에서 또 다시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결정권’ 구도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에 대한 위헌 판결은 지금까지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해 온 역사를 성찰하고 국가와 사회가 헌법에서 보장되는 생명권과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보장할 수 있는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역사적 전환기가 될 이번 위헌소송에서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2018년 5월 24일
“낙태죄는 위헌이다!”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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