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2008]낯선 곳으로 몸을 던져라, now, transforming!
낯선 곳으로 몸을 던져라, now, transforming!
- 성별 규범, 몸, 페미니스트 역량강화
(키라 / 한국성폭력상담소, keeraa@sisters.or.kr)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홍수로 물이 불어나고 있을 때, 등산을 하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질 때,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때, 큰 간판 밑을 걸어갈 때..똑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느끼는 불안함이나 공포는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불안함을 느끼지만, 누군가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심지어 그 스릴을 즐기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차이는 위험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통제해본 경험 유무에서 생긴다.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홍수로 불어난 물에 대처하는 법을 알고, 낯선 곳을 오래 여행해본 사람은 새로운 공간에서 벌어질 위험을 예측할 수 있고, 합기도를 배운 사람은 뒤에서 나를 공격할 사람을 넘어뜨려 역공할 수 있다. 위험 요소를 통제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현실의 위험 요소를 없애버릴 수는 없지만 그 위험으로 인해 생기는 나의 ‘불안함’을 통제할 수 있다. 불안함들이 더 많이 통제될수록 개인이 접할 수 있는 삶의 스펙트럼은 더 다양하고 넓어지며, 삶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불안함을 통제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 또한 더 확장된다. 더 넓은 곳을 갈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더 많은 경험을 한다는 것은 개인의 행복의 의미를 더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일 거다.
성별화된 몸, 다른 ‘방어 능력’
인간을 임의적인 두 범주, ‘남/여’로 나누는 지독히 성별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별 규범’은 자연스러운 습관이 된다. 성별에 따라 다른 행동과 반응을 기대 받으며 자라는 인간들은 성별화된 몸의 습관을 갖게되고, 성별에 따라 다른 능력을 습득해간다. 남자들은 몸싸움하는 능력을 습득하고 여자들은 몸싸움하는 남자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연약하지만 매력적인 몸 습관을 익힌다. 남자들은 여자를 번쩍 안아올려 성큼성큼 걸을 수 있는 팔근육과 다리근육을 키우고, 여자들은 번쩍 들어올려질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 자연의 영역으로 보이는 신체적 영역은 사실 이렇게 끊임없이 성별에 따라 구성되고 조절된다.
여자들은 연약하지만 섹시하고 동시에 순수하고 귀여운 몸과 그 몸의 아우라를 유지해야 한다. 남자 친구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몰라, 몰라’하는 정도의 두 팔의 움직임은 귀엽지만, 남자 친구와 싸울 때 최선을 다해 남자 친구의 복부를 짧고 강하게 타격하는 ‘무술인 여성’은 귀엽지 않다. 그 여성은 이런 농담을 들을 것이다. ‘너 남자 아니야?’ 그래서 숨겨진 힘이 있더라도 여성들은 자기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 성별화된 사회에서 여자가 ‘너 남자 같애.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라는 말은 이 사회에서 아웃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지속하다보면, 여자들의 신체는 남자들의 신체와 상당히 다른 능력을 습득하게 된다. 시간만 나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서 몸싸움이 많은 축구나 농구같은 경쟁적 스포츠를 즐기고, 술먹고 ‘야! 밖으로 나와!’라고 해서 치고 박고 싸우면서 남성들은 때리고 맞는 것, 세게 밀고 넘어뜨리는 것에 익숙해진다. 만나서 헤드락을 걸고 툭툭 서로의 몸을 건드리는 과정 역시 그렇다. 여자들은 어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며 놀던 여자아이들은 고학년이 되면서 거울보기와 ‘여자되기’ 놀이에 빠진다. 나이 어린 여성들의 ‘여성화’를 위한 시장은 매우 방대하다. 축구를 좋아하고 몸싸움을 좋아하던 여자아이들도, ‘이상한 여자애’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활 패턴을 조절하게 된다. 축구와 같은 경쟁적 스포츠는 타인의 몸의 움직임을 나의 몸을 이용하여 방해하고 조절하는 연습의 기회가 되며, 격렬한 스킨쉽을 하게되는 기회가 된다.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인대가 늘어나기도 하면서, 내 몸이 외부의 충격에 어느 정도로 반응하는지, 그리고 내 몸의 충격은 어떤 속도로 회복되는지를 알게 되면서 내 몸을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방어하고, 상대를 어떻게 공격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남성들에 비해 그런 경쟁적 스포츠를 접하기 어려운 여성들의 경우 그러한 방어와 공격 능력은 자연히 떨어지게 된다. 점심시간에 넓은 운동장에서 축구, 농구를 하며 땀흘리는 남학생들과, 조용히 앉아서 ‘수다떠는 것’을 즐기는 여학생들에게 있어 신체적 방어와 공격 능력이 현저히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신체적인 능력은 개인의 안전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다. 