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가자! 체제전환으로!
그런데 어떻게, 어디서, 누구랑?
상담소가 체제전환운동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 사회운동에 조금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잉? 체제전환운동이 뭔데? 하는 분들은 여기로!) 상담소는 문명 탄생 이래 가장 오래된 억압체계, 가부장제를 체제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근대 이후 자본주의가 사회의 중요한 이념이 되면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억압의 쌍두마차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폭주기관차처럼 구르고 있어요. 최근 강남3구를 중심으로 시작한 '필리핀 출신 이주돌봄노동자' 시범사업이 그렇습니다. 돌봄하는 여성을 해외에서 '싼 가격'으로 수입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기 어려운 숙소를 내놓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책 말이예요.
상담소가 마주하고 있는 반성폭력 운동의 현장 역시도 자본주의의 광풍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성폭력 피/가해자 법시장화 경향은 말할 것도 없죠. 이대로는 무언가 안 될 것 같아, 대안이 필요해! 하는 마음으로 결합한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에서, 지난 9월 10일 온라인으로 각자의 현장에서 느끼는 현재를 나누고, 함께 외칠 구호를 정하기 위해 워크숍을 열었습니다.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고 시작한 워크숍에는 40명에 가까운 활동가들이 참여했는데요, 공동집행위원장 미류 님의 발제를 듣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다음 조별로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에는 정말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소속으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모여있어요. 반성폭력/페미니즘 단체인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 주거, 교육, 청소년인권, 노동, 정당, 기후, 도시권 등... 일일히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활동가들이 모인 만큼 저마다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도 조금씩 다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체제전환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우리는 어떤 구호까지 의견을 모을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아무래도 입에 착 붙는 구호를 내려면 각자의 운동이 어떤지 교류가 필요하겠죠? 자기 현장의 이야기를 나누며 이야기를 열었는데요, 저는 '윤석열 퇴진'이라는 흐름이 정말 많이 가시화되어서 놀랐어요. 워크숍이 있었던 9월 10일은 한창 딥페이크 이슈로 정신없이 바쁘던 와중이었는데요, 동료들이랑 이야기 나누면서 '윤석열이 너무나 괘씸하지만 정권이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거든요.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낙태죄 폐지' 이후 대안입법 마련하라고 요구했다가 경찰에 출석요구서 받았던 동료들을 떠올리면서요. 아마 다른 단체들도 비슷하겠지만, 그걸 넘어설 만큼 퇴진에 대한 상상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그런데 윤석열 퇴진이 단순히 야당과 위성정당에게 공이 몰리는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까지 같이 나눠주시는 걸 들으며 내가 너무 무디게 활동하고 있었나?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질의응답이 끝나고 조별토론 시간으로 넘어갔는데요, 저마다 자기소개를 간략히 나누고 질의응답 시간에 나눈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1) 우리의 운동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페미니즘과 노동, 노동과 기후 문제를 연결지어 사고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어느 활동가분은 "운동은 병렬적이거나 파이싸움이 아닌데, 왜 그렇게 상상될까? 억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 나타나듯이, 페미니즘과 노동, 기후 모두 서로 얽혀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하도록 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라는 말을 나눠주셨어요. 최근 저의 고민과 닿아있어서 굉장히 공감하며 들었는데요, 저는 성폭력 문제가 '법 제-개정'으로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조금 답답해져요. 필연적으로 가해자가 더 많은 돈과 지지자를 갖게 되는 현실은 법만 있으면 해결되나? 판사, 검사, 경찰 등 일선 공무원들을 교육한다고 다 해결이 되나? 노동시장에서 여성/소수자가 더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성폭력인데, 일이 벌어지고 사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처벌법이 생기는 것 말고 문제의 원인부터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되거든요.(물론 아직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2) 사회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을까?
올해 총선을 돌이켜보면, '민주당 찍고 정권 심판하자'는 말이 제일 많이 돌았던 것 같아요. 사회운동이 시작한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당시의 공을 민주당이 가져가 문재인이 당선되는 결과를 이룩하고, 지난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180석 넘게 확보하는 등 민주당이 진보세력이다, 민주당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라는 기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이 정말 이 세상을 더 좋은 사회로 만들 대안일까요? 현장에서 만나는 민주당은 "강간죄를 동의 여부로 바꿔? 말도 안 돼. 그러면 남성 유권자들이 싫어해." 라는 이유로 남성 유권자 눈치를 보고, "차별금지법? 그거 민감한 문제잖아. 사회적 합의 하고 와." 라며 교회세력 눈치를 보는 보수 세력에 가까웠어요. (국힘이 극우니까, 민주당은 보수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현실에서 사람들이 민주당에 기대를 걸고, 그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정당에는 표를 주지 않아 자력으로 국회에 입성한 진보정당이 없다는 점이 조금 서글펐습니다.
서로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구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못했는데요, '지금 우리가 당장 눈 앞의 현실을 비틀 힘은 부족할지언정, 시간의 지평을 멀리 보고 힘을 모으는 방법은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제안이 조금 위안이 되었어요. 윤석열 퇴진에 함께하면서, 윤석열이 간 자리에 또다시 민주당이 올라가는 것이 아닌, 다른 목소리들이 많이 울려퍼지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는데요, 그래서 기후정의행진의 구호를 빌려와 이야기해보면 좋겠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00말고 세상을 바꾸자! 의 00에 넣을 수 있는 수많은 단어를 이야기하며 워크숍이 끝났습니다. 조별토론 시간이 다들 너무 짧았다며 아쉬워했지만, 각자가 체감하는 현실을 나누는 자리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에서는 <가자! 체제전환 공동행동!> 이라는 이름으로 11월 9일 노동자대회까지 체제전환운동의 관점으로 여러 집회에 참여해보려고 해요.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의 활동을 지켜봐주세요!
<이 후기는 회원홍보팀 닻별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