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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상담소 운동과 여성들의 임파워먼트 훈련
  • 2007-09-11
  • 3426

1월 상담소 월례포럼 발제
상담소 운동과 여성들의 임파워먼트 훈련

 
 

오매(걸파워훈련팀원 / 부설 연구소 간사)

 

좀 더 많은 여성들, 고개를 수그리고 골똘히 고민에 잠겨있고, 고개를 멀리 향하고 힘차게 걷고 있으며, 작게 움츠러있거나 쿵쿵쿵 뛰어다니고,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거나 창창한 머리결을 휘날리며 웃거나... 온통 제각각인채 서고 걷고 뛰고 앉아 있지만 거미줄로 온통 지그시 혹은 강렬하게으로 연결된 여자들. 그 나와 너의 연결을 누구보다 믿으며 그것을 의심없이 인식한 채 혹은 의심없이 인식하지 않은 채,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방식과 색깔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살아가는 여자들. 따로 또 같이 강하게 나아가는 여자들. 여자들의 세상. 그 보이지 않는 비밀의 공동체. 네트워크.

지난 한 해 일하면서 때때로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좀 더 많은 여성들의 비밀결사. 암묵적인 한번의 눈짓으로 짠 발길질만 할 뿐이면 세상이 어처구니 없게 뒤집혀질, 온 세상에서 조직되어 있는 여성들의 비밀결사.
 
한국성폭력상담소, 나의 일터에서 2년째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프로그램 사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받았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은 성폭력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덧씌우는 것이 아닌가? 호신 프로그램은 몸 싸움에서 성공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진 여성들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성폭력 상담소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호신 프로그램을 왜 운영하나? 그 시간에 성폭력 문화 바꾸기, (남성 대상의) 가해자 되지 않기 운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가해자들의 폭력적인 방식을 답습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구체적인 자기방어훈련을 경험하고 나는 희한하게도 다른 시작점에서 답, 혹은 동문서답을 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2005 걸파워훈련의 경험은 그렇게 생각만 해도 웃음을 흘리고 멍하니 다른 상상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여성들이 강해지는 과정은, 공격에 대한 대응력이 높아지고 방어력(=공격력)이 증대되는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물론 자기방어훈련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과정이 아니다. 호신술 열풍이 불고 어린 딸 태권도장에 아니 보내는 부모가 없다지만 나에 대한 공격자를 현실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하고(“바로 너나 잘하세요”), 생리, 가슴, 2차 성징, 결혼적령기, 가임기 등 그들의 기대나 걱정과 전혀 무관하게 자신의 몸 만들기 일정표를 짜고 어깨와 팔뚝, 허벅지 근육이 실팍하게 성장하는 과정까지를 스스로 간절히 욕망하거나 주변의 잔소리를 헤치고 관철해나가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자기방어훈련은 더욱 미묘하고 단순하지 않은 과정으로 펼쳐진다.
 
걸파워겨울캠프 둘째날은 바로 이 과정을 경험한, 매우 의미심장한 날이었다. 빅 매치와 자기방어 몸-훈련 프로그램의 6시간. 빅 매치는 승부욕, 대결하는 기운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공격하고 방어하는 법, 더 정확히 공격하고 더 잘 방어하는 법, 더 여러 가지로 공격하고 더 다양하게 방어하는 법을 연습한 자기방어 몸-훈련 4시간. 가해자가 되고 공격받는 이가 되어 상황을 상상하면서 너와 내가 붙어 반복하여 연습한다. 4시간동안 조금씩 지쳐가지만 아무도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게 공격과 방어술은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고 코치는 계속 악다구니를 돋구고 지치고 허기진 시간에 시작된 겨루기.

진짜 때리고 맞는 1분 30초 싸움의 시간은 무척 길게 느껴졌는데 보는 이들은 조심스럽고 긴장되었고 싸우는 그녀들의 공간은 이글거렸고 후끈거렸다. 한 사람은 결국 나가버렸고 몇 사람은 맞은 이후 오랫동안 웃음을 거두었고 몇 사람은 때린 이후 어딘가 불편해했다. 모두가 파이터가 되었던 겨루기의 시간이 끝나고 온갖 감정들이 저녁식사시간의 틈새에 조금씩 터져들어오기 시작했다. 긴급 회의, 우리는 프로그램을 바꾸어 오묘한 이야기의 장을 펼쳤다. 왜 이런 폭력적인 방법을 써야 하나? 가해자였던 그들이 생각난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 싸움을 시작할 수 없었다, 마음의 크기는 커지지만 몸의 크기는 커지지 않지 않나, 누군가를 제압하는 것도 제압당하는 것도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이 싸움이 우리들에게 준 것은 복잡미묘한 불편함이었나?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불편함을 관통하며 겨루기는 완수되었고 이글거리던 눈빛은 기대와 설레임을 담은 눈으로 모두를 향해 있었다. 불편함을 지나쳐 가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였다. 역설적이게도 모두의 후기에서 발설된 말은 바로 ‘나’ 였다. 내게 두려움이 많구나.. 내가 생각보다 힘이 있구나.. 내가 생각보다 힘이 없구나.. 내가 저 사람을 얕잡아보고 있구나.. 나에게 예전 경험은 더이상 장애가 되지 않았구나.. 내가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싶어하는 구나.. 더 미묘한 마음에 대해서 보고 있는 내가 있다. 나에게 상처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구나.. 내 머리는 그 공격자를 무시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힘들구나..  

