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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2008]스포츠성폭력에 대한 생각
  • 2008-03-03
  • 3204
우리들이 직접 합시다

(오매 / 한국성폭력상담소, daffodils@naver.com)

여성주의 자기방어운동을 하는 나에게 스포츠계 여자선수들은 동경과 선망의 그녀들이다. 성별화된 사회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주조하고, 여성들은 몸을 통해 성별화 기제를 어떻게 체현하고 살아내게 되는가. 관찰하면서 다른 세상을 열기 위해, 혹은 다른 희열의 삶을 열어젖히기 위해 여자들이 ‘다른 몸’이 되어보자고 낯선 세계로 자기를 던지는 훈련과 실험을 프로그램으로 기획했다. 다른-몸 활동이 어떤 다른 ‘나’를 만들어낼 것인가? 어떤 다른 의사소통과 관계맺기가 새로이 생성될 수 있을까? 여성주의자 친구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해보면서도 나 역시 몸치에서 막 탈출하려는 운동 초짜, 다른몸 되기의 초심자였는데 그런 나에게 여자선수들은 경외스러운 모델이자 풍성한 소스였다. 유니폼을 입은 여자선수들의 어느 경기 사진에서라도 그녀들의 프로페셔널한 열기, 에너지, 짜릿한 땀이 느껴졌다. 우리는 여자선수들의 사진을 모으고 우연히 발견한 미니홈피 초등학생 태권소녀의 작렬 발차기 사진폴더에 감격했으며, 응원하러 달려갔던 여자야구대회, 축구경기에서 그녀들의 근육의 움직임, 스피드, 화려한 팀플레이, 부딪히고 빼앗아오는 격렬한 몸싸움에 미친듯이 환호했다.다른 몸으로 살아가는 세상 곳곳의 여자들! 그녀들의 움직임에는, 그녀들의 몸살이에는 다른 삶의 결이 있을 거라고, 그것을 꼭 만나보고 싶었고 더 많은 그녀들로부터 배우고 싶었다.

성폭력으로 여성스포츠를 보는 그들의 시선

최근 언론은 그녀들을 ‘성폭력 피해자’라고 폭탄처럼 소개했다. 더 정확하게는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어린 학생)선수들. 얼마전 방영된 KBS 시사프로그램 쌈은 ‘스포츠와 성폭력의 인권보고서’ 라는 이름의, ‘충격적인’ 르뽀를 공개했다. 스포츠계에서 그동안 쉬쉬하며 덮어두려했던 성폭력 사건들을 어렵사리 피해자와 가족들을 만나 인터뷰로 담고 가해자 감독과 코치를 추적하여 그들의 뻔한 부인과 반문도 담았다. 감독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숙소에서 친구들끼리 손을 묶고 밤을 보냈다는 증언은 여론의 분노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민단체들의 날선 성명서가 조직되었다. 대책협의회도 급히 소집되었는데 그 직전 문화관광부, 교육인적자원부, 대한체육회에서 대책을 내놓으니 민간단체에 자문을 요청한다는 연락이 먼저 도착했다. “스포츠 성폭력 근절 대책” 이라는 이름의 이 대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1) 성폭력 지도자 영구제명 조치 2) 선수 접촉․면담 가이드라인 수립 3) 체육계 통합 성폭력 신고센터 4) 여성지도자 할당제 도입 5) 상시 합숙훈련 개선 6) 체육지도자 자격 강화 7) 체육지도자 아카데미 운영. 시민단체 협의회 측에서는 보도되어 밝혀진 사건에 대한 일벌백계, 학생선수 성폭력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 여학생 선수 성폭력 피해자 상담 및 치료비 일체 지원, 여학생 선수 성보호 지침 마련 등을 강하게 요구하였고 2008년 동안 이 문제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하였다.

