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변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단호한 시선
진지한 반성은 ‘반성문’이 아니라 ‘책임짐’에서 나온다
성폭력 가해자 감경 사유로 ‘진지한 반성’ 남용하는 재판부를 규탄한다!
지난 5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집단 준강간과 불법촬영·유포 등 혐의로 기소된 가수 정준영, 최종훈 등에 대하여 1심보다 형량을 감형하는 항소심 판결을 선고했다. 정준영은 징역 6년에서 징역 5년으로, 최종훈은 징역 5년에서 징역 2년 6개월로 감형을 받았다. 재판부는 정준영이 “피해자와 합의를 위해 노력했지만 합의하지 못한 점, 피고인이 공소사실 자체는 부인하지만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점, 본인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을 한다는 취지의 자료를 낸 점, 다른 피고인들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형을 정했다”라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최종훈은 “‘진지한 반성’ 요건은 부족”하지만 “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고려했다”며 법정 최저형을 선고했다. 언론에 따르면, 정준영은 1심 판결 이후 항소심 선고 전까지 총 4통의 반성문을 제출했다.
재판부가 밝힌 정준영의 감형 이유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합의 시도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피해자가 피해 보상보다 가해자 엄벌을 원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피고인이 공소사실 자체를 부인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죄는 없지만 잘못했다’라는 모순된 반성문을 과연 ‘진지한 반성’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진지한 반성을 한다는 ‘취지’의 자료를 냈을 뿐인데 바로 감형 요소로 고려했다는 점도 문제다. 해당 재판부는 법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선남선녀”라고 부적절하게 칭하고 가해자들이 집단으로 저지른 성폭력 가해행위를 “술을 마시다가 성적인 접촉을 하고 성관계를 했을 경우”라고 발언하는 등,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하고 마치 ‘술 때문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해프닝’처럼 바라보는 가해자중심적 인식을 드러냈다. 이에 재판부가 가해자를 감형해주기 위해 ‘진지한 반성’ 사유를 남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19년 1월부터 11월에 선고된 성범죄 판결문 137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반성 및 뉘우침’이 양형 요소로 등장한 판결문이 48건으로 전체의 35%에 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판결문에서 법원은 어떤 근거로 가해자의 ‘반성’ 여부를 판단했는지 판단근거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이를 악용하고자 하는 성폭력 가해자들은 감형을 목적으로 대필 반성문 및 성교육감상문 제출, 꼼수 기부·사회봉사, 가족을 동원한 호소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위 ‘반성’을 꾸며내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 사이에서 반성문 대필사업은 A4용지 3~5장당 5만여 원에 거래되며 성행하고 있고, ‘양형시 제출서류 팁’이나 ‘성범죄 대응매뉴얼’ 등을 통해 감형받는 요령이 공공연하게 공유되고 있는 현실이다. 가해자 또는 가해자 주변인이 감형을 목적으로 성폭력상담소 등 피해자지원기관에 일방적인 기부·후원을 하는 사례도 지속해서 드러나고 있어, 이를 색출·거부·반환하기 위한 각 피해자지원기관의 업무 부담도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인데 후원자를 의심해야 한다’라는 어려움과 ‘가해자 후원을 막지 못하면 피해자가 원치 않는 감형이 이뤄질 수 있다’라는 책임감 사이에서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한편,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은 재판을 앞두고 적게는 열 부 내외, 많게는 수십 부에 달하는 반성문을 연이어 제출하며 전략적으로 양형을 다투고 있다. ‘박사방’ 핵심 공범인 강모씨는 과거에도 “반성문을 잘 써 형량 줄였다”며 주변에 무용담처럼 자랑한 바 있다. 이러한 행태가 보도되자 대중들은 재판부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진지한 반성’ 여부를 감형 요소로 고려할 수 있는 ‘작량감경’ 제도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법원은 성범죄 감경 사유로 ‘진지한 반성’을 남용하는 관행을 중단하고, ‘진지한 반성’ 여부를 감경 사유로 고려할 때는 어떤 점에서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했다고 판단하는지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또한, 가해자의 ‘반성’이 감경을 목적으로 한 형식적인 것으로 드러날 때는 오히려 가중요소로 적용하는 등 ‘반성’ 남용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지난 4월 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는 강모씨에게 “이런 반성문은 안 내는 게 낫겠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정준영 2심 판결처럼 반성문 제출 자체를 감형 요소로 삼아서는 안 되며, 가해자가 실질적으로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는지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
성폭력 가해자가 ‘진지한 반성’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용서의 나라』 저자이자 성폭력 피해생존자인 토르디스 엘바에 따르면, 가해자가 성폭력 가해 사실에 대해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거나 성폭력 가해자로서 자기혐오 또는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은 충분한 반성이 아니다.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자신에게 내면화된 여성혐오를 인식하고 두 번 다시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세상에 알리고 책임질 때 비로소 ‘진지한 반성’이 있다고 본다. 진지한 반성은 감경을 목적으로 한 반성문 제출이나 피해자와의 합의가 아니라, 가해자가 잘못을 책임지고 범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 재판부는 ‘진지한 반성’이라는 명목으로 가해자의 책임을 쉽게 덜어주지 말고, 가해자가 제대로 책임지고 반성하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공명정대하게 판결하라.
2020.05.15.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