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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반성폭력으로 읽는 사회] 반성폭력운동 활동가의 팔레스타인 연대기
  •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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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폭력운동 활동가의 팔레스타인 연대기(連帶:Solidarity記)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오랜 시간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과 연대해 왔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불법 군사점령은 현재진행형이고, 지난 2일 활동가 해초는 가자 구호선단에 올라 두 번째 항해를 시작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잊지 않고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는 왜 나가는 거야?”


낯선 질문은 아니다. 다른 의제의 집회에 나갈 때도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그럴때면 ‘서로 다른 운동처럼 보여도 결국 연결된 문제’라고 대략 설명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나 역시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익숙한 역사 서사와 미디어 프레임 속에서 팔레스타인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 7일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맥락 없이 테러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명분 있는 보복으로 설명하는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내가 섣불리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뒤늦게 연대에 합류한 만큼, 더 많은 이들을 연대의 동지로 초대하고 싶어 ‘어렵지 않게’ 칼럼 형식으로 써보려 했다. 하지만 이 중대한 이야기를 쉽고 명료하게 풀어내려니 영 쉽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완벽한 분석을 시도하기보다 반성폭력운동 활동가인 내가 왜 뒤늦게 팔레스타인 연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 써보기로 했다. 팔레스타인 연대에 막연한 거리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함께 연대로 나아가는 작은 계기가 되면 좋겠다.



저항의 정당성을 넘어, 팔레스타인 해방으로


나의 팔레스타인 연대는 완벽한 이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과 무지로 지나온 시간을 자각하면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연대의 시기를 굳이 꼽자면 지난해 9월 6일, 쏟아지는 빗속에서 열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 규탄 49차 긴급행동>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이날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덩야핑 님의 발언 중 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국제법 언어로도 팔레스타인인에게는 무장 저항을 포함한 투쟁의 권리가 보장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풀렸다.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이 정당하다는 설명을 ‘권위’ 있는 국제법이 대신해주는 것 같았다. 법이 인정한다는데,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었다. 그런데 곧 이런 질문이 따라왔다. 국제법이 인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을 덜 정당하다고 판단했을까. 처음에는 법의 판단과는 별개로,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이 왜 정당한지 설명할 나만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내 질문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나는 계속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이 ‘충분히’ 정당한지를 확인하려 했을까.


이 질문은 반성폭력운동 현장에서 익숙하게 마주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사회는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한다. 저항했는지, 바로 도움을 청했는지, 옷차림은 어땠는지. 피해가 발생한 구조와 가해의 행위보다 피해자가 충분히 피해자다웠는지를 심문한다. 나 역시 비슷한 캐묻는 위치에 놓인 것 같았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식민지배의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왜 저항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 저항의 이유가 충분한지 확인하려 했기 때문이다.


정당성과 함께 팔레스타인의 해방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만의 고민을 매듭지었다. 저항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과, 왜 팔레스타인이 해방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같은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령 저항에 대한 논쟁이 있다 하더라도(저항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것은 왜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 놓였는지, 식민지배와 점령, 민족자결권, 그리고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들이다.


이 고민을 경유하며 팔레스타인 연대를 위해 내가 더 알아가야 할 이야기와 언어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부족함은 오히려 나를 더 주저 없이 연대의 장으로 이끌었다. 



반성폭력운동 활동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성폭력 사건을 개인 간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구조는 무엇인지, 사건 이후 피해를 더 키우는 조건은 무엇인지 함께 보고 이야기한다. 이 관점으로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니 질문이 생겼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의 군사력만으로 지금의 폭력이 유지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묵인하는 국가들, 경제적 실익을 앞세워 침묵하는 정부, 불법 점령과 식민지배를 알면서도 협력을 멈추지 않는 기업들이 함께 이 구조를 떠받치고 있다.


이 상황을 성폭력 현장에서 사용하는 ‘2차 피해’라는 개념으로 그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서 2차 피해는 특정한 맥락을 가진 용어이기에 조심스럽다. 다만 법적 개념 자체보다, 왜 현장에서 2차 ‘가해’보다 2차 ‘피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하는지에 접붙여 이해해보고 싶다. 이 부분은 강의에서도 자주 받는 질문이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다른 피해를 입히거나 불이익을 주는 능동적인 행위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회피하거나, 알고도 모른 척하거나, 책임을 미루는 태도 역시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다.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행동이 아니더라도 피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있기에 ‘피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하곤 한다.


