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지난 2월 10일,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제1478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이하 ‘수요시위’) 기자회견”의 주관단체로 참여해 기자회견을 기획하고 진행하였습니다. 고 김학순 여성인권운동가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 흘렀습니다. 제1478차 수요시위에서 상담소는 “우리가 들었다. 우리가 답한다.”라는 주제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함께 응답하고자 했습니다.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진행됩니다. 이번 1478차 수요시위 기자회견은 코로나로 인해 현장참여가 불가능했고, 주관 단체였던 한국성폭력상담소 역시 기획팀 3명만 현장출석이 가능했습니다. 구호, 율동, 현수막 퍼포먼스 등 예년에는 이루어졌던 행사 프로그램도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기획팀은 기존부터 3명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인원조정 없이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수요시위는 기자회견 형식으로 유튜브 스트리밍을 통해 송출되었고, 참여는 유튜브 채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수요시위 당일, 12시에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수 많은 경찰, 기자, 그리고 낯선이들로 가득한 현장이었으나, 정의기억연대 활동가님들과 함께 담담하게 준비해온 기자회견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수요시위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아 활동가님의 인사와 주관단체 소개로 시작되었습니다. 첫 순서는 정의기억연대의 활동보고가 있었습니다. 설 명절을 곧 맏이하여 포카 활동가님이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인사드린 보고를 했습니다. 이어서 참가자 연대발언이 있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수이 인턴을 시작으로, 수요시위에 항상 함께해 주시는 고등학생 박승배님의 발언문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지우 활동가님께서 대독해주셨습니다.
수이 인턴의 자유발언 “바로 잡아야 한다.”
고 김학순 여성인권운동가님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 흘렀습니다. 길고 긴 싸움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두를 장식한 이 외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그 목소리에 응답하고자 이 자리에 선 한국성폭력상담소 인턴 수이입니다. 저는 이 싸움의 진실을 말하고, 우리가 누구로서 ‘연대’해야하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전시’라는 특수상황에서 일어난 성폭력, 그 이상의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싼 ‘피해자화의 정치’는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여성들에게 여전히 큰 고통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종전의 울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닿지 못했고, 또 다른 전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종전 직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돌아갈 수 있었던 ‘전쟁 없는 일상’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우리 사회는 일본군 '위안부'를 바라보기 두려워했습니다. 1478차까지 이어져 온 수요시위, 그 사이에 이루어진 한일 협정과 합의. 지난한 세월동안 피해자들은 끊임없는 투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는 국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약해서, 미국의 압박을 느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변명으로 회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함께 발화하지 않는 것은 침묵하는 가해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피해현실의 간극에는 피해자들의 무너진 일상과 인간존엄이 존재합니다.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어떻게 바라봐왔나요? 전쟁시대에 맞서 싸운 이들에게 ‘순결의 피해자상’에서 벗어난다며,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했습니다. 가해자가 가해를 부정하니 피해를 믿을 수 없다며,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틀어막고자 했습니다. 사회는 참으로 요지부동입니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갔다 싶으면, 또 다시 후퇴합니다. 오늘날, 다른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이 새로운 '전쟁'을 종식해야 합니다. "일본의 무기가 망각이라면 우리의 무기는 기억이다” 지난 수요시위에서 뒤흔들었던 팻말을 기억합니다. 피해를 기억하고, 나아가 함께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그 시대를 맞서 싸우신 선생님들께 전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윤리이자 연대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일본 정부는 범죄 사실을 인정하라. 둘째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배상하라. 셋째 한국 정부는 이번 판결을 존중하고 정의로운 해결에 앞장서라.
누구에게나 당연한 인간답게 살 권리에, 어떤 이는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평생을 싸워도 끝내 권리를 얻지 못하고 눈감아야 했던 수 많은 여성들의 얼굴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들의 전쟁을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서로를 호명합니다. 우리는 ‘아주 특별한 용기’ 없이도 목소리를 내고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저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모든 목소리가 특별한 용기 없이도 흘러나올 수 있고 또 그 목소리가 모두에게 닿는 세상을 바랍니다. 고 김학순 운동가님의 발언으로, 다시 한번 사회에 응답하겠습니다. “왜곡된 사실이 신문에 나오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한다”. 감사합니다. |
이어서 정의연 한경희 사무총장의 정의기억연대의 주간보고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담소의 뿌리 인턴이 제1478차 정기 수요시위 성명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수요시위 기자회견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가 들었다. 우리가 답한다. - 제147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성명서 -
지난 1월 8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 12명이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한국 법원은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각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선고했다. 피해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계획적, 주도적으로 ‘위안부’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피해자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성착취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법적 배상하라고 오랫동안 요구해왔다. 이러한 요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법적 소송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1년 이후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 수차례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매번 좌절되었다. 이번 손해배상청구소송은 한국 법원에 제기했던 첫번째 소송이자 일본의 범죄 사실과 그에 대한 법적 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이 승소한 첫 판결이었다.
