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말하기' 운동
‘말하기’ 운동
자주(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면 여성들의 작은 수다판이 벌어진다. ‘수다’라는 말이 다소 경박스러워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여성들의 거침없는 수다가 너와 나,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의 시작이란 것을 보았다. 일상을 나누는 말하기가 운동이 되다니, 이건 무슨 일일까?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성폭력 피해를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얘기하지만 동시에 침묵을 상상한다. 우리사회에서 성폭력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듯 한 이 말은 한편으로는 성폭력의 고통을 절대화시킴으로 다시금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침묵하지 않는 여성에게 인색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말할 수 없음’은 피해자의 고통을 설명하는 수사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성폭력 각본을 완성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남부끄러우니 어디 가서 얘기하고 다니지 마라’는 충고, ‘그 시간에 왜 거기 있었느냐’는 비난, ‘그게 무슨 성폭력이냐’는 비아냥거림, ‘얼마나 절망스러울까’라는 밑도 끝도 없는 동정과 걱정의 시선들…. 여성들은 말할 수 없거나 혹은 말하더라도 의심할 나위 없는 피해자로서,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였는지를 고통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는 집요하고도 견고해서 여성들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피해자의 모습일 때에야 비로소 여성들의 언어를 허락하고 성폭력 경험을 승인, 보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도,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가도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그와 같은 방식이 자신의 경험을 인정받고 설득시키기에 여전히 유용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 그것이 무엇이든 쉽게 놓아버리기 힘들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이야기해달라는 언론 기자의 뻔한 질문을 단칼에 자르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고통을 이야기하는 피해자들이 많이 있기도 하거니와, 기존의 관습이 피해자로 하여금 어떤 감성에 기대서라도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고 설득하고 싶은 열망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성들의 목소리는 삭제된 채 성폭력에 대한 통념이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폭력에 대한 성찰과 인식 향상을 기대하리란 힘들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성폭력 사건들, 아동 성폭력이나 연쇄 성폭력에 대해서는 발끈하면서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폭력에는 둔감한 것은 그들에게 성폭력은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일 뿐, 나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성폭력에 분노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성폭력과 거리가 멀고 저 여성은 성폭력 피해자답지 않으며 저 여성의 경험은 성폭력 피해의 고통과는 다르다.”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만한 통념과 유일한 잣대는 이미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과 싸움 속에서 균열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 있는가. 이미 여성들은 그 고정관념에 저항하여 차이, 다양한 감정과 맥락들을 살고 있다. 말하기는 바로 그 존재를 드러내며 세상에 의미를 던지는 행위이다. 가부장적 통념이 제시한 선택지, 침묵 혹은 그들이 요구하는 ‘피해자되기’가 아니라 과감히 그 구도를 깨고 나와 그 구조 자체를 문제제기 하고 역전시키는, 말하기 운동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여성들의 ‘작은 말하기’의 장에서 나는 그 운동의 현장을 목격한다. 자신의 경험을 검열하는 미심쩍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여성들이 얼마나 자신만만한 발화의 주체가 되는지, 여성들의 경험이 어떻게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때로는 차이를 드러내는지, 각자의 자기 경험들이 어떻게 성폭력과 만나고 만나지 않는지를 나누다 보면 굳이 ‘성폭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필요 없거나 거추장스러워지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오는 여성들은 자신을 성폭력피해생존자로 명명하건, 아니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이의 경험을 타자화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하고 나눌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말하기가 가진 운동의 힘을 알고 있다. 17년 전, 상담 전화 한 대로부터 시작된 여성들의 말하기는 우리 사회에 숨겨져 있던 성폭력의 문제들을 건드리고 드러내 주었다. 이제는 침묵을 깨는 것을 넘어, 기존 질서의 말하기 법칙을 벗어나, 낯선 화법으로 기존의 질서에 도전해야 한다.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들만이 성폭력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구성하고 가부장적 남성 질서에 균열낼 수 있다.
상상이 가는가. 성폭력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무겁지만은 않다는 것이, 우리는 때로는 웃고 떠들며 신나한다는 것이 말이다. 오랜 시간 혼자 감내해 왔던 서글픔에 목이 메이면서도 말문을 여는 순간 이미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해방감이,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서도 다른 사람의 가해자를 혼내주고 복수하는 얘기에 금새 환해질 수 있는 위로가, 다른 사람의 말하기를 기다려주고 침묵을 인내하는 배려심이, 그 곳에 가면 있다. 4월 30일, 2008년의 두 번째 작은 말하기, 우리의 말하기가 소통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그 현장을 나는 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 49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