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온라인 공간의 특성을 반영한 성착취물 ‘소지’ 개념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텔레그램 링크 참여에 대한 소지죄 무죄 판결에 부쳐
지난 11월 1일, 대법원은 아동 및 청소년 성착취물 100여 개가 저장 되어 있는 텔레그램 링크를 자신이 운영하는 텔레그램 대화방에 배포하고, 직접 성착취물을 유포한 혐의를 받는 A에 일부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A가 다른 사람이 개설한 아동 및 청소년 성착취물이 포함된 텔레그램 채널 7개에 참여한 것에 대해서는 ‘성착취물 소지’로 볼 수 없다며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법원은 성착취물의 ‘소지’를 성착취물을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상태에 두고 그 지배관계를 유지하는 행위로 정의했다. 이는 성착취물 파일을 구매하여 다운로드하지 않고, 단순히 시청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무르거나 접근할 수 있는 상태만으로는 ‘소지’로 간주할 수 없다는 판결이다.
현행 법체계 내에서 ‘소지’의 개념이 온라인 환경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법원이 사용하고 있는 ‘지배’의 개념은 물리적 상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온라인 공간의 고유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소지’를 ‘지배’ 상태로 정의한다면, 디지털 파일을 무한 복제, 배포, 가공할 수 있는 상태를 ‘지배’ 상태, 즉 ‘소지’의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A는 자신이 개설한 텔레그램 방에 성착취물 링크를 유포한 혐의도 있다. 물리적 저장매체에 다운로드한 것이 아니지만, 링크를 유포함으로써 성착취물에 대한 접근과 확산의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증가시켰다. 이처럼 사이버성폭력에서 ‘소지’의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 ‘보유’를 넘어선다. 누군가가 촬영물을 시청할 수 있거나 언제든지 유포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해경험자는 강력한 불안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통제와 협박이 가능해진다. 삭제지원 시 피해경험자들이 자신의 촬영물 파일 뿐 아니라, 촬영물에 접근할 수 있는 링크나 채팅방 삭제를 요청하는 것은 ‘접근할 수 있는 상태’ 자체가 곧 피해촬영물의 ‘물리적 소지’와 동일한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A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서 직접 텔레그램 방을 개설하고 성착취물을 유포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범죄의 맥락을 보았을 때 A는 텔레그램 링크에 참여해 범죄를 저지를 예비 상황을 넘어 지속적인 범죄와 착취 행위의 진행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A가 링크 방에 참여한 것을 가만히 들어가 있는 수동적 상태라고 여기기 어렵다. 성폭력처벌법 조항은 피해촬영물의 반포ㆍ판매ㆍ임대ㆍ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ㆍ상영, 소지ㆍ구입ㆍ저장 또는 시청, 편집ㆍ합성 또는 가공 등의 행위를 일일이 열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나열된 행위들은 대부분 개별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비물리적 특성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0년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국민적 분노를 일으킨 후 성폭력처벌법에 ‘소지죄’가 신설되었다. 이는 ‘N번방 방지법’이라 불리며 아청법의 소지죄 조항도 시청하는 행위까지 포함하여 개정되었다. 우리는 소지죄 신설 이전에도 ‘보는 것도 성폭력’이라고 강조하며 소비를 멈춤으로써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N번방 방지법’의 소지죄는 이러한 사이버성폭력의 수요를 차단하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기존 나열된 범죄 행위들 사이 공백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성폭력’이라는 소지죄 본래 목적을 역행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온라인상의 특성은 전통적인 물리적 저장매체에 근거한 ‘소지’ 개념을 초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비물리적 소지’로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피해촬영물에 대한 접근, 관리 그리고 유포 가능성을 포함하여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온라인 환경의 특성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소지’를 그저 가만히 갖고만 있는 상태라고 소극적으로 볼 것인지, ‘소지’를 통해 무엇을 야기시키는지, 성착취 방에 들어가 있는 행위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지, 사이버성폭력 수요를 차단하기 위해서 온라인 상태의 소지 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촉구한다.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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