누가 자신을 때려도 똑같이 때려주는 것보다 우는 것에 익숙하고, ‘때리지 말라’고 부탁하는 데에 익숙해지면, 강도가 침입해서 나를 칼로 위협할 때도 울면서 ‘살려달라’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의 신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안전을 적극 확보하는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은 누가 자신을 공격해도 반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못 한다. 많은 여성들은 자기의 근육이 어떤 힘을 내어 활용될 수 있을지를 잘 인지하지 못 한다. 물론 타인의 모든 공격에 신체적인 반격을 하는 것이 늘 최선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칼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압도되는 것과, 그 상황을 판단하여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 칼의 종류, 칼을 쥔 자세, 칼을 쥔 사람의 나이 등을 고려하여 판단한 결과 포기한다는 것은, 그 상황이 변화할 때 다른 반격을 할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공격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위험 요소’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이다. 그것이 없는 상태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세상의 자극에, 공격에 무기력해진 상태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즉, 유기체로서 생존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갖고있어야 할 ‘중요한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밤길을 걷는 것이 무섭지만, 그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내 몸을 훈련하기보다, 밤에 일찍 들어가는 것을 택하거나,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다른 남성을 찾는 것은 어찌보면 아주 미련한 일이다. 게다가 과연 현실의 여성들이 ‘내 남자’로부터 충분한 안전을 보장받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아이러니하다. 70%가 훨씬 넘는 성폭력 가해자가 ‘알고 지내던 남성’이라는 통계는 이러한 보호자 남성에 대한 신화가 허구임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의사소통 하는 몸 (한국성폭력상담소 나눔터 57호에 실린 글 수정, 인용)
그렇다면, 이렇게 무기력한 방어 능력을 가진 나는 어떻게 내 몸과 마음의 힘을 키울 수 있을까? 키워드 중 하나는 모든 몸들은 서로 의사소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별화된 몸 습관을 갖게 되는 개인들은 각자의 몸을 통해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하며 각자의 ‘성별화된 습관’을 재생산한다. 몸이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라는 말은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 이외에 몸으로 하는 의사소통이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의 따뜻한 눈빛을 느끼면서 ‘음, 저 사람한테 사랑받고 있구나’라고 느끼고, 누군가의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몸 동작, 눈빛을 느끼면서 자기 몸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피하고 있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의사소통이 상호 작용이라는 것이며, 그 상호 작용은 개인 사이의 권력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시키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몸으로 하는 의사소통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종종 개인적 성격이나 ‘원래 안 맞는 사람’ ‘왠지 무섭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이러한 판단은 ‘원래’ 그런 것이라기보다 몸으로 하는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진 판단이다. 이것은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이다. 인간 관계를 규정짓는 것이 사회적 위계이고 권력 관계라고 하지만, 실제 개인들이 그 권력을 살아가는 방식은 그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개인들 사이의 몸적 의사소통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는 상하 수직 권력 관계로 인한 것이지만, 그 권력은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끊임없는 의사소통으로 유지된다. 상사가 엘리베이터에서 신입 사원을 만났을 때는 호의를 가지고 신입 사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요즘, 잘 지내나?’라고 격려하는데, 이 때 신입 사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한다. 상사의 ‘상사다운 몸의 의사표현’에 신입 사원은 ‘신입사원다운 몸짓’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 순간, 상사와 신입 사원의 권력 관계는 확인되고 다시 재탄생한다.
