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상담소 소식
안녕하세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자원활동가 가림이라고 합니다. 작년 여름부터 약 8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자원 활동을 해왔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기 이전에 지금까지의 활동을 돌아보려고 해요. 그럼, 제가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만났던 그 날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하나, 처음 상담소를 만나다
처음 자원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당시에 두 가지 있었어요.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를 통째로 흔들어놓은 2015 이후의 여성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당시 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혐오를 깨닫고 이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죠. 하지만 2017년이 될 때 까지 제게 여성인권은 개인적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2017년에 제가 들었던 수업 중에 특수교육학개론이라는 수업이 저를 자원 활동으로 이끌었어요. 그 수업에서 시각장애아동 봉사활동을 하면서 진로체험 테마파크에 갔는데요, 사람이 많은 놀이동산 같은 곳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 아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미리 고민하고 걱정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체적 한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비록 나 스스로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라도 이 사회를 살아가며 내면화된, 나도 모르는 차별적인 모습이 있구나, 이런 것들이 나도 모르는 새에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구나’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인권문제 역시 비록 내가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게 굉장히 오만한 판단일수도 있고,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며 배워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어요.
둘, 상담소에서의 활동
우선 저는 2019년 7월부터 크게 두 가지의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강간죄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두 번째는 이윤택 상습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활동이에요. 강간죄개정 공대위 활동을 하며 크게 다음과 같은 활동을 했습니다. 회의자료와 회의록을 작성하고, 회의에 참여하며, 의견서나 강간죄 개정활동을 둘러싼 다양한 활동들을 체계화해서 하나의 문서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법 개정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동의여부나 의제강간연령 등의 개념을 둘러싼 법률전문가들의 논의와 주장을 수 없이 접하며 많이 배우기도 했어요. 이 외에 강간죄 개정 토론회 자료집을 편집하고 다듬는 일도 하고, 강간죄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주최를 돕기도 했습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과 함께한 강간죄 개정요구 집회
강간죄 개정을 위한 공대위 활동은 강간죄가 개정되는 그 날까지 계속 될 것이기에 제가 특별히 애착을 갖고 있는 활동이기도 해요. 여성주의 활동의 오랜 숙원이기도 한 만큼 강간죄가 개정이 되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될까, 억울함에 눈물 흘리지 않아도, 절망하고 분노하지 않아도 될까 생각하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두번째로는 이윤택 상습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활동이 있습니다. 이윤택 공대위 활동 역시 회의에 참여하며 회의록 작성이나 자료집 편집, 백서제작 등의 활동들을 했고, 백서작업은 가명과 실명 블라인드 처리라는 마지막 과제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이윤택 공대위 활동을 통해서는 상습성폭력을 둘러싼 사회적, 법적 논의가 아직 미비하고 보충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구호의 실현 뒤에는 공소시효와 2차가해 등의 문제가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이윤택 공대위 활동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토론회에서 들었던 고소인단 분의 기타소리와 노랫가락입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남 몰래 조금 울었는데, 세상의 모든 피해자에게, 그리고 성평등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괜찮다고, 이렇게 빛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공대위활동 외에는, 안희정 사건 토론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안희정 사건 토론회를 통해서 권력형 성폭력과 유죄라는 단어를 동시에 뉴스에서 볼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뒤에서 연대하고, 외치고, 발로 뛰었는지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 역시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어요.
<안희정 위력 성폭력사건 의미와 과제 토론회 '보통의 승리'>
그 밖에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 성폭력 사건의 백서를 최종 마무리하는 작업을 했고, 상담소 활동과들과 함께 국제여성영화제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상담소 25주년 후원의 밤을 돕기도 했고, 가장 최근에는 수요집회에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열림터 25주년 후원의 밤 '우리들의 집을 찾아서'>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인적으로는 수요집회처럼 다 함께 행사에 참여하는 하는 시간들이 비록 짧지만 다른 활동가분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자리라서 좋았습니다. 특히 2019 연말의 한해보내기에서 다른 활동가분들, 혹은 상담소의 또 다른 일원 분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너무너무 즐거웠구요.
셋, 의미 찾고 나아가기
백서작업을 통해서는 하나의 사건을 깊이 있게 들어다보고, “아, 이런 활동이 이러한 큰 흐름에서 전개가 되는구나.”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500여 쪽에 달하는 백서작업을 진행하며 때로는 힘들기도 했지만 텍스트에만 머무는 인권운동이 아니라 실제로 그 과정에 참여하며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때로는 목소리를 내기도 하며 역사의 발자취를 만들어나가는 그 경험은 정말로 소중했어요.
백서작업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해서 좋았습니다. 시위, 토론회, 집회, 행사 등 발로 뛰면서 직접 보고 느낀 수많은 장면들이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 같아요.
3개월 후 다시 돌아온다면 보기만 해도 든든한 상담소의 책들도 더 많이 읽고, 연구 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상담소에서 느끼고 배운 점들을 토대로 학교 후배와 함께 트랜스젠더 인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준 상담소, 고마워요.
넷, 중간후기를 마무리하며
처음 저녁 해가 쏟아지는 1층에서 저와 찔레 활동가를 맞아주던 신아의 모습, 팔을 활짝 벌리고 저를 반겨주던 지리산의 모습, 그리고 아직 상담소가 낯선 제게 상담소의 이모저모를 알려주시던 상담소의 따스함 속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운 8개월이었습니다.
저는 상담소에서 활동하며 여성주의라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음을 배웠습니다.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부끄럽지 않고, 성희롱을 성희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 한 남성에게 제도적으로 종속되지 않으며 성폭력이 정조에 대한 죄가 아닌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살 수 있게 해준 그 동안의 모든 활동에 대해 상담소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든 여성과 소수자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모두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름에 다시 만나요! :)
<이 후기는 자원활동가 가림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