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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그 6시간이 그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 2007-09-11
  • 3266
 

한국성폭력상담소 월례포럼

 

그 6시간이 그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편린 

천천중학교 체육교사

2005 걸파워캠프 ‘빅매치, 자기방어 몸 훈련’ 진행자

 





Ⅰ. 들어가는 말 ------------------------------------------ 1

  < 쏘-녀, 몸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 1


Ⅱ. 빅매치 ----------------------------------------------- 2

  1. 빅매치, 운동장을 달리다. --------------------------------- 2

  2. 티볼, 방망이를 휘두르다, 몸을 알 것 같다. -------------------- 2

  3. 우리 팀, 달린다,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 ---------------------- 3

  4. 배구, 좁은공간, 힘을 모아 공을 넘기라. ---------------------- 3

  5. 축구, 공간을 차지하다, 몸이 커지다. -------------------- ---- 3


Ⅲ. 자기방어 몸 훈련 --------------------------------------- 4

  1. 힘을 분출하다. ----------------------------------------- 4

  2. 몸이 분절되다. 객관적으로 나를 느껴보다. --------------------- 6

  3. 급소를 찾아내다, 보는 눈이 생겨나다. ------------------------ 6

  4. 공격과 방어 ------------------------------------------- 7


Ⅳ. 나오는 말 --------------------------------------------- 9

 
 


Ⅰ. 들어가는 말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좋을 것인가? 우리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놓여있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교육의 주체로서, 호신가이드를 출판하고, 주말도장을 운영해온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05 걸파워 캠프’를 열며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에 새로운 방식으로 열의와 투지를 쏟았다. 나는 키라의 소개로  ‘2005 걸파워 캠프’의 둘째 날 프로그램인 “빅 매치”와 “자기방어 몸 훈련1, 2”의 주진행자를 맡아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고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프로젝트팀의 그동안의 행보와 캠프의도를 파악하고, 캠프 참가자들이 몸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나는 고교시절 우연히 호신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확한 명칭은 합기도로, 반(伴)국민 격투종목인 흔한 ‘태권도’보다 훨씬 격렬하고 다양한 기술들을 배울 수 있어서 선택했었고 고1부터 고3 중반까지, 낮에는 착실한 여고생으로 밤에는 격투를 즐기는 훈련미치광이로 살았었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한동안 푹 빠져서 보냈던 여고시절의 호신술들이 떠올라 개인적으로는 다시 손끝 발끝으로 뻗치는 짜릿짜릿한 격투의 흥분, 격렬하고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느껴져 회춘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경험들(훈련방법)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는 쏘녀들을 위한 자기방어 몸 훈련을 준비할 수 없었다. 과거에 내가 훈련했던 과정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자세히 풀어서 살펴봐야 했으며, 그런 경험들이 현재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몸의 움직임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지와 같은 것들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2006년을 계획하는 시점에 이르러 지난 ‘2005 걸파워 캠프’의 ‘빅매치’와 ‘자기방어 몸 훈련’을 통해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쏘녀들과 함께 달리고, 뒹굴며, 소리쳤던 시간을 정리해보고, 여성이 몸을 움직인다는 것과 그것이 생산해내는 변화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 쏘-녀, 몸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캠프에 쏘녀들이 모였다. 주말도장에서 이미 자기방어 훈련을 경험한 쏘녀, 주말도장에 가보진 않았어도 잠재된 자신의 힘과 에너지를 느끼고 표출해보고 싶은 쏘녀들이 산 좋고 물 맑은 춘천에 모였다. 그리고 3일간의 캠프를 통해 자기방어 몸 훈련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엄선하여 배열된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경험있는 노련한 진행자들이 담당한 프로그램들은 그 의도와 목표가 분명했다. 상대적으로 6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맡게 된 나는 “빅매치”와 “자기방어 몸 훈련”이 캠프의 전체적인 의도와 기대에 부족하지는 않을까 심히 걱정했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몸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움직이고, 함께 부딪치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몸은 저마다 알아서 자기의 방식으로 알맞게 소통하기 시작했다. 나의 개인적인 부족함을 프로그램을 함께 했던 쏘녀들이 자기의 목소리로, 자신의 움직임으로 힘을 분출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알아서 채워나갔다. 새삼스럽게 몸을 통해 자신을 알고,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이 신기했다.



