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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현장에서 만난 10대와 "호신프로젝트"
  • 2007-09-11
  • 3427
현장에서 만난 10대와 “호신프로젝트”
 

오매(여성주의자기방어 프로젝트 팀원)

 
 
#1 10월 X일, 군포고등학교 1-7 6교시
 
들어설 때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건 역시 EBS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나름 의심 반 기대 반 신중한 눈빛들. 나를 소개해주고 미리 약속해 둔 바대로 교실을 나가려던 30대 남자인 담임선생님을 아이들 몇 몇이 잡는다 “같이 있어요 샘!” 어리고, 정장하지 않은, 여자가 왔다는 것만으로 믿음과 애정이 생기지는 않는가 보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초짜 사이비 강사가 용기를 내 첫 마디를 건넸다. “여러분, 혹시 통금 시간 있어요?” 가이드북 소개와 함께 내가 여러분께 무엇을 구하려 왔는지 대충 여쭈었다. 그리고 시작된 우리의 야심작 Stop 상황극. 

첫 번째 상황극 지하철 성추행 편을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술 취한 척 허벅지를 더듬는 아저씨 연기를 보며 킥킥 웃음들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주인공 가람 역을 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 공격을 하든, 아무 말도 못했든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연기를 끝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모습. “여러분, 웃지 마세요” 라고 지적하자마자 좌중은 기다렸다는 듯 조용해진다. 첫 연기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Stop할 사람 없어요? 물으니 저기서 누가 척척 나온다. 더 노골적으로 연기하는 아저씨 역할에 가람 2nd는 아저씨 손을 들어 저리로 던진다. 계속 다시 오는 손을 계속 저리로 던지다 일어나 버린다. 다시 박수. 세 번째 가람은? 대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딸도 없어요?” 버럭! 관각들도 오예! 를 연발하며 흥분하기 시작. 연기자일 뿐인데 왠지 위축되어 자리로 들어가려는 아저씨 역을 다시 앉혔다. 네 번째 가람은 “에이씨!!” 크게 짜증내며 팔꿈치로 아저씨 가슴팍을 능숙하게 쳐 찌르고 일어나 째려본다.    

“왜 이러세요?” 가 아니라 “꺼져” 의 마인드를 말하며 “누가 내 엉덩이 만졌어” 대사를 연습해보자고 했더니 “어떤 개새끼가 내 엉덩이 만졌어!” 라고 애들이 정정해준다. 좋았어! 그럼 시~작! 소리들이 너무 커서, 인토네이션이 너무 리얼하고 입에 착착 감겨서 서로들 놀란다. 욕했을 때 겪었던 어려움은 없었는지 묻자 정확하게 나오는 대사들 “가정교육을 못 받았느니” “쟤는 노는 앨 거야 이런 눈초리 있잖아요” “너도 똑같구나” 이럴 때 쓸 수 있는 이중전략(때로는 만만치 않은 년, 때로는 예의바른 여학생?)을 제안해보지만 욕 연습 할 때만한 반응이 아니다. 자원 자랑하기 “우리 엄마/아빠가 누군 줄 알어?” “어디 경찰서죠? 우리 xx 바꿔주세요” 이럴 때 상당수의 꼰대들이 쫄았다는 이야기 하자 깔깔거리고 난리다. 지하철 수사대에 신고하면 다음 역에서 기다리고 있더란 얘기, 들꽃모임의 지하철 퍼포먼스 이야기 했더니 오호~ 놀라워하며 전화번호 저장하겠다고 들썩들썩. 그런데 바로 이 때! “6교시가 끝났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나만 몰랐던가! 벨을 울리자마자 “계속 해요!”를 연발하는 애들. “EBS 필요 없어요” “그냥 무시하고 해요” “화장실 안가도 되요” 최고 감동 대사를 앞에서 누군가 날렸으니 “성교육 보다 100배 낫네” -

같이 해요~ 라는 말에 보일 듯 말듯 우쭐해하며 교실을 나갔던 담임이 끝나길 밖에서 기다리다가 이 사태를 보더니 보일 듯 말 듯 똥씹은 표정. “아까는 같이 하자더니, 나쁜 것들”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나가는 담임을 보면서 이 상황을 그토록 서운해 하다니 참 순진하네,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다시 ‘호신강좌’는 간단한 공격술 소개와 실습으로 시작되었다. “머리!” “무릎팍!” “손!” “팔꿈치!” 우리 몸에 있는 돌덩이를 물었더니 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관절의 반대 방향을 쳐라, 발꿈치로 정강이를 까는 장면, 무릎팍으로 고환 올려 치는 장면, 누가 옷이나 팔을 잡았을 때 막 돌려버리는 장면 등을 해본다. 고환이라는 말에 헉, 잠깐 그런 반응이더니 삼삼오오 연습에 열기가 솟는다. 내친김에 경애도장(“청소녀를 위한 으랏차차 호신가이드” 23쪽, 한국성폭력상담소, 2004.12 )에서 간단하게 배웠던 칼 든 공격자 대응법을 능숙하게 아는 척 소개한다. 단서가 많이 붙어야 할 내용이지만 칼을 든 상대라도 왼손 오른손 위 아래 척척 가로 막아지는 걸, 가로 막고선 다른 주먹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걸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일단 터져 나오는 탄성과 놀라움을 감격에 겨워 잠시 즐긴 후, 섣부른 공격이 위험한 상황에 대해 말한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왜 ‘저항’하려 하나요?(저항하라고 하나요?) 순결을 잃느니 죽고 싶은 건가요?(순결을 잃느니 죽으라는 건가요?)“ 좌중이 다시 진지해지며 무엇을 방어하려 하는가, ‘나’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이런 물음과 명제를 무겁게 음미하고 되새긴다.   

