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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낙태권, 가부장제 국가와 싸워라
  • 2008-10-10
  • 6434
낙태권, 가부장제 국가와 싸워라


본 상담소 부소장 이윤상

 
수정란, 배아, 태아. 이들의 생명권. 이것은 낙태시술을 받고자 하는 여성의 권리와 늘 대치되는 것이다. 생명권의 온전함과 위대함. 세상의 어떤 권리가 감히 생명권과 이해관계를 다툴 수 있을까? 그래서 낙태논쟁에서 생명권 옹호론자들은 항상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실은 추상적 논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낙태는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낙태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보여주는 각종 조사결과¹도 종종 발표된다. 낙태 찬반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는 낙태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일상적으로 만나는 내 주위 사람들 중에는 낙태를 했던 사람, 낙태여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생명권. 태아는 사람이니 낙태가 살인이라는 주장. 참 무겁다. 그런데 사실 우리 법체계에서 태아가 갖는 지위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법체계에서 태아를 사람과 동등하게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그렇다면 낙태죄의 형량²은 살인죄와 동등해야 할 것이다), ‘생명’ 이해를 둘러싼 모순은 숱하게 많이 발견된다.

비근한 예로 강간 피해로 임신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낙태를 인정하는 우리의 법³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법까지 가지 않더라도 강간피해로 인한 임신의 중절은 -심지어 생명옹호론자들 중 일부도- 너른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강간은 의도된 성관계와 달리 일방적인 폭력에 의한 피해이니, 다시 말해서 임신한 사람이 의도한 행동의 결과가 아니니 임신을 지속하라는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하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핵심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이라면 어떠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살인을 해도 되는 예외적인 경우는 아주 극히 드물지 않은가? ) ‘의도’인가?

모든 성관계의 ‘의도’에는 임신의 ‘의도’도 포함되는 걸까? 물론 모든 성관계에는 임신의 ‘위험’이 따르기는 한다. 임신을 굳이 ‘위험’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완전한 피임방법이 ‘아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과의 섹스에는 항상 원하지 않는 임신이 발생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의도’를 처벌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형법은 낙태만을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강간은 낙태미수죄까지 얹어서 처벌해야 맞고(생명권의 위대함을 기억하라), 피임하지 않는 성관계 또한 처벌해야 한다. 임신을 원하지 않으면서 피임하지 않았다면 그건 살인의 ‘의도’가 이미 내포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의도된 성행위에는 반드시 도덕적 판단이 함께 한다. 결혼제도 밖의 섹스, 성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십대의 섹스 등은 늘 ‘부도덕’의 부담을 안고 있다. 엄격한 낙태금지는 당연히 이성과의 섹스를 통제하는 효과를 갖는다. 비혼여성이, 십대여성이 아이를 출산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결코 자연스럽지도, 지지받지도 못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낙태금지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벌 받기 싫으면 섹스하지 말라는 우리사회의 준엄한 명령이다. 지금 우리가 실천하는 피임방법 중에 여전히 완전한 것은 없으며, 그나마 생활의 불편과 몸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성공률도 높은 방법으로 꼽히는 콘돔사용법은 이미 수 백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아주 간단한 방법이라는 사실은 ‘낙태-성행위 통제’와 가까운 그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다.
 