2013년 피해자들이 처음 법적 절차를 밟은 이후 7년 만에 승소하기까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하여 소송을 지연시켰고, 넘어야 할 쟁점도 있었다. 쟁점 중 하나는 국제 관습법상 주권 국가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국가면제’였다. 2015 ‘한일합의’에 따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는 ‘불가역적·최종적’으로 이미 해결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재판권도 소멸한 것인가’라는 쟁점도 다루어야 했다.
서울중앙지법 제34민사부는 ‘국가면제’에 대해서 “피고가 된 국가가 국제 공동체의 보편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반인권적인 행위로 인하여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가하였을 경우까지도 이에 대하여 최종적 수단으로 선택한 민사소송에서 재판권이 면제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 불합리하고 부당한 결과가 도출된다”라고 판시했다. 피해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전시 성폭력을 가해한 국가가 ‘주권 국가의 행위’라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면제받을 수 있어서는 안 되며, 국제협약 등을 통해 만들어온 ‘인권’이라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에 우선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즉, 일본이 저지른 전시 성폭력은 주권 국가로서 보호받는 ‘정책’이 아니라 전쟁 도구로서 피해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한 ‘범죄’에 불과하다.
나아가 재판부는 “대한민국 정부와 피고 정부 간의 청구권 협정과 2015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 또한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한 배상을 포괄하지 못하”며 “협상력이나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하는 개인에 불과한 원고들로서는 이 사건 소송 외에 구체적인 손해를 배상받을 방법이 요원하다”고 판시했다. 이를 통해 피해자들이 스스로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을 위해 문제 해결할 권리를 가진 주체이며 국가간의 협약을 이유로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박탈할 수 없음을 밝혔다.
올해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의 첫 공개증언 이후 30년이 되는 해이다.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고 김학순 님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거짓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고서는,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아니면 말할 사람은 없겠구나’라며 증언에 나섰다. 고 김학순 님의 용기 있는 첫 증언 이후 지난 30년 동안 240여명의 피해자들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전쟁범죄였음을 말해왔다. 그리고 전 세계의 전시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연대하며 국제사회에 ‘전쟁과 여성인권’의 문제를 공론화해왔다. 인권과 피해자의 권리를 우선한 이번 판결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30년 간의 연대와 운동이 만들어낸 진전된 응답 중 하나였다.
“일본은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라는 피해자들의 오랜 외침이 법적으로 인정받는 데 30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아직도 범죄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분노를 표한다. 또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의 또 다른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는커녕 이번 판결에 대해 “곤혹스럽다”고 말하는 한국 정부에 참담함을 느낀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겠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가 끝나지 않은 싸움이며 앞으로 더욱 단단한 연대와 힘으로 함께 해나가야 한다는 책무감과 연대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우리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목격하고 들었다. 그 외침에 응답하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일본정부는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역사왜곡을 중단하라! 하나. 일본정부는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 하나. 일본정부는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전쟁과 폭력이 반복되지 않도록 진실과 정의를 교육하라! 하나. 한국정부는 이번 판결을 존중하고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에 앞장서라! 2020년 2월 10일 한국성폭력상담소 및 제1478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
모든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여러측면에서 준비가 부족했던 마음만 자꾸 쌓여갔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경험을 초석으로 더 나아질 다음을 생각하며, 속상한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상담소의 다른 활동가님들은 상담소에서 생중계를 함께 시청했었습니다. 수요시위가 끝나고 상담소에 돌아오니, 수고했다는 말씀과 함께 좋았던 점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미국 하버드 로스쿨의 마크 램자이어 교수가 논문을 통해 피해자들을 '매춘부'라고 주장하고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자발적인 계약'이라고 사실을 왜곡하며 일본의 범죄사실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피해자와 연대하는 전세계 시민들의 비판과 페미니스트들의 성명도 이어졌습니다. 고 김학순 님의 증언이 있은지 30년이 지났지만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 증언'들에 답하는 목소리, 더 넓고 단단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이 글은 '수이' 인턴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