Ⅱ. 빅매치


1. 빅매치, 운동장을 달리다.

 둘째 날의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겨울 운동장을 달릴 것이다. 여자들에겐 그저 축구 잘하는 남자를, 빠르게 달리는 남자를, 현란하게 드리블하는 남자를 창가에 서서 구경하는 것만이 허용되는 남자들의 전용 공간이었던 운동장에서 이제 쏘녀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눈이 쌓여 미끄럽기까지 한 공간에서 쏘녀들은 공을 차고, 던지고, 눈을 던지며 어느새 몸을 가볍게 느끼고 있다. 여전히 숨을 쉴 때마다 헉헉 입김이 나지만, 손끝 발끝으로 힘과 감각이 빠르게 전달되는 걸 보니 다들 몸이 살짝 달아올랐다.

 20명의 쏘녀들은 이제 팀을 나누고, 구호를 정하여, 서로 모여 어깨동무를 하고서는 힘차게 구호를 외쳐본다. 구호를 외치며 우리 팀은 이제 한 몸처럼 움직이며, 팀원들을 내 몸같이 친밀하게 대하겠다고 생각해본다.

 몸을 가볍게 움직여보고, 구호도 외치고,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공간이 모두 나의 발아래 있는 좁은 공간처럼 느껴진다. 넓은 운동장을 차지해서 달리는 데에 아직 익숙하지는 않아도 운동장을 점유하는 건 신나고 가슴 벅찬 일이다.


 2. 티볼, 방망이를 휘두르다. 몸을 알 것 같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뛸 수 있는 몸과 휘두를 수 있는 방망이 하나. 야구에서처럼 투수가 공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냥 스탠드 위에 올라앉은 공을 방망이로 쳐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운동장과 같이 큰 공간을 달리는 게 영 낯선 행위인 것처럼 1미터 길이의 방망이를 휘두르는 행위 역시 익숙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움직임을 통해 만끽하는 즐거움과 기쁨이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허공에 대고 붕붕 방망이를 휘둘러본다.

 어깨너비로 양발을 넓히고 무릎을 살짝 구부려 엉거주춤하게 서서, 방망이를 꼭 부여잡는다. 어디선가 봤던 자세다. 이제 안에서 바깥으로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부~웅. 휘두르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나는

 “그래, 이렇게 휘두르면 되는 거구나!”

 “나의 움직임을 보고 우리 팀이 환호를 보내는구나!”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구나. 나는 잘 한거구나!”

 “이렇게 한 번 더 휘둘러보면 진짜 공을 더 잘 쳐낼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이걸 할 줄 아는 애구나!”

 “내 몸은 이렇게 움직여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이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많은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나는 이제 뭔가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움직임을 하는 것, 허용된 공간 안에서 만큼은 어떤 자세로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나의 기대와 각오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마저 내 몸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것. 짧지만 방망이를 몇 번 휘둘러봄으로써 나는 이제 뭔가를 알게 되었다. 역시, 움직임을 통해 깨닫는 앎의 즐거움은 너무나 유쾌하고 즐거우며,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움직임과 기쁨의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흥분을 감출 수 없다.


 3. 우리 팀, 달린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쳐내면 달려야 한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베이스를 밟은 뒤 홈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 팀은 득점을 하고 상대팀을 이길 수 있으며, 설사 내가 득점을 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득점을 돕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달려야 한다.

 이제 나 홀로 운동장의 베이스 사이를 달린다 하더라도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내가 뛰는 동안 나의 시선과 동일하게 움직이며 마음으로 나와 함께 달리는 우리 팀과 팀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여도 공을 쳐낼 수 있고, 운동장을 마음껏 달리고 싶고, 빠르게 달리고 싶고, 우리 팀이 있는 홈으로 돌아오고 싶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속에 존재한다. 내가 아주 커지는 것 같다.


 4. 배구, 좁은 공간, 힘을 모아 공을 넘기라.