강간에 의한 임신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합법적으로’ 낙태 시술을 받으려고 했던 우리 상담소의 내담자가 여성․학교폭력피해자원스톱지원센터⁴를 통해 들은 대답은 ‘판결문 들고와야 낙태시술을 하겠다’는 싸늘한 답변5이었다. 이미 법에서 인정하는 권리를 거부당한다는 것 자체도 어처구니없지만, 그 대답이 ‘판결문’이라는 것은 더더욱 어이없는 노릇이다. 판결문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이미 태아를 출산해야하는 시기를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일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법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판단에 맡겨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낙태는 생명권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낙태는 여성의 권리(선택권, 재생산권 등)와 국가의 통제권 간의 갈등이다. 국가는 임신하면 무조건 아이를 낳아야 하지만, 특별히 강간피해로 인한 자식이나 장애가 의심되는 자식은 낳지 않아도 된다고 승인하였다. 그런데 그런 승인을 남용해서 부도덕한 성관계를 부추기는데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므로 국가의 허락을 받는 절차가 필요하단다. 국가가 원하는 것은 인구가 너무 많을 때는 조용히 낙태를 허하고(30년 이상 모자보건법 제14조가 운영되었지만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절차가 분명하게 제시된 적이 있던가), 인구가 부족할 때는 낙태를 철저히 금지하되, 인구가 부족하다고 해서 ‘아무’ 아이나 낳아서는 안 되니 가부장제 사회 질서를 크게 흩트리지 않는 선에서 조율하고, 국가의 복지부담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출산과 양육과정을 통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꼭 챙긴다.

그러면서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 개인이 마치 태아를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이 없어서, 자기 삶에 벌어지는 불편함을 견디기 싫은 이기적인 존재여서 그러는 양 낙태 비난 여론을 조성하고, 국가는 그 여론 뒤에 조용히 몸을 감춘다. 태아의 존재감을 몸으로 느끼는 것도 여성이고, 태아를 ‘사람’으로 키우는 엄청난 사회적 노동을 실천하는 것도 여전히 대부분 여성 (엄마가 혼자 키우지 못하면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여성 베이비시터 등 여성의 노동력이 저임이거나 무임의 형태로 투입된다. 미혼모 시설 등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자도 대부분 여성이다)이며, 임신 종결을 결정하는 것도 태어날 아이, 이미 태어나 있는 가족과 주변인, 여성이 감내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통합적인 고찰 끝에 내리는 ‘책임있는’ 결론이라는 것은 절대 부각하지 않는다.
 
‘판결문을 들고 오라’하면 우리는 이렇게 답해야 하지 않을까. 판결문 기다리다가 출산하게 되면 10개월간의 임신노동을 국가비용으로 보상하고, 출산한 아이를 ‘사람’으로 만드는데 필요한 육체노동, 감정노동, 정신노동, 교육노동, 보건노동 등 돌봄노동 일체를 제공하라고. 결국 이 아이는 국가의 의도적 외면으로 태어났으니.
 
 
각주-----------------------------------------------
 
1 2004년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반 여성 85.1%, 변호사 및 법대교수로 구성된 법조계 96.6%, 전국 여성단체로 구성된 여성계 96.7%, 종교계 57.5%가 인공임신중절을 제한적 혹은 완전 허용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2004,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및 종합대책 수립, 고려대학교․보건복지부)
 
2 형법 269조(낙태) 중 ①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270조(의사등의 낙태, 부동의낙태) 중 ①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3 모자보건법 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중 ①의사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되는 경우에 한하여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자를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4 여성․학교폭력피해자원스톱지원센터는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학교폭력 피해자가 의료․수사․법률 서비스를 한 곳에서 지원받을 수 있도록 여성부, 경찰청, 지방의료원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지원기관이다. 현재 전국에 16개 지원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5 2007년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사례 중에는 성폭력 피해로 인해 임신 6개월 된 청소녀가 낙태를 위해 원스톱지원센터를 찾았으나 재판에서 가해자임이 판명되거나 최소한 고소절차를 밟아야만 시술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듣고, 결국 동네병원을 수소문해 어렵게 시술을 받았다(나눔터 58호, 성폭력피해 생존자의 인공유산 선택권, 이미경 참조). 2008년도 7월의 상담사례 중에도,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 5개월의 여성이 낙태시술이 필요하여 우리 상담소에서 동 원스톱지원센터에 문의했으나, 판결문이 필요하다는 답변을 듣고 결국 개인병원을 찾아가서 시술을 받아야 했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계간지 「나눔터」61호(2008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