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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교육

여성주의적 담론생산을 위한 연구와 반성폭력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공유합니다.
[후기]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분노를 투지로 바꿔낸 시간 - <4주 완성!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 2024-05-20
  • 289


조금 과장해서 이번 참여가 내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자기방어훈련을 계기로 몰랐던 나를 만났고, 앞으로 더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 일에 관심은 많지만 항상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후원으로 참여하는 편이다. 모임 안내 문자는 꼬박꼬박 읽지만 ‘너무 멀어서, 시간이 맞지 않아서’ 등 스스로 다양한 핑계를 만들며 참여를 미루었다. 이번에 달랐던 건 문자에서 본 문구 때문이다. ‘밤길이 두렵다가도, 분한 마음이 들 때, 여성 폭력에 맞서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란 문구이다. 여성이 밤길을 걸을 땐 지켜야 할 것이 참 많다. 이어폰 빼고, 전화는 하지 말고, 땅을 보면서 기운없이 걸으면 안 되고, 낌새가 수상하면 무슨 수라도 쓰게 폰도 손에 꼭 쥐고 걸어야 한다. 피곤한 퇴근길에 없는 힘을 끄집어내서 밤길을 걷다 보면 여성이라는 게 무슨 죄인지 화가 치민다. 분노만 하다 당할 순 없으니 무술을 배울까 생각하다 어차피 작정하고 덤비는 놈을 이길 수 있겠나 싶어 체념하다가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를 살피며 걷는다. 이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해소될까 싶어 냉큼 참가 신청을 했다. 내 목표와 기대는 크지 않았다. 한번이라도 몸을 써서 해본다는 것, 모임에 내 발로 가보는 것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4회차의 짧은 경험으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했고 어디서도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이렇게 좋은 것을 혼자 하기는 아까워서 주변에 자기방어훈련을 열심히 홍보하는데, 그때마다 내가 말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연결감과 즐거움이다. 

4회차 수업 중에 참여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다. 공통 경험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색할 것 같아 걱정했는데 말을 시작한 지 몇 분만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깨달았다. 하고 싶은 말을 바로 하고 부연설명을 안 해도 되는 건 정말 자유롭고 행복한 일이구나. 내가 이상한 습관을 가지고 있구나. 특히 내 생각과 감정을 말할 때 주변의 동의를 위해 말을 골라서 하거나 부연설명을 하는 습관을 그동안 인식조차 못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자유롭고 허용적인 공간에서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내가 나를 감추며 살았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눈치 보지 않고 나를 드러내고, 내가 가진 두려움을 말할 때 그게 왜 두려운 상황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그 안에서 편하게 말을 하는 나. 

마음이 편해지니 다른 사람의 말도 잘 들렸다. 평가나 판단, 공감해야 한다는 압박없이 온전히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기준을 세우거나 평가하지 않고 남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평생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간의 분위기,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이 가진 힘이 놀라웠다. 이런 식으로 매번 강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한 달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에 가게 하는 동기였고, 자기방어훈련이 끝난 지금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즐거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3회차에 멱살 잡힌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할 때, 멱살 C타입은 예상 외의 방법에 웃음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자기방어훈련인만큼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참았는데 그 순간에는 웃기면 웃을 수도 있지 싶어서 실컷 웃었다. 덕분에 둘씩 짝을 지어 실습할 때도 가상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보다 즐거움이 앞섰다. 짝의 손목을 힘껏 잡고, 목덜미를 잡고, 멱살도 잡고, 벗어나려고 배우는 순간에 분명 진지했는데 이상하게 즐거웠다. 지금 생각하면 편해서 그랬던 것 같다. 평생 체육시간을 싫어한 이유가 불편함이었다. 모두 같은 동작을 할 때 비교되는 것과 연습해도 늘지 않는 내가 싫었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한 마디라도 조언을 하면 더 하기 싫었다. 훈련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한 명씩 매트를 때리는 모습이 체육 시간과 꼭 닮은 모습이었는데도 설레고 재미있었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평가받지 않으니 자유로웠다. 같은 맥락에서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없이 해야 할 동작에만 집중했다. 

배운 동작으로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고 순수하게 기뻐하던 짝의 얼굴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나도 저런 표정이었을까? 남을 통해 나를 본다는 것을 글이 아닌 경험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내 목덜미를 잡고 멱살을 잡는 모습이 고마웠다. 우리는 살면서 남의 몸을 멋대로 만지거나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남의 몸을 함부로 만지고 다치게 하는 가해자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 걸까? 하는 분노가 들기도 했다. 그 분노를 좀 더 영양가 있는 투지와 기백으로 바꾸기로 했다. 내가 가해자라면 상대가 당황할수록 강해진 기분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기를 쓰면서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될 수가 없지만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과 웃으며 즐겁게 훈련한 것은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솔직히 훈련에서 배운 동작들이 완벽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 내 이야기를 듣고 내 성공을 본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딱 한번 낸 작은 용기에 비해 크고 값진 것을 얻었다.  


<이 글은 4주 완성!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참여자 유진 님께서 작성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