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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안대응

공론화가 진행 중인 개별사례의 구체적인 쟁점을 알리고 정의로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활동을 소개합니다.
근친성폭력무죄판결규탄성명서
  • 2005-09-16
  • 4304

서울 고등법원 이호원 부장판사 담당의 ‘근친 성폭력 사건’ 무죄 판결을 규탄한다.

2004년 9월 10일, 서울고법 형사4부(이호원 부장판사)는 오랜시간 가해자로부터 유린당한 권리를 회복하고자 고통을 견뎌온 근친성폭력 피해 아동의 인권을 침해하는 판결을 하였다.

본 상담소는 이번 판결이 근친 성폭력에 대한 해당 재판부의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보며, 피해 아동의 권리보장을 위한 근간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판결이라 판단하고,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이번 판결은 1심에서 7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지속적인 근친성폭력 사건의 피고인에 대해, 소위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언함으로써 근친 성폭력에 대한 재판부의 무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번 판결이 해당 피해자는 물론, 어렵게 고소를 결심하고 고통스러운 법적 과정을 견디고 있는 많은 다른 피해자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에, 본 상담소는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재판부가 다시는 이와 같은 반인권적 판결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 판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입장을 밝히는 바이다.




1. 해당 재판부는 무죄의 근거로 ‘만 6세에 불과한 나이에 성기삽입피해가 이루어졌을 경우 정상생활이 불가능한데, 당시 피해자가 정상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 본 상담소에 접수된 사례를 보면, 작년 한해만 보더라도 6세 이하 유아의 강간피해 사건만 21건에 이르고 있다. 또한 피해당시 성폭력에 대한 인지가 없다가 이후 성장하면서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많으며, 피해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의 정도나 발현시기는 사건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성폭력 피해에 대한 연구나 상담현장에서 이미 수없이 확인된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구체적 사례들이 이미 보고되고 있는 상황에서 재판부는, 근친성폭력의 특성과 실상에 대해 이해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피해 입은 아동은 피해즉시 심각한 증상을 나타내며 정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당연히 전제한 후, 피해자의 학교 생활기록부의 간단한 기술만을 가지고 피해아동이 정상생활을 하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엄청난 피해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어 학교생활을 해온 피해 아동에게 응원을 보내고 격려를 해야 할 재판부가 오히려 정상적인 생활을 했으므로 강간당한 것이 아니라는 어이없는 허술한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공판과정에서 외국에 거주하는 피해아동이 직접 법정에 출석하여 매번 장시간 증인신문을 통해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진술을 하였음에도, 단지 이러한 이유만으로 신빙성이 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에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지나치게 경솔한 판단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또한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보인 양가적 행동에 대해, 강간사건의 피해자가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가해자와 영화를 보고 이메일을 보내는 등의 하기 어려운 행위를 하였다고 보아 피해자가 법정에서 직접 진술한 사실들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있다.

: 일반적으로 친부나 의부 등 근친에 의한 성폭력은 피해자의 신뢰에 근간하여 접근이 용이한 특성을 지니며, 은폐된 상황에서 지속되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초 피해가 유아기에 일어날 경우 더욱, 피해아동은 자신이 입은 피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자신에 대한 애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여 가해자에 대한 양가감정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근친 성폭력 사건에서 나타나는 피해자의 양가적 특성은 ‘가해사실 자체는 증오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가해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쉬우며, 근친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가 가진 양가적 감정의 취약한 특성을 역이용하여 범죄사실을 은폐하고 추가적으로 범행을 하는 데에 악용하게 된다.
이 사건의 경우 역시, 피고인은 피해자를 유학시킨다는 이유로 외국에서 단 둘이 수년 간 함께 생활해온 상태였고, 일상의 부분을 가해자에게 의지하게 되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피해자가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에 대해서 오히려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판부는 많은 피해자들이 보이는 후유증과 특성을 오히려 피해자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놓았다.


성폭력피해의 특성과 피해자의 후유증을 특정한 모습으로 전형화하여 사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함은 검찰의 수사지침에서도 이미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지침은 그동안 성폭력 피해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수사와 재판이, 사실에 대한 그릇된 판단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주었다는 반성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재판부는 성폭력 피해상황과 이를 지속시키는 기제,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 등에 대한 매우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상황에서 ‘성폭력피해자다운’ 것과 ‘성폭력피해자답지 않은’ 것을 기계적으로 나누고, 피해자를 전형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화석화된 논리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근친성폭력 범죄의 특성과 피해자의 상황에 무지한 재판부가 과연 성폭력 사건을 담당할 자격이 있는가?

본 상담소는 판결을 보면서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조차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를 재단하였다. 또한 ‘피해자다움’을 전형화하여 피해자에게 다시 한번 고통을 주는 남성 중심적이고 가해자 중심적인 판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피해아동은 그동안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입은 피해를 법에 호소하고자 긴 시간, 힘들게 재판을 감내하며 지켜보았다. 이번 판결은 성폭력 범죄의 특성과 피해자의 상황에 무지한 재판부가 피해자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검찰의 수사지침과 마찬가지의 필요성에서, 성폭력피해에 대한 몰이해가 수사과정에서 피해자를 이중으로 힘들게 할 수 있는 문제 때문에 현재 전담검사제가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재판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폭력 범죄의 특성과 피해자의 상황에 대해 무지한 재판부는 성폭력 사건을 담당할 자격이 없다. 관련 사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수사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처럼, 공판 역시 관련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재판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본 상담소는 더 이상 재판부의 경솔하고 무지한 판단에 의한 희생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앞으로 성폭력 사건이 올바로 해결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 나갈 것임을 밝힌다.


2004년 9월 13일

사단법인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