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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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잔인한 말버릇
그 남자의 잔인한 말버릇
-서동진(문화평론가/서울퀴어아카이브 프로그래머)
성과 권력 그리고 말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입씨름이 곧 권력의 싸움이란 점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항간의 페미니스트들이 "이제부터 나는 보지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다거나 "월경을 찬미한다"고 주장할 때, 이는 얌전빼고 점잖은 채 하는 아버지-오빠-가부장적 권위를 골탕먹이려는 삐딱한 용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 말들을 공공연히 떠들고, 그 말들을 독점하는 남성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 이 말들의 '사용'이 갖는 반권력이다. 자신의 몸을 가리키는 말을 제 스스로 말하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투쟁일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 몸을 가리키고 드러내며 표현하는 말들은 언제나 남성과 여성 사이의 혹은 동성 사이의 권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말은 재현의 권력이다. 이 때 일컫는 말의 재현적 권력이란 무엇보다 말을 주고받는 짝패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권력을 가리킨다. 말은 따라서 말을 건네는 사람의 뜻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권력을 나눠준다. 말을 듣는 상대가 있건 없건 언제나 말은 너와 나의 관계 사이에서 흘러 다닌다. 그러니 말이 통한다는 것은 말귀를 알아먹었다는 것이기에 앞서 너와 내가 어떤 위치에서 말을 주고받는지를 밝혀주어야 한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말을 통하게 하는 여건 속에서 가능한 것이고, 말은 그런 점에서 말을 주고받는 상대들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힘이다. "이 깜둥이 놈아"라고 백인이 부를 때 그것은 대단히 인종차별적인 말이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 혹은 흑인들 사이에서 불릴 때 그 말은 당신과 나는 같은 편이며 이심전심이라는 감정적 유대를 확인하는 말이 된다. "이 망할 년아"라는 말을 부부 싸움 도중에 남편이 내뱉는다면 그것은 언짢고 공격적인 폭언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여고 동창끼리의 말이라면 그 어느 말보다 돈독한 우정을 드러내는 말이 된다. 이처럼 말은 어떤 뜻을 가리키기에 앞서 말을 주고받는 상대 사이의 관계와 그 권력을 빚어낸다. 따라서 어떤 말을 헤아린다는 것은 그 말뜻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말을 주고받는 관계를 헤아리는 것이다.
남자의 말, 여자의 말
그럼 이 대목에서 남자의 말과 여자의 말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은 남자의 몫이었다. 여자의 몸을 정의하고 판별하며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남자들의 의학과 생리학이었다.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고 분배하는 것 역시 언제나 남자들의 법학이었고 경제학이었다. 설마 산부인과학을 여자들이 만들었으며, 가정법과 호주상속법을 여자들이 만들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쏟아내는 말이란 것도 결국에는 남자들의 말을 빌려쓰는 셋방살이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말을 둘러싸고 대단한 감수성을 보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말꼬리 잡길 좋아하고, 별말 아닌데 삐치고, 수다라면 사족을 못쓰는' 여자들에 대한 세간의 곱지 않은 눈길은 그래서 반쯤은 일리 있는 말이다. 적어도 그런 푸념과 비난을 여성의 말을 둘러싼 감수성으로 고쳐 읽는다면 그런 여성의 수다와 말버릇은 전연 나쁜 게 아니다. 그것은 여성들이 가진 말의 영역이고, 또 남성들이 장악한 말의 공간으로부터 달아나고 또 끼어 드는 여성의 전략이자 실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들의 그런 말버릇 혹은 말의 실천을 남자들이 불쾌해하고 비난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남자들이 계속 통제하고 있는 말의 권력과 통제를 여자들이 위반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남자들이 제일 질겁하는 여자는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여자이다.