가이드라인을 배포하고 이를 어긴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성폭력의 경감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그러나 그러한 방안들을 강력히 제정하고 추동하는 힘이 ‘어린/여성 선수들에 대한 성보호’ 라는 관점은 무언가 잘 맞지 않는 넌센스같다. 가해자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감독들의 말을 보자. “여자들은 이렇게 길들여야 한방에 되지” “룸살롱? 우리 애들이 있는데 왜 가?” 운동선수와 감독의 관계 사이에서 그녀들을 ‘여자’로 환원하고 사적인 존재로 역할하게 하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수치스러운 건 피해자’라는 공식을 방패막이처럼 사용하는 패턴은 우리 사회 여느 곳에서 벌어지는 성차별, 성폭력의 매커니즘과 똑같다. 기업이나 정부기관에서 고위층에 진입한 여성들을 아침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집에서 남편과 애들 아침밥은 꼭 챙겨준다” 고 그녀도 ‘천상 여자임’을 확인해야 안심하는 사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자리에서도 여성이라면 다종다기한 성적인 서비스를 하도록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그녀들이 겪는 일은 엇비슷하다. 성폭력이 집단 여성에 대한 집단적인 통제와 길들이기라면, 선수들을 성보호의 대상인 ‘여성’으로 환원하여 사회가 나서서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방식은 당사자들에게는 무엇이 통제요 폭력인지 그다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어린 학생선수들은 성보호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은 성인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순결중심의 판단기준, 실태조사 결과 언어적인 성희롱은 많은데 강간이나 극심한 추행은 두드러지지 않았다면 금세 분노와 삿대질을 접어두고 용인하는 선정주의(여성재소자에 대한 성폭력 사건 당시)와 맞닿아있다. 여성선수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성보호주의는 여성선수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성적착취 관행에 맞선 적수가 될 수 없다.
그 무엇보다 보호되어야 할 성으로, ‘그래봤자 여자’로 환원되지 아니한 채 운동선수로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운동선수의 삶을 선택하고 살고 있는 그녀들이 직접, 이 구조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문제점이 무엇이고 무엇이 현실적으로 해결을 위한 노력이 될 수 있을 것인지 발언해야 그것을 듣고 우리는 정확한 무엇에 근접할 수 있다.

누가 여성 엘리트 스포츠를 고립시켰나

스포츠계 여성선수들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사실 전반에 존재한다. 감독와 코치가 폐쇄적인 공간에서 행한 강간과 추행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지 몰라도 여성선수들에게 몸매가 드러나는 유니폼을 입게 했던 구단과 연맹의 상술이나 여성선수들을 언론에서 인터뷰하며 “그래도 나는 여자랍니다” 식의 타이틀을 거는 모습, 혹은 “아줌마들의 힘은 강했다” 식의 그녀들의 파워와 고군분투, 승부욕의 결실을 탈여성의 이미지와 결부시키는 노력 등은 끊임없이 존재한다. 이러한 여성선수들에 대한 식상한 성별적인 레토릭은 여성들 자체에 대한 성별화에 기반해있다. 여성을 제대로 성별화하자면 그들은 운동선수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라는 공식. 운동과 여성의 만남은 아무래도 예외적이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조합이고 그래서 여성스포츠는 떠들썩한 전 국민의 문화체육 컨텐츠가 되지 못한다는 공식.
한국 국민들이 즐기는 전체 스포츠에서 여성 스포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극미하다.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성 스포츠 스타들은 대부분 올림픽 메달리스트이거나 국제대회에 이름을 떨친 선수들이다. 여성팀이 강세인 올림픽 종목과 스타를 배출하는 골프, 최근의 피겨스케이팅 등을 쉽게 떠올리지만 이 종목들의 여성실업리그나 프로리그가 국내에 활성화되어 있냐 하면 아시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다. 국위 선양을 목표로 국가스포츠 정책이 수립되어 있고 따라서 올림픽이나 국제선수권대회를 중심으로 엘리트 선수양성이 코스화되어 있는 것은 스포츠계 전반의 문제이지만 여성선수들의 경우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할 것이라고 익히 예상된다.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중학교 진학시부터 전국체전에 매달리거나 대학이나 실업팀에 스카웃되는 것이 절실한 과제가 되기에 감독이나 코치가 휘두르는 전권에 대응할 방도가 마땅치 않다. 물론 여자팀은 중고등학교나 대학, 실업리그에도 극히 소수이고 그마저도 쉽게 없어지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을 앞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가 먼저 당면한 과제가 될 것이다. 선수선발권, 추천권을 가진 감독 코치들이 여성선수를 쉽게 성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구조는, 여성선수들이 마음껏 운동할 수 있는 장이 너무 협소한 한국의 현실, 운동선수가 되기를 선택하고 갈망하는 그녀들의 삶을 열의있게 지켜보고 열광하며 함께 하는 대중들이 부족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다시, 여자들이여 운동장으로!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에 잠을 못 이룬다는 그들에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대안은 바로 여성스포츠의 활성화다. 여성리그의 흥행을 위해 오늘도 팬서비스와 이벤트를 준비하는 구단과 연맹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는’ 여성스포츠의 활성화. 여성들이 더 많이, 훨씬 많이 스포츠를 즐기고 배우도록 하는데 여성스포츠 정책, 아니 국가스포츠 정책의 전환점이 있어야 한다. 여성스포츠 대중은 없고 엘리트 스포츠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엘리트 스포츠는 선망의 정점이 아니라 고립되는 섬이다. 각종 종목을 다양한 수준에서 즐기는 여성스포츠 대중이 모든 연령과 지역에서 넘쳐난다면, 여성선수들 역시 다양한 진로와 역할을 모색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지 않을까. (노조활동가, 여성건강을 위한 공익캠페인 모델, 10대 여성들의 멘토,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각종 소수자, 여성 운동에 함께하는 그녀들!)
여성스포츠 대중을 키우는 일은 직접 스포츠를 즐기고 배우도록 해야 가능하다. 한국 사회 거의 모든 남성들이 삶의 많은 시간동안 적극적인 스포츠 대중이 되어 살아가는 이유는,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직접 몸으로 많은 종목들을 배우고 즐기고 연습하고 경기를 경험해보도록 자랐기 때문이다. ‘하는’ 스포츠를 경험하지 않고는 ‘보는’ 스포츠의 적극적인 대중이 되기는 힘들다.