두 번째 바바리맨과 세 번째 남자교사들의 헛소리 편은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진행되었다. 아니, 사실은 ‘진행’되지 못하고 마구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서로 듣기에 정신없었다. 너가 그런 일을 겪었다니, 아니 너도 그랬다니, 걔 진짜 재수 없지!, 우와 정말 니가 그렇게 대단한 앤 줄 몰랐어, 우린 어쩜 다 똑같니, 이 동네는 이 세상은 왜 이 지랄이니 젠장! 두 시간 동안 한 사람도 졸지 않고 눈 깜빡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뚫어져라 서로에게 집중하는 놀라운 광경. ‘웃지 마세요!’라고 말했던 내가 순간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을 때도(“그 새끼가 그게요, 그거 있잖아요! 제대로 섰어요, 어우씨” 이런 대사들) 애들은 너무나 진지하게 미간을 좁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하고 지지했다. “처음 봤어요”와  “무조건 무서워요”는 다르다는 것, 우스꽝스런 남자들의 노출, 살덩어리에 불과한 남자 성기가 왜 무기가 되었는가, 얘기를 하면서 우리는 다시 왁자지껄 담에 다시 나타나기만 하면 어떻게 해줄지 연습하느라 바빠진다. “쓰읍” “어허 작구나” “누나가 이런 거 하지 말랬지! 집에 얼른 들어가라, 응?” 폰카로 찍기(찍는 척 하기) 등등 파출소에 전화 신고로 마무리하는 거 잊지 말고! 교실에 휴지만 봐도 경기 하면서 “여고생에 대한 자기의 환상을 깨지 말라”고 매일 헛소리하는 생물 선생 얘기는 거의 합창수준이다. 이미 당사자는 교실 뒷면 게시판 선생들 사진에서 검은 아크릴칠을 당했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재발방지’가 불투명한 고로 - 출석부를 펼치면 어느 날 “여고생들 드림, 존경하는 선생님께” 쪽지와 함께 썩은 냄새 양말 몇 개와 35개의 코딱지 선물세트를 드리는 게 어떨지 마구 자지러지면서 작당한다. 그런 유치뽕짝은 ‘대처법’ 까지도 필요없다!

정말 두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가고 헤어져야 할 시간. 가장 실감난 무용담을 들려주었던 세 분에게 상담소에서 마련해 간 명품 다이어리 Song of Healing 을 증정하고 상담소 홈페이지와 메일주소를 칠판에 적었다. 감사합니다! 군포고등학교 1학년 7반 여러분 Thanks to 책에 꼭 올릴게요! 감동의 환호를 받고 인사하고 나오는 길, 책상들 제자리로 옮기며 집에 갈 짐을 꾸리는 쉬는 시간 번잡모드 사이로 교탁에 올려둔 상담소 브로셔를 구경하러 나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몰래 밖에 서서 봤지롱, 나는 말야 -- 발걸음이 안 떨어지고  하루 종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성교육보다 100배 낫네~” 

몇 가지 성지식, 그것도 남녀의 2차 성징과 임신작용을 위주로(피임지식도 있다)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성교육은 10대의 섹슈얼리티의 다양한 맥락과 환경을 건드리지 못한다. 10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더욱 무력하다. 깨끗한 몸, 안전한 몸, 보호되어야 할 몸을 강조하는데 어느 현실에서 10대 여성의 몸이 그렇게 존재하는가? 문제 현실을 강조해 마지 않는 그들이 내놓는 방법들, 현실로부터 ‘몸’ 을 격리시키거나(이 시간에 어딜 나가!) 무지하면 된다고 하는데(어린 여자애가 이런 거나 보고!)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현실을 살아가는, 몸 인격 관계 사회의 총체적 구성물인 10대 여성은 교과서에 나오는 난소그림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성’과 온갖 맥락의 성적 환경 혹은 공격과 그 사이에서 반응하는 살아있는 자신, 그 모두를 너무 잘 알고 있다. No라고 말해라! 라고 간단히 주문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가 많다는 것도(권김현영은 No라고 말하라는 것을 넘어서, 가해자를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지, 어떤 무기를 가질 수 있는지 알려주는 자신감 교육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성폭력 예방교육은 남자애들이 받아야 할 것이고! “성폭력의 사회문화적 구조와 성각본”, 늘푸른여성지원센터 여성학 강좌, 2004). 우리가 진행하는 ‘호신프로젝트’는 무지한 여성이 죽을 힘 다해 반항하자는 게 아니라, ‘그들’을 빤히 잘 알고 있는, 더한 것도 다 받아줄 수 있는 여자들이, 10대들이 그들을 우스워하고 공격하고 혼내주자는 프로젝트다. 경험담은 쏟아져 나왔고 우리들의 모의작당과 시뮬레이션은 적어도 성교육보다 훨씬 더 현실에 가 닿았을 것 같다.
 