이런 시선에서 보면 2025년 7월 UN 팔레스타인 특별보고관이 한국을 언급한 이유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HD현대건설기계의 굴착기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터전을 허무는 데 쓰이고, 한국 기업들이 이스라엘에 군수 물자를 수출해왔으며, 한국석유공사가 팔레스타인의 해양 자원 접근권과도 맞닿아 있는 동지중해 해역 유전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스라엘의 불법 행위를 알면서도 제대로 제재하지 않아, 한국 기업들도 협력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이 구조 안에서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무기와 기술, 외교적 비호와 경제 협력이 지금의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면, 이것은 단순한 방조보다 더 적극적인 구조적 공모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기에 한국 역시 팔레스타인에 피해를 입히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우린 어떤 피해자에게 더 기꺼이 공감하는가: 궁금하면 모이자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에 대해 고민해봤다면,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앞서 나의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 참여를 궁금해한 사람이 있었던 반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며 나를 지지해준 사람도 있었다.


“전쟁이 발생하면 피해를 보는 건 아이들과 여성들이잖아. 전쟁 내 성폭력도 문제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여성과 아동이 전쟁 상황에서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것을 넘어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4월 이재명 대통령은 SNS를 통해 팔레스타인 아동 피해를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비판했다. 대통령이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다시 많은 이들이 분노했고, 문제가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피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우리는 왜 어떤 피해에는 더 쉽게 마음이 움직일까. 피해자가 아동이 아니라 성인 남성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분노했을까.


낯설지 않은 구조다. 반성폭력운동 역시 오랫동안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해왔다. 피해자는 무력해야 하고, 순결해야 하며, 공감 가능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기대 말이다.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피해자라하면 여성, 아동,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런 시선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책이 출간되었다.『팔레스타인이라는 존재: 완벽한 피해자』.이스라엘 점령지 예루살렘 출신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팔레스타인인이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서구가 승인하는 형태의 ‘피해자성’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팔레스타인인은 ‘피해자’ 아니면 ‘테러리스트’라는 이분법 속에 놓이고, 얼마나 무력하고 무해한 존재로 보이느냐에 따라 공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영토를 빼앗기고 가족을 잃은 분노를 드러내면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구호의 손길만 기다리는 무력한 여성과 어린이라면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저자가 말하는 ‘완벽한 피해자’란 바로 이런 것일거다.


이 책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북클럽 다불다불 5월의 도서로 선정되면서 알게 되었다. 솔직히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걸 싶다. 이 자리를 빌려 자세히 소개하고 싶지만, 글쓰기 마감이 있어 아직 다 읽지 못했다(핑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대충 훑어보고 아는 척 싣고 싶지는 않았다. 다불다불 담당팀은 게시물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완벽한 피해자’라는 자격, 반성폭력 운동과 팔레스타인 연대의 연결 찾기”, “어떤 피해자인지 묻지 않고, 가해자가 누구인지 질문하기.” 얼핏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반성폭력운동에 함께하고 싶은 동지들이라면 꽤 흥미롭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5월 27일 목요일 저녁 7시에 모이자. 피해자의 분노와 저항을 지우고 ‘순결한’ 피해자성만 요구하는 사회에 맞서, 이 질문들을 더 이어가고 우리의 언어를 만들어 나가보자. 



나가며: 우리 모두가 팔레스타인인이다


나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완벽히 알아야만 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잘 모르는 상태에 머무르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여성주의가 학문을 넘어 실천이어야 하듯, 완벽한 이해를 갖춘 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움직임 역시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두 팔레스타인인이다’라는 국제 연대 구호는 처음엔 조금 낯설었다. 내가 팔레스타인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김현미 교수는 도서『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에서 “누군가의 피해를 경청하고 감정이 움직여서 함께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욕구와 실천의 범주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운동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빌리자면, 나는 연대의 당사자로서 이 구호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침묵하지 않기로 한 사람, 연대의 실천 안으로 들어온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 구호를 연대의 당사자가 되어 함께 해방을 이야기하는 구호로 외치고 있다. 물론 연대의 과정 속에서 이 문장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날도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겔라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