남자의 말, 남자의 폭력
그렇다면 여자들이 말의 숨통을 틔면서 자신의 말을 드러내는 공간을 무작정 축복하고 예찬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군소리'이자 '소음'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잔소리와 바가지와 수다와 말꼬리가 '나라'의 말이 되고 '가족'의 말이 되고 '회사'의 말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말들은 계모임과 동창회와 드라마를 본 뒤의 잡담 자리에서 오가는 말이며, 고작해야 사랑하는 사이에서나 용기를 내어 뱉어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말의 공간은 여전히 남자들의 말이고, 여자들은 말이 건네지는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속한 말의 세계에서 언제나 말은 곧 여성에게 가해지는 통제와 지배의 그물을 엮어낸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할라치면 '보지의 혼잣말'로 될 '버자이너 모놀로그'같은 연극이 꿈꾸는 세상은 아마 그런 말의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여자끼리의 말의 지대일 것이다. 그러나 혼잣말을 흉내낸 그 무대의 말들이 여성들에게 희열과 감동을 주었을 때, 그것은 여성의 억압된 진실을 폭로하고 무언가 새로운 교훈적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혼잣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여자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때, 그 말의 힘은 남성이 독점하고 있던 말을 제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는 권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남자들의 말의 폭력이란 것도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의 평균적인 남성이라면 그의 계급적 지위와 교양의 수준을 불문하고 부부 싸움의 절정에서 걸핏하면 토해내는 "화냥년" 운운과 "갈보" 운운의 욕설은 그리 대단한 폭력이 아니다. 그 말은 관습적인 이성애적 부부관계에서 여성의 성을 아내-어머니로 더 이상 묶어둘 수 없음을 깨달은 남자들의 무력한 비명에 불과하다. 자기의 아내더러 그런 욕설을 퍼부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아내가 일부종사라는 세계에 살지 않고 있음을 자인한다. 그는 부부 관계 안에서 자신의 아내의 정체성을 어머니 이상으로 상상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제 스스로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부릴 수 있으며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더없이 불안해지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말을 들어 유쾌할 여자는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그러니 '조신하고 정숙하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모욕이자 배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저만 상처받는 일이다. 남편과 애인의 질투와 억측을 비난해봤자 그것은 고쳐지고 반성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둘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의 현실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말은 자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여성의 삶과 현실을 비추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남자인 자신과 여자인 "당신, 여보, 자기" 사이에 놓은 관계의 문법 주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폭력과 침묵,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남자의 말
알다시피 남자들의 가장 '잔인한' 말버릇은 그가 나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는 현실적인 자기(self)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관계 자체를 분석하는 중립적인 판관의 몸짓을 취할 때이다. 갑자기 친밀한 관계에서 오가던 모습을 안면몰수하고 진리와 규범을 대변하는 발언자의 자리에 선 채, 끈덕지고 집요하게 여자에게 말을 건넬 때, 대개 우리는 거의 질릴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오히려 낯을 붉히거나 찌푸린 채 쏟아져 나오는 욕설보다 더 잔인하고 난폭하며 숨막히게 한다. 이 때 물론 남편의 위치는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대화의 자리가 아니라, 무식하고 버릇없는 자신의 여자를 심문하고 벌하는 아버지 혹은 선생님의 자리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불편을 고하고 그것으로부터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조정하려는 의지라곤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건 싫어요'라는 말을 언제나 '당신은 틀렸어요'라고 밖에 들을 수 없는 반편짜리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의 말의 폭력은 여자들에게 가해진 구체적인 말의 질에 달려있는 게 아니다. 여성들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말들은 빈약하게나마 성별을 둘러싼 권력 관계를 들춰내고 그 관계에 묶인 주체들의 위치를 폭로한다. 적어도 그 말들은 난폭하고 비겁하긴 하지만 둘 사이에 관계와 작용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며, 비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소통을 향한 욕망을 품고 있다. 반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남자의 말은 그런 용기와 정직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발뺌하는 폭력이다. 그 말이 진정 폭력적인 것은 무엇보다 관계를 맺는 타인의 자리를 지워버리고 그녀를 영원히 허깨비처럼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다. 그런 남자의 말들은 결국 타인인 여자의 말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그 말을 자신의 말이 허용하는 규칙 안에서만 숨쉬게 한다. 결국 여자들의 말이 의미 있는 삶의 체험으로 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의 투쟁은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 투쟁은 자신에게 강요된 침묵을 깨트리는 일이고 자신을 감히 스스로 드러내고 인식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