이러한 관계는 ‘몸가짐’으로 늘 지적받고 교육받는다. 꾸중들을 때 어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예절 교육이라고 이야기된다. 몸으로 하는 의사소통에 대한 교육이다. 꾸중하는 사람과 꾸중듣는 사람이 있어야 ‘꾸중하는 순간’이라는 것이 구성된다. 꾸중듣는 사람은 한껏 열이 받아있는데 꾸중 듣는 사람이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딴청을 피우고 있으면 꾸중이라는 상황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몸가짐에 대한 교육은 사실, 특정한 권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와 상대가 어떤 몸의 의사소통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반복 학습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설명을 여성들이 접하는 ‘외부의 공격-내 몸의 방어’로 설명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지하철에서 졸고 있다가 눈을 떴는데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의 손이 허벅지에 올라가있다. 아저씨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의 허벅지를 그렇게 주무르지는 않는다. 자기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나이어린 여자라는 것을 파악하고 손을 올려놓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아저씨가 말을 거는 순간이다. 아마 ‘어린 여자니까 내가 함부로 해도 되지? 어른한테 함부로 하면 착한 여자가 아니지?’ 이런 말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때 그 여성도 몸으로 응답한다. 화가 나기도 하지만 무섭고 당황스러워서 몸이 굳어진다. 허벅지 위에 올라온 손을 치우기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움을 느끼며 식은땀이 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 역시 아저씨의 몸-말에 대한 응답합니다. ‘놀라고 무섭지만 어떻게 할 줄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무서워요. 아저씨, 이 손 치워주세요. 하지만 치우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런 말 쯤 일 것이다. 함부로 대하겠다는 아저씨의 메시지와 그에 대해 ‘나를 만지는 당신에게 저항하기를 포기하겠다’라는 여성의 메시지가 상호 소통된 것이다.
이런 의사소통은 어떻게 깨어지고 이 여성은 어떻게 아저씨에게 물을 먹일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이 가능할 것이다. 나의 허벅지를 만지는 아저씨의 손을, 나의 0.3m 볼펜으로 확, 찍는 것! 이 상황에서 의사소통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어린 여자니까 내가 함부로 해도 되지?’라고 보내는 아저씨의 메시지에 대해 ‘어린 여자라고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할줄 알았냐?’ ‘어린 여자가 할 수 있다고 당신이 상상하는 행동, 그것이 무엇이든 그 이상을 보여주마. 나는 어린 여자지만, 어린 여자는 니가 생각하는 그런 핫바지가 아니랴’ 라는 메시지로 화답하는 것이다. 어린 여성과, 나이가 많은 남성 사이에 기대되는 권력 관계는 이 의사소통의 실패로 순간 정지한다. 그리고 소란이 시작된다.