 이제 대형 짐 볼(스트레칭용 대형 탱탱공)을 튕기어 네트 너머로 보내야 한다. 세상에 이렇게 큰 공은 처음 봤다. 이 공으로 배구를 하라니. 하지만 공이 공기로 가득차있어서 무겁지만은 않기 때문에 팔로 쳐 올릴 수는 있겠다. 하지만, 팀원과의 거리가 채 2미터가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대형 공을 패스하고, 결국 네트 너머로 공을 쳐 보내야 한다니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 때문에, 실망하고 기운도 빠진고 이제 슬슬 재미가 없어진다. 도전해서 쉽게 될 것 같지 않은 것들은 재미없다. 내가 재미없어 했더니, 내 옆의 팀원들도 하나둘씩 재미없어진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큰 공이 공중으로 튀어 오를 것 같지도 않고, 네트너머로 넘어갈 것 같지도 않다. 그만두었으면 한다.

 운동장을 달리고, 방망이를 휘두를 때에는 알 수 있을 거 같았던 내 몸인데, 환경이 변한 지금의 상태에서는 내 몸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의기소침해지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몸의 경험과 훈련 없이는 바뀐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움직임을 해내는 것이 어려워서 결국 몸이 의지대로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더 작은 공으로 배구를 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5. 축구, 공간을 차지하다, 몸이 커지다.

 사방이 높이 3미터의 벽으로 막혀 있는 20평 남짓한 공간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공은 벽과 부딪치면 다시 안으로 들어오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쏘녀들의 움직임은 더욱 분주해진다. 그리고 공을 소유하기 위해 빠르게 방향을 전환하고, 신속하게 판단해야 한다.

 나와 쏘녀들. 한국사회의 여자들은 스포츠를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 학교체육을 통해서 경험해 본 것들은 피구, 발야구 정도로 한정되어 있고, 학교 체육 시간 외에 운동장을 뛰었던 경험이 별로 없는 나와 쏘녀들에게 축구는 가깝지만 먼 당신이다.

 ‘남자 셋만 모이면 축구를 한다’는 우스개 소리처럼 남자들은 골목에서 운동장에서 어디에서든 공을 가지고 논다. 공 하나로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이며 공간을 점유하며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행위를 생각해보면, 축구는 너무나 쉽고 단순한 놀이다. 공 하나를 목표로 한 골대에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쉽고 즐거울 수 있는 행위인가? 공은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공간 역시 그러한데, 남자들은 쉽게 축구를 할 수 있고, 여자들은 그를 위해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한다는 것 얼마나 불공평한가?

 대부분의 남자들은 축구공과 농구공을 하나쯤은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여자들은 함께 축구할 사람을 모으고, 왜 우리가 축구를 해야 하는지 설득하고, 공감하고, 공을 마련하고, 남자들이 우글대는 공간에 쭈삣쭈삣 몸을 들이밀고 기죽지 않게 해야 되고, 여자라서 못한다는 소리 들을까봐 더 열심히 해야 하고, 근데 생각만큼 몸은 안 움직여지고...

 

 어쨌든, 이런 생각으로 시작된 축구였다. 말랑말랑한 공을 차보고 그 공을 따라 뛰며 공간을 차지하는 경험은 예상대로. 그리고 예상 외로 너무 재미있었다.

 우선 밖이라는 공간이 없으므로 아무데나 공을 찰 수 있고, 딱딱하지 않아서 부담 없이 세게 혹은 약하게 찰 수 있고, 축구를 직접 경험정도가 비슷하여 일방적이지 않아 더욱 박진감 넘치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과 흥분의 상태로 공을 마구 차다보니, 공은 쉴새없이 움직이는 데, 목표로 한 골대에 가까워지지가 않고, 같은 팀원이 6명이나 되는데 ‘팀웍’이라는 협동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분위기 전환과 흥분의 수위가 가라앉기를 기대하며 게임에 참여하여 공의 움직임 속도를 늦추었다. 쉴새없이 돌아가는 눈을 잠시 멈추고, 공간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도록 공을 소유하여 게임을 정지 시킨 뒤, 쏘녀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눈을 맞추었다. 공만 소유하려들면 너무나 여유 없이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공간을 점유하라고 외친 뒤 다시 게임을 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