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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보짱] 남녀평등 정책이라는데, 짜증만 느네
  • 2011-06-15
  • 3258
남녀평등 정책이라는데, 짜증만 느네
남녀평등신호등, 남녀평등 내세워도 반갑지 않은 이유
11.05.06 17:57 ㅣ최종 업데이트 11.05.08 16:41 이은심 (eunsim77)
요즘 때 아닌 신호등 논쟁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경찰청은 기존의 4색 신호등을 선진국처럼 3색 신호등으로 교체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기존 4색 신호등은 '빨간색-노란색-녹색 좌회전-녹색 직진' 순서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를 '빨간색-노란색-녹색'의 3색 신호등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3색 신호등은 빨간색 등에 좌회전 화살표가 있기 때문에 많은 운전자들을 헷갈리게 해서 시범운영지역일대에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무분별한 선진국 따라잡기' 정책으로 인해 벌어진 대표적인 전시행정이다.
 
  
▲ 서울시가 제안한 신호등 개선안 서울시는 현재 쓰는 신호등의 이미지가 남성으로 보여 양성 평등에 맞지 않으니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바꿔보자고 경찰청에 제안했다.
ⓒ SBS 뉴스 캡쳐
신호등
또한 3색 신호등 교체뿐만 아니라 남녀평등신호등 또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서울시는 "여성의 모습을 보행 신호등 화면에 함께 넣자"는 내용의 제안서를 경찰청 교통안전시설 심의위원회에 제출했다. "남성의 모습만 있는 것은 남녀차별에 해당한다"는 게 이유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시민들이 "신호등 교체 비용이 200억원이 넘는다는데, 여성의 모습을 넣는다고 남녀평등이 이루어지느냐"며 쓴 웃음을 지었다.
 
사건이 커지자 부랴부랴 서울시에서는 신호등 교체는 주관부처가 서울시가 아니라 경찰청이며, 서울시가 부담하는 교체비용은 200억 원이 아니라 42억 원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200억이든 42억이든 일반 서민의 입장에서는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큰 돈인데, 서울시가 시민의 혈세로 예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은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다.
 
서울시의 여성 정책, 핵심은 빠지고 디자인만 남았다
 
서울시가 거액의 예산을 투자해서 전시행정을 벌이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는 오세훈 시장이 당선된 이후 거창하게 내세운 '디자인서울', '한강르네상스' 등 서울시의 외관을 아름답게 디자인한다는 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서울시는 '디자인서울' 정책의 일환으로 거리의 구둣방과 노점상에 대해 규격화된 새로운 디자인부스로 교체할 것을 강요하였다. 새 구둣방에 대해 외관상 보기 좋아졌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실상 구둣방 주인들과 이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평가는 달랐다.
 
구둣방 주인들은 새 구두수선대가 내부 공간이 좁고 시야가 답답하며, 창문이 작아 환기가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내지 않던 박스 대부료를 1년에 50만원씩 내게 됐다. 손님들이 새 구둣방의 높은 문턱에 걸려 넘어져도 서울시는 규정을 내세우며 입구에 발판을 놓지도 못하게 했다(관련기사 '밖에선 깔끔? 안에선 답답!… 누구를 위한 '디자인 구둣방'인가'). 이는 이용자의 안전이나 편의보다 규격화된 디자인만을 내세우는 전시행정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울시의 전시행정은 여성정책의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성이 행복한 서울'을 내세운 '여행(女幸)' 정책은 여성의 하이힐이 보도블럭에 끼지 않도록 보도블록을 교체한다거나 여성전용 핑크색 주차장을 만든다는 정책으로 여성들의 빈축을 산 바 있다. 여성들이 살기 힘든 이유는 단지 보도블록 때문만이 아닌데, 서울시는 핵심이 아니라 지엽적인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여성들의 짜증만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디자인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보육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서울시는 25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서울형 어린이집'의 현판과 간판을 전면 교체하였다. 이 때문에 서울형 어린이집은 말 그대로 간판만 교체하는 '간판행정'이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다. 2009년 11월 서울형 어린이집 사업의 환경개선비 지원현황을 보면 현판과 간판에 25억(73.6%)를 사용한 반면, 아이들 교육기자재 보강을 위해서는 2억(9.9%)원을 지원했다('오 시장님, 쥐덫 위의 치즈는 '서울형 어린이집''). 서울시는 보육정책을 벌이면서도 보육서비스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서 체계적으로 예산을 집행하기보다는, '간판'이나 '현판'같은 가시적인 홍보를 할 수 있는 디자인 개선에만 치충했다.
 
이쯤 되면 과연 이 '디자인서울'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이용자의 편의와 수요가 맞아 떨어져야만이 빛을 발하는 법인데, 이용자가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한 채 혼자서 번쩍번쩍 빛나는 디자인은 그저 위화감을 조성할 뿐이다.
 
여성들에게 원하는 바를 물어보기보다는 '이 정도는 괜찮지?', '이건 어때?'라고 인기에 영합하는 아이디어에만 기댄 디자인들은 예쁘기는 하지만 누구를 감동시키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200억이든 42억이든 남녀평등신호등의 교체는 핵심 메시지는 사라지고, 디자인만 남았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남녀평등신호등, 남녀평등 내세워도 반갑지 않은 이유
 
여성의 입장에서 서울시가 남녀평등사업을 제안한다는 것이 여러모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의 '기존 신호등을 남녀평등신호등으로 교체하자'는 제안은 선뜻 찬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는 서울시가 정작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간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성만이 아니라 남녀가 같이 신호등에 들어있는 것은 따지자면 좋은 취지라고 여겨지지만, 과연 이것이 긴급한 민생현안인가를 두고는 고개가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채용 과정에서 성차별이나 남녀 간의 임금차별, 직장 내 성희롱이나 출산으로 인한 퇴사 강요 등 여성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성차별은 매우 많다. 한국에서는 이미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서 여성이 차별받는 일은 없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남녀평등은 이루어졌을 지언정 현실에서의 남녀평등은 아직도 요원한 과제이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에 다니다 임신을 한 경우, 직장에서 아무런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고 임신 또는 출산을 이유로 퇴사를 당한 경우가 10명 중 4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공식적으로는 임신을 이유로 퇴사를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퇴사하도록 압력을 주거나,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이 있어도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경우도 많았다('직장여성 10명 중 4명 "임신 후 퇴사"'). 문제는 여성을 위한 정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 정책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그럼에도 이 많은 남녀평등과제들 가운데 서울시가 골라내는 의제는 여성들에게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서울시가 생색내기 위한 것들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서울시는 남녀평등을 위한 기본적 과제들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당장 언론에 홍보하기 좋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만을 여성정책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신호등에 남녀의 모습이 함께 들어가고, 오만원권 지폐에 여성인물이 들어가서 '이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외친들, 현실에서 여성들의 시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서울시가 '남녀평등신호등'같은 아이디어로 손바닥을 간질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남녀평등과제를 수립해 시원하게 등을 긁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