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지난 2020년 1월 14일(화)~15일(수) 서울여성플라자 2층 회의실에서 제34차 한국여성단체연합 정기총회가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성연합')은 전국 7개 지부와 28개 회원단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국성폭력상담소도 회원단체로서 참가했습니다.
첫째 날은 다같이 모여 정책토의를 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활동가들과 올해 여성인권운동의 방향성을 논의하고, 지역별 이슈와 고민점을 공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선 연세대학교 김현미 교수의 여는 강의 "성평등과 민주주의 : 탄생의 권리에서 사회적 권리로"를 들으며 다함께 공부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다음 내용은 제가 강의를 듣고 나름대로 이해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실제 강사가 전달하고자 한 내용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현미 교수는 한국에 페미니즘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성별 권력관계(섹스-젠더-섹슈얼리티에 따라 위계화된 사회구조)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 없이 수치적 평등만 추구하는 문제점을 비판했습니다. 이른바 '양성평등'이라는 명목 하에 '권리'라는 개념을 마치 양성 간 뺏고 빼앗기는 제로섬 게임의 문제로 바라보고,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작동하는 맥락과 사회·문화·구조는 고려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여성 비율 몇 퍼센트, 남성 비율 몇 퍼센트처럼 계량화된 평가지표만을 고려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수치적 평등의 문제는 올해 총선을 앞두고 여성연합 내에서도 고민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여성연합은 오랫동안 여성 정치대표성을 확대하기 위해 '여성할당제' 나아가 '남녀동수제'를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성별이 여성이라고 반드시 성평등 관점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고, 성평등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만 바라봐 남성 정치인들은 젠더정책 의제를 회피·외면·침묵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심지어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누가 여성인가'라는 질문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국회의 여성 비율이 17.1%에 불과한 현실에서 여성 정치대표성 확대는 꼭 필요하지만, 실질적인 성평등 실현을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더 필요한지 계속해서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김현미 교수는 '양성평등'이라는 언어가 근본주의 종교와 결탁해 '성별'을 태생적, 생물학적, 본질적, 불변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며 성소수자 혐오를 선동하는 데 악용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국가와 혐오세력은 그동안 페미니즘이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온 언어와 개념들을 파편적, 악의적으로 차용하고 편협하게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백래시는 페미니즘을 학계, 디지털 영역, 생활세계, 사회운동 등 모든 공간에서 유순하게 길들이거나 내쫓으려고 하고, 페미니스트를 정치적·존재론적 공허함으로 몰아넣습니다.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여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면 모두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여성의 경험을 동질화하는 문제점도 고민으로 남았습니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현실에서 여성 연대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지만, 자칫 여성 간 차이와 복합적인 정체성을 삭제하거나, '여성'이라는 정체성 혹은 '여성의 몸'을 가진 사람끼리만 연대할 수 있다는 배타적인 인권운동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같은 정체성, 같은 바운더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권리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적인 것이고 공유되는 것'이라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어서 "성평등 사회를 위한 2020 총선 전략 만들기' 분반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제시한 영역별 젠더정책 과제를 살펴보고, 총선 대응 전략을 논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분반토론은 1) 동등한 대표성/소수자의 시민권 보장, 2) 성평등한 평화체제 구축, 3) 성평등한 노동/안전한 일터, 4) 젠더폭력과 혐오없는 사회, 5) 돌봄 정의(돌봄 민주주의)/보육 공공성, 6) 다양한 가족구성권 보장/안전한 주거와 안정적인 노후, 7) 건강권/재생산권/몸 다양성, 8) 미디어, 과학기술 분야 젠더 관점 정책 마련, 총 8개 주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은 '젠더폭력과 혐오없는 사회' 조로 배정되었고, 저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하나하나의 정책 과제가 다 중요해 총선 우선과제를 정하고 전략을 세우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각 단체마다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의제가 조금씩 달라, 의제별로 현장에서의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점은 좋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구체적인 전략까지 세우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어떤 점들을 고려해서 전략을 세워야할지 정리해볼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참여한 조에서는 젠더폭력 관련 정책과제 중에서도 ① 「형법」 제32장 및 '강간죄' 개정(성폭력의 판단 기준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기), ② 사이버성폭력 피해를 포괄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현행 「형법」 과 「성폭력처벌법」이 포괄하지 못하는 사이버성폭력을 처벌할 수 있도록 바꾸기), ③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및 역고소 남용 제한 등 수사 및 처벌 실질화, 총 3가지를 우선과제로 논의했습니다. 아무래도 구성원 중에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이 많다 보니 성폭력 문제해결 중심으로 우선과제가 정해졌지만, 다른 과제도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영역별 젠더정책 과제와 내용은 다음 자료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1대 국회에 바란다!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를 위한 총선 젠더정책 자료집 다운로드(클릭) |
저녁 식사를 한 후, 분반토론 발표를 통해 조별로 논의한 내용을 다같이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어서 소통과 연대의 밤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습니다. 조별 퀴즈 대회 형식으로 여성연합 지부 및 회원단체들의 2019년 활동들을 각각 알아가는 시간이었어요. 이렇게나 많은 여성단체가 이렇게나 다양한 활동을 했구나,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첫째 날 공식적인 일정은 끝났지만, 일 년에 한 번 1박2일로 진행되는 만큼 늦은 밤에도 뒤풀이가 이어졌습니다.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로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대화를 나누며 유대감을 다졌습니다. 야식도 준비되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비건 피자가 참 맛있었어요.
둘째 날에는 본격적으로 제34차 한국여성단체연합 정기총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사전행사로 대표인사, 지도위원의 격려사, 특별상 시상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성평등조례를 제정할 수 있도록 힘써온 경기여성단체연합은 '굳세어라 당신'상을, 포항지역에서 발생하는 혐오와 차별, 성추행 사건 등에 맞서 싸운 포항여성회는 '불굴의 투지'상을, 가족형태에 상관없이 모두가 독립적이고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해온 한국한부모연합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사람들'상을 수상했습니다.
본회의에서는 여성연합의 2019년 감사보고, 사업보고와 승인, 결산보고와 승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투표를 통해 제13대 공동대표로 김영순, 김민문정 2인이 선출되었습니다. 신·구임원 교체식에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이 서기이사 임기를 마치고, 회계이사로 새롭게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2020년 사업계획안 보고와 승인, 예산안 보고와 승인이 이루어졌습니다,
총회를 마치기 전에 한 번 더 토의 시간이 있었는데,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올해 총선 국면에서 여성연합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더 힘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정의당에서 "제21대 국회 정의당 1호 법안은 차별금지법"이라고 밝힌 상황이므로 이번에는 꼭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동력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폐회 후에는 공동대표 이·취임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본회의에서 선출된 제13대 공동대표 김영순, 김민문정이 취임하였고, 제12대 공동대표로 3년 동안 활동해주신 백미순, 최은순이 퇴임했습니다.
올해도 소통과 연대로 함께 펼쳐나갈 여성연합의 활동을 지켜보고 지지해 주세요.
<이 후기는 성문화운동팀 앎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