나에 대해 알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힘들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되면 대처방법은, 선택지는 천가지가 될 수 있다. 나만이 구사할 수 있는 ‘술’이 탄생할 수 있다. 이것은 자기방어의 진정한 업그레이드인데 책을 뒤져봐도 나오지 않지만 나에게 꼭 맞고 변형, 응용법도 내장되어 있는 ‘술’이다.

우리가 함께 참여한 자기방어훈련은 이 업그레이드의 전단계가 되어 주었다. 나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는 것, 나에 대해 알게 되는 것, 나에 대해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 몸과 내가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우리가 한 짓은 정말 계획에도 없었고 예상에도 없었다. 바셀린 미친년 놀이를 어느 기획자가 기획할 수 있었을까. 몸은 어느새 다음 단계의 업그레이드로 치닿고 있었다. 몸-나는 쾌락을 기획하고 있다. 예쁘고 곱게 분장하라고 팔아제끼는 화장품을 풀어다 얼굴에 오즈의 마법사 시계를 칠했다. 섹시하거나 정갈한 손톱을 만들라고 팔고 계시던 메니큐어를 섞고 엮어 퀼트 작품을 만들었다. 털 하나 없는 매끈한 다리를 예시로 보여주는 광고의 주인공 바셀린을 아 글쎄 머리마다 듬뿍 짜서 발라 광란의 가위손 헤어쇼를 펼쳤으니! 아니 이 사람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인간들인가. 아니 이 여자들이 어디 조신한 교복청소녀고 어디가 입술을 앙다무는 은장도인가.

몸은 차근차근 하나만 배우지 않았다. 방어를 배우면 공격을, 공격을 놀이로 유희로 변주하고, 대결을 배우면 상대와 싸우고 또 붙고 만지고 헝클어뜨리고 나를 던지고 변신하고 깔깔 웃게 만든다.

이것을 10대 캠프의 특성으로 파악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몸과 만나 시작되는 업그레이드 과정이다.
자기방어훈련을 자기방어훈련으로 부르는 것이 한계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것이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폭력’ 혹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라는 정치적인 답변을 담은 용어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작업은, 우리의 프로젝트는 시작과 동시에 ‘방어’에서 멈출 수 없기 떄문이다. 자기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고, 나에게 무엇이 폭력이고 상처이고 취약점인지 알고, 따라서 기존의 ‘술’ 로 담아낼 수 없는 혹은, 기본적인 자기방어훈련이 주는 물리적인 반격능력의 틈새를 각자의 ‘술’로 메우게 되고, 놀이와 즐거움을 기획하게 된 몸은 ‘방어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로 가둘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된다. 방어에 성공하게 되는 것은 수많은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담소에서, 혹은 반성폭력 운동단체에서 자기방어훈련을 왜 열어야 하는가? 왜 여기에 시간과 자원을 들여야 하는가? 성폭력 이슈를 다루는 단체, 혹은 운동모임은 양 날의 검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대중적인 지지를 쉽게 모을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시혜와 동정, 혹은 성폭력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성찰없는 남성중심적인 시선에 기반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성폭력 피해자의 법적인 지위는 꾸준히 개선되어 오고 법적인 정책적인 차원에서 꾸준한 이슈로 다뤄져 오고 있지만 여성들에게 어떤 내용의 권력을, 어떤 형태의 힘을 주었는가? 성찰해볼 문제가 많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폭력상담소는 무수한 개개인의 피해자 여성들과 만나고 사건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조직사업 보다는 법, 제도를 움직이고 입안하고 문화를 움직이는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성폭력 피해를, 피해자를 공공서비스에서 지원하고 공공정책에서 통계 내고 포섭하는 흐름이 점점 노골화되는 가운데서 상담소가 정말 챙겨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운동이 챙겨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구체적인 여성들의 임파워먼트. 구체적인 여성들의 성장과, 다양하게 움직이고 틀을 넘나들게 되는 것. 인식을 확장하는 것, 운신의 폭을 넓히는 것, 다른 세계로 가는 것.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은 위와 같은 과정을 수반하는 것임을, 그 모든 변이와 변주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한 나는, 이것이 여성주의 임파워먼트의 매우 중요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으며 상담소에서 만나는 구체적인 여성들과, 상담소라는 여성주의 운동의 한 베이스에서 만나게 되는 구체적인 여성들과 함께 다른 세계로 가는 이런 시공간은 계속 기획되고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다. 명칭의 문제. 처음 ‘호신’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몸을 지킨다’는 말의 어조가 기존의 순결주의의 주장과 흡사하여 사용을 저어하게 되었고, 다음으로 사용하게 된 자기방어훈련. self-defense의 번역어이자 방어의 목적어가 ‘몸’에서 ‘자신’으로 변화하였으며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훈련’을 꼭꼭 붙여 썼다. 그리고 앞에 붙이는 ‘여성주의’ 그래서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2005년에는 걸파워훈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방어를 넘어서는 임파워먼트의 뜻으로 파워를 썼는데 파워 앞에 붙일 다른 말을 찾다 실패하여 ‘걸’을 붙였는데 10대 대상으로만 진행되는 사업이라는 의도하지 않던 혐의를 강화한 꼴이 되었다. 2006년에는 움파워 훈련이라는 가칭의 제목이 제안되었다. 같이 고민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구체적인 대상 연령을 다양화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이 연령을 불문하는 기조이고 프로그램이지만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연령대마다 여성들의 경험이 다르고 임파워먼트를 요하는 지점, 임파워먼트가 잘 되어 있는 지점, 잘 되어 있다고 생각되지만 다시 돌아보고 벗어던질 필요가 있는 지점 등이 다를 것이다.
 
 *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2006년 1월 월례포럼 발제문입니다. 퍼가실 때는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