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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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특집기획-청소년성교육 <남성 성문화의 특성>
남성 성문화의 특성
; 변형석 (웹진 언니네 편집위원)
Ⅰ. 통제불가능한 욕망의 통제 - 왜곡된 성적 인식의 출발점
한국사회에서는 얼마전 청소년의 성을 둘러싼 두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하나는 김인규 교사의 누드사진에 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박진영의 "섹스는 놀이다"라는 주장에 관한 것이었다. 김인규 교사는 "성기를 노출"했다는 이유로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고 있고, 박진영의 노래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를 통해 "섹스를 선동"하는 "청소년에게 유해한" 노래라는 명목으로 비난받고 있다(실제로 그의 노래는 KBS에서 방송불가판정을 받았다).
이런 해프닝들을 볼때면, 도대체 김인규 교사의 성기를 가리고, 박진영의 알 듯 말 듯 사실 그다지 노골적이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은 노래를 '방송금지'시킨다고 해서, 청소년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보호를 명목으로 한 청소년에 관한 보수적 담론들은 청소년으로부터 성적 욕망을 '통제'하려는 욕망이다. 그렇다면 성적 리비도와 성적 호르몬들이 가장 왕성하게 분출되는 청소년 시기의 성적 욕망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답은 당연하게도 "절대 아니요"다.
욕망은 통제 가능한 대상이 아닐뿐더러, 청소년들은 그들을 통제하고자하는 집단보다 (기술적으로) 더 유능하다! 그러므로, 이 집단적 '통제'에의 열망은 결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것은 도리어 청소년들이 왜곡된 성적 인식에 이르게하는 결과만을 양산할 뿐인 셈이다. 왜냐하면, 통제를 우회하여 청소년들이 접근하는 것들은 대부분 비합법적이고 비도덕적이며 특히나 남성중심적인 성적 표현물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현실에서 그들은 그것만으로 성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남성들이다.
Ⅱ. 남성들의 포르노 네트워크
특히 남성들에게 왜곡된 성적 인식이 자리잡게 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사회적 이유가 작용한다. 그중 하나는 성적인 발언/표현/행동의 자유(혹은 암묵적 권리)가 명백하게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은 누대에 걸친 반복적 학습과 사회적 장치들을 통해 사회 전체의 성적 욕망을 남성적인 것으로 재생산한다. 남성들은 성적 표현물에 접근하는 것이 여성보다 훨씬 용이하며, 특히 그 표현물 자체도 남성적인 것이므로 아무런 거부감없이 반복적으로 그것을 소비한다. 이 점은 여성들이 현존하는 성적 표현물들에 흥미를 가지지 않거나 심지어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과 비교할 때 보다 확실히 그 의미를 드러낸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이유에 근거한 광범위한 남성들의 포르노 네트워크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특정한 형태도 없고, 규칙도 없다. 실존하는지의 여부조차 알기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소년 시기, 혹은 그 이후동안에도 줄기차게 남성들에게 성적표현물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이 네트워크라는 점이다. 지난번 오현경씨 사건이나 백지영씨 사건 같은 경우가 그 네트워크의 강력한 실존을 입증하는 셈이다. 이 네트워크는 삽시간에 전체 남성의 반수이상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네트워크인 셈이다. 실제로, 청계천, 용산 등의 전통적(?)인 지역뿐만 아니라 널리 알려져있는 '소리바다', '심마니 팝폴더', '나누미', 각종의 홈페이지 계정서비스들은 대부분 이 유통의 중간 경유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뉴스그룹까지도 이들의 행동 무대로 이용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얻어진 자료들은 다시 개인적인 연결망(학교, 군대, 회사등)을 통해 CD로 구워지고 전송되어 다른 남성에게로 퍼져간다. 현재와 이전의 차이점이라면, 이전에는 실제적인 물건(비디오 테이프, 카세트 테이프, 책, 만화책, 사진, 잡지 등)이 교환되고, 따라서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던 데 반해 현재는 그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삽시간에, 그것도 '무료'로 전파된다는 것에 있을 뿐이다. 물론, 무엇인가가 집단적으로 유통된다는 사실이나 강력한 네트워크의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유통되는 내용에 있다.
Ⅲ. 남성의 성적 판타지
남성들이 접하게 되는 성적 표현물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당연한 표현이겠지만, '남성적'이다. 남성적 시선과 욕망을 내포한다. 관음증적 시선과 페티시즘, 성기중심적인 관계들의 묘사, 강간, 근친상간 등이 그 주된 내용이다. 그것의 공통점은 폭력성과 남근중심성과 관음증이다. 이런 것들이 다시 개개인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구성하는데, 그것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른바 '야설'이라 불리우는 포르노 소설들이다.
야설의 주요한 내러티브는 이렇다. 특별한 관계는 아닌데 친밀하거나(누나/동생, 친구누나/동생, 여자친구, 비서등) 전혀 모르는(버스나 지하철, 택시,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 사람과 우연하게 만나게 되면서(혹은 우연히 그들의 몸을 보거나 자위행위, 섹스장면 등을 목격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그 여성들은 모두 처음에는 싫어하거나 난처해하지만 곧(성기의 삽입 후) 흥분하게 되고 격렬한 섹스를 나누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 것이 남성들의 가장 전형적인 성적 판타지인 셈이다.
그런데, 이 판타지는 몇가지 점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를 빚어낸다. 첫째, 여기에서 주변의 모든 여성은 잠재적 섹스 상대자이거나 적어도 훔쳐보기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즉, 모든 여성은 섹스상대로서 의미를 가지며, 여성의 의사는 의미가 없다. 둘째, 모든 여성은 자신과의 섹스를 결국 '즐기게 된다'고 가정된다. 즉, 여성의 최초의 반대나 반발은 으레 그러는 것이므로 폭력을 통해서라도 시작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셋째, 섹스에서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된다. 모든 것은 섹스이후 해결될 것이므로. 넷째, 섹스의 모든 것은 삽입에 달려있다고 가정한다. 즉, 섹스의 목적은 삽입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만 여성을 궁극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러나 단지 판타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 남성들은, 성관계를 직접 가지기 이전에, 혹은 가진 후에도 그 모든 판타지를 사실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Ⅳ. 판타지와 성폭력의 사이에서
남성들이 판타지를 현실과 혼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는 현실이 전혀 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은 대개 중고등학교 6년간을 성별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생활하며, 그 이후 군대에서의 경험까지 근 10여 년에 걸친 혈기왕성한 시기를 포르노적 시각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성적인 경험이나 성적인 인식은 극히 개인적인 일들로 간주되므로, 스스로의 성경험은 무용담이나 지하세계의 게슴츠레한 눈빛으로만 전달될 뿐이다. 그 공간에서, 청소년기의 성적 판타지는 영원히 그 개인의 판타지로 남게 되는 셈이다.
군대에 있을 무렵, 근무만 나가면 아주 집요하게 나의 성생활을 캐묻던 고참이 있었다. 속된말로 '변태'가 아닐까 싶을 만큼 집요하던 그는, 끝끝내 내가 알아낸 결과, 단 한번도 성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앞서 언급했던 모든 판타지를 자신의 것으로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이 스물 다섯에 말이다. 그가 과연 어떤 섹스를 하겠는가. 그의 섹스가 폭력이 아닐 수 있음을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으레 싫다고 말하고, 결국 삽입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그의 판타지가 폭력말고 다른 무엇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