“상담소 어디에요? 제가 갈게요! 저 상담 잘해요!!”

 
우리를 건물 밖까지 배웅하러 나왔던 한 사람이 저런 말을 던져 왔다. 우리 상담소에 또래 상담 프로그램은 없다는 사실이 몹시 아쉬웠던 순간. 그 장면을 보던 그 담임이 넌지시 속닥였다. 가출을 자주해 많이 속 썩이던 녀석이라고. 위기와 일상을 넘나드는 사람들은 위기 감지 능력과 대처하는 힘이 뛰어나다. 물리적인 힘과 마음속의 힘 모두. 그리고 자신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 명확히 생각하는 것 같다.(지난 목요일 여성플라자에서 10분간 상영된 “10대 여성보고서”(늘푸른여성지원센터 제작)에서 여의도에 나와 오빠들을 헌팅하여 오토바이를 타는 어떤 10대 여성의 말, “한번쯤 줄 생각하고 나오는 거죠. 그래도 그게 학교나 집에 있는 것 보다 훨씬 좋으니까” 누가 이 사람을 공격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힘은 날 때부터 생겨난 기질만은 아니다. 경험이 많아질수록 무용담도 쌓이는 원리가 있다고 할까. 소위 위기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별로 없는 내가 그 모든 애들 앞에서, 생존자이자 이제 스위치만 켜면 무기 그 자체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서 쫄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에너지가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북돋웠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지지와 공감, 다른 말들의 장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자기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그걸 서로 펼쳐 그 속에 든 상처와 아픔, 분노를 꺼내놓는 자리는 그들에게도 많이 낯설었던 것 같다. 학교마다 반마다 꼭 있는 ‘무서운’ 언니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멋진 무용담을 하나씩 꺼내놓으며 그야말로 ‘일진’의 자리에 올랐다. 하루에 하나씩 저 ‘언니들’에게 욕 배우고 연습하자는 말에 정말 깔깔대며 으쓱해하던 모습! 여성주의의 힘과 10대의 경험과 무기가 만나는 장면은 엄청난 파괴력을 상상하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모두에게 존재하는 현실의 경험, 그것을 지지하는 힘, 함께 반격을 준비하는 것, 게다가 왁자지껄 난리법적 자지러지던 그 신나는 분위기에 하루 종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건 절대 오바가 아니다!

가이드북? 책으로 그 모든 아우라를 전달 할 수 있을까? 애들이 겨울방학 근처에 책을 받아들고 쓰윽~ 보고 책상에 버리는(버린 책을 부모가 주워서 보고 청보위에 전화하는 상상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 상상만 하면 머리를 뽑고 싶어진다. 안타까워서. 내년엔 정말 누구의 말마따나 캠프든 강좌든 기획해서 전국투어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성주의자 투사들이 서울, 대학, 여성학, 중심으로 재생산되는 안타까운 문제를 떠올려 볼 때도 뭔가 엄청난 기획이 되지 않을까? 이건 오바인가.  
   
 
변화하는 여성들, 변화하는 세상

얼마 전 상우고등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요즘까지도 그 날의 호신강좌가 화제란다. 뭐 강동원 언니나 박진영 따위가 아직까지 화제이겠는가. 물어보니 그 날 같이 참여했던 담임(상우고등학교에서는 여자 담임이 함께했다)이 다른 반 수업에 가서도 강좌를 새끼 쳤고 요즘엔 피드백으로 흥분의 도가니라고. “바바리맨요! 진짜 도망갔어요! 우와우와” 호신팀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 날 다 못한 상황극들을 선생님께 부탁한다. 사이버에서의 성적 공격, 친척 남자들,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우리는 어제 회의에서 친족으로부터의 성적 공격을 한 장으로 만들기로 했다. 점점 책이 위험해진다. 아니 책이 점점 현실에 맞닿아 간다.
싸우는 영혼, 우리는 세상도 바꿀 수 있다.          
   
 
*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2004년 11월 월례포럼 발제문입니다. 퍼가실 때는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