여성주의 역량강화 프로그램
이렇게 성별화된 의사소통의 실패를 의도하는 것이 몇몇 여성단체들에서 시도하고 있는 ‘자기 방어 훈련’을 비롯한 다양한 ‘몸-훈련’ 프로그램들이다. 여성에게 기대되는 몸이 아닌 ‘다른 몸’이 된다는 것은 여자로서 타인에게 보낼 것이라고 기대되는 몸의 메시지를 다르게 해보는 연습이다. 자기 방어 훈련은 특정 무술의 기술을 정교하게 연마한다기보다, 일반 여성이 일상적으로 처할 수 있는 다양한 공격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개발된 프로그램이다. 그 명칭과 내용에 있어서는 프로그램 사이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실제 폭력 상황을 재연하기 위하여 가해자 역할을 하는 남성(교사의 역할을 하는)을 대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쉬운 타겟’이 될 수 있는 나의 여성성의 불편함/익숙함을 확인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실제 상황에서 ‘No’ 라고 소리 지르기, 나의 ‘화’를 인정하고 그것을 방어의 무기로 삼는 연습, 가해자의 ‘욕설’에 주눅들지 않고 상황을 판단하여 대처하는 연습과 같은 ‘싸움의 의지’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게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실제 자기 육체의 힘을 확인하여 특정 상황에서 육체적 방어 기술을 훈련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광범위한 여성역량강화(empowerment)의 일환으로 기획된다. 택견, 태권도와 같은 격투기 무술 종목의 여자 사범님들과 연계하여 ‘여성주의 자기방어 주말도장’을 열거나, 십대 소녀들을 대상으로 자기방어 캠프를 기획하여 진행하는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들의 몸을 무기력함이나 공포에 익숙하게 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 무기력함과 공포를 다른 감수성을 역전시킨다. ‘몸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공격과 방어에 익숙한 몸 상태로 있어보기’ ‘상대의 몸 움직임으로 상대의 이후 경로를 파악해보기’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등을 연습하면서 몸으로 지각하는 공간을 확장하고, 자신감을 키워간다. 현재는 이러한 프로그램에 매력을 느낀 여성들이 자체적으로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 ‘날자(http://cafe.naver.com/2007mybody)’를 구성하여 훈련을 하고 있다. 태권도를 기본으로 하는 이 모임에서는 기본적인 자기방어 훈련 뿐 아니라 태권 체조, 쌍절곤 등 모임 구성원들의 욕구가 반영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실전 싸움을 전제하여 훈련하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몸 훈련을 가능하게 하는 경쟁적 스포츠를 배우면서 자시 몸의 역량을 확대하는 시도들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농구교실 <자신만만>, 여성들을 위한 축구모임 <짝토 야간축구회> 등의 프로그램과 모임이 진행되고 있고, 작년에 열렸던 1회 ‘페미니스트 가을 운동회’도 매년 진행될 예정이다. 이화에서도 관심 있는 개인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학교 내에서 몸-훈련을 하는 소모임을 만들어서 다양한 몸 체험을 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권하고 싶다.
내 몸의 변화(transforming), 세계의 변화
여성들의 몸-체험, 새로운 몸 훈련과 역량 강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되는 몸의 특징들은 매번 늘 굉장히 신비롭다. 사실 성별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별 규범은 많은 개인들의 몸에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규범을 자기 몸에 100 % 각인시키고 그 규범대로 살고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고, 바로 그 몸 자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몸의 능력은 늘 몸을 구속하려는 규범과 제도를 넘어선다. 내가 알고 있던 그야말로 ‘천상 여자’였던 한 여성이 다이어트 좀 하고 선을 보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근처에 있는 권투 도장을 찾았다. 그 도장에서 자신의 새로운 삶을 발견하고 권투에 미쳐 직장도 그만두고 권투선수가 된 그녀의 변화는 보기만 해도 짜릿하다. 성별 규범은 성차별, 성폭력 경험과 같은 억울하고 분노스러운 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각성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별 규범이 불편하고, 그 규범을 벗어나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때 규범 안의 좁은 공간 밖이 궁금해진다. 몸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먼저 생겨야지만 몸의 변화가 가능한 건 아니다. 우선 몸을 낯설지만 두근거리는 저기 밖의 영역으로 던져보는 것도 필요하다. ‘의지’는 늘 ‘몸적인 의지’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두근두근함에 몸을 맡기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은 곧 몸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 몸이 편안함을 느끼는 조건들이 변화하면서, 외부 세계를 다르게 인지하고, 타인과 다른 의사소통을 시작한다. 규범에 제한되어 체험하지 못 했던 변화를 살아내면서 많은 개인들은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하지만 역설적인 점은 그 변화를 충실히 살아내기 전까지 개인들은 그 변화의 내용과 방향을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멋진 여자들의 삶에 호기심을 갖고 팬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기도 하다. 성별 규범이든 이성애 규범이든, 그 규범과 멀어지기 위해서는 낯선 영역으로 내 몸을 던져보는 것이 어떨까? 다른 곳으로 던져지는 순간, 나에게 익숙하던 그 세계는 이미 나의 뒤로 한 참 멀어져 가고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08년 이대 교지 76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출처없이 퍼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