나 역시 이제까지 그랬다. 내 몸으로부터, 운동장으로부터, 여자들의 연대와 몸 놀이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신도 익히 알고 있듯이 여성스포츠의 활성화! 이것은 그저 요구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 쟁취해야 할 항목이 된다. 엘리트 체육의 상대어인 생활체육은 지금도 구청과 동사무소를 통해 전국에서 성행중이고, 전국의 생활체육 여자축구팀은 200여개에 이르고 (처음 들었을 때 예상보다 많다고 생각했다. 남자팀은 이에 몇 십배 달한다) 다양한 팀스포츠 종목이 이 생활체육 분야에 개설되어 있지만, 여성생활체육의 경우 가령 마포축구팀에서 선수로 뛰고자 한다면 당신은 결혼을 하거나 30세가 넘어야 가능하다. 그들에게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관리하는 마을에 사는 ‘생활’인이란 결혼한 여성이거나 30세가 넘는 여자라는 뜻이다. 선수출신의 용병(?)은 배제하겠다는 현실적인 고려가 그 배경이라지만 10대 여성이나 20대 여성은 마을공동체에서 팀스포츠를 배우고 즐길 수가 없게 되어 있는 셈이다.
쟁취하고 싸워가야 할 일은 매우 많다. 초중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여자 학생들이 동등하게 체육 교육을 받을 권리, 운동장을 점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교육현장에서 관철되어야 한다. 또한 학교 외의 지역사회에서 나이와 지역과 계층에 상관없이 여성들이 스포츠를 꾸준히 배우고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 공공서비스의 중요한 항목으로 되어야 한다. 올해 밤길되찾기 시위에서, 총선에서 그런 구호들을 외쳐보자. 여성스포츠팀의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구단과 감독을 감시하고, 선수들에게 지속적인 지지와 날카로운 응원의 메시지를 선물하는 것도 좋겠다. 내가 하는 모임에서 그녀들을 초대하고 만나서 함께 놀고 대화하는 이벤트를 열어보는 것도 좋겠다. 여하튼 우리들은 서로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일단 ‘하는’ 스포츠의 열광적인 주인공들이 된다면야 이런 것들은 봇물처럼 생겨날 것이다. 교회에서 일년에 두 번씩 여는 친구초청 큰잔치처럼, 올해 내가 하는 운동팀에 열명의 친구들을 조직해보면 어떨까. 그리하여 삼년 후 가을 페미니스트 운동회는 상암경기장에서 하는 거다!

+이미지 출처
2007 페미니스트 가을 운동회

** 이 글은 언니네 www.unninet.net 채널넷 특집 2008년 3월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출처없이 퍼가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