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재생산권의 권리와 의무, 남성은 어디에 있는가?
재생산의 권리와 의무, 남성은 어디에 있는가?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재훈
“재생산의 권리와 의무, 남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구성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생산 과정에서 남성은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고 의무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여기에서 재생산 과정은 임신ㆍ출산 과정을 의미한다. ‘제대로’라는 표현의 의미는 임신ㆍ출산 과정에 여성과 함께 주체로서 참여하고 있을 때를 의미한다. 따라서 주어진 제목을 “임신ㆍ출산 과정에서 남성은 여성과 함께 주체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로 재구성할 수 있다.
제목이자 질문에 대한 답은? “그때 그때 달라~~~요!” 답을 좀 우습게 표현했는데, 이유는 그렇다. 우스운 답처럼 우리 현실도 우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우스움이 단순히 웃기는 상황이 아니라 심각한데 해결책이 별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서 생기는 ‘허탈한’ 우스움이다.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는 ‘허탈한’ 허무주의에 빠지면 안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허탈한 상황인지는 마지막에 설명하기로 하고, 먼저 ‘그때 그때 다른’ 남성의 상황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알아보자.
먼저, 임신ㆍ출산 과정이 혼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이 상황은 대부분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고 낙태로 끝을 맺는다. 이 경우 여성이 이른바 ‘동정녀’로서 혼자 어찌어찌하여 임신한 것처럼, 남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옛날 옛날에 동정녀로 아이를 낳은 어떤 분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 많은 ‘동정녀’는 ‘부도덕한 여자’로 손가락질받고 낙태의 아픔을 혼자 감수하고 있다. 어쩌다 아이를 낳을 경우, 최근 인터넷 상에서 ‘싱글맘’이라 표현하면서 ‘미혼모’보다 사회적 낙인이 없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긴 하다.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에서 ‘싱글맘’이라고 하면 왠지 부드럽고 좋을 것 같은 환상이 있는지 모르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은 개인 블로그에서 예쁜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사회적 편견과 제도적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남성들은 재생산 관련 권리와 의무를 팽개치고 왜 대부분 도망가고, 또한 도망가는 남성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왜 찾아보기 힘든가? 그리고 낙태는 왜 계속 방치되고 있는가?
도망가는 남성은 이런 경우의 임신ㆍ출산 과정에서 가부장으로서 이해관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가부장적 사회 입장에서 볼 때, 혼외 관계 출산은 기존 가부장제 내지 일부일처제 가족제도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신ㆍ출산이 자신의 가계를 계승하는 계획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경우, 여성이 아이를 낳든지 낙태를 하든지 관심사가 될 수 없다. 가계 계승과 관련 없는 권리와 의무는 그냥 외면하고 도망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뿐이다. 주변에서 가끔 혼전 임신으로 인하여 결국 결혼하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혼인으로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임신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기치 않았던 임신ㆍ출산을 결국 가계 계승 작업과 연결시키는 ‘계획 변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계 계승과 관련 없는 재생산 과정에서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는 남성들을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한 남성의 행태가 가부장적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위협이 된다. 그래서 독신모 가족을 도와줄 필요도 없고 도와주어서도 안 된다.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낙태가 가부장적 사회 질서와 가족 형태 유지를 위해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 상황에서, 특히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종교 조직이 낙태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임신ㆍ출산 과정이 성별노동분리가 극복된 파트너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이때 남성은 재생산 과정에서 가질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여성의 동등한 파트너로서 남성은 임신ㆍ출산 과정은 물론이고 육아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부모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직까지 이 땅에서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사례이다.
셋째, 임신ㆍ출산 과정이 혼인 관계에서 가계 계승 욕구 충족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이때 남성은 매우 적극적으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려고 ‘노력’한다. 여성의 낙태 혹은 낙태 시도는 상상할 수 없고 용서하기도 힘든 일이다. 임신ㆍ출산ㆍ육아 과정이 시작되면 결혼 전 평등한 관계를 침이 튀도록 이야기했던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성실한’ 가장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임신ㆍ출산 이전에 여성의 취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남성은 이제 여성에게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할 것을 주문한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 ‘먹여 살릴 테니’ 집에서 아이를 잘 키우라고 한다. 실업ㆍ질병ㆍ사고 등 각종 다양한 사회적 위험 때문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 가장으로서 역할을 못하게 될 지는 별로 안중에도 없다. 남자로서 임신ㆍ출산을 통하여 가계를 계승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여자를 ‘먹여 살릴’ 의무감을 매우 크게 느끼는 것이다.
넷째, 혼인 관계 내 임신ㆍ출산 과정을 가계 계승을 위한 것으로 보면서, 여성이 임신ㆍ출산 및 육아와 취업활동을 병행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가 있다. 여성의 이중부담은 여성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남성의 문제는 아닌 셈이다. 그러나 낙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남자로서 임신ㆍ출산을 통한 가계 계승 권리는 적극적으로 행사하지만, 그 외 재생산 과정에서 남자의 의무는 전혀 관심사가 되지 않는 경우이다. 혹은, 출산을 통한 가계 계승을 의무로 알고 그 의무 실현 대상으로서 여자를 도구화하는 경우라고도 설명이 가능하다.
다섯째, 임신ㆍ출산 과정이 혼인 관계에서 이루어지지만 어느 정도 가계 계승 욕구가 충족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이럴 때 남성의 입장에서 임신ㆍ출산 과정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관심사가 아니다. 낙태를 하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오로지 여성이 결정해야 할 사항이다. 기혼여성에게 낙태가 마치 사후피임 수단처럼 인식되는 상황도 결국 남성의 이러한 가부장적 태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혼전 관계에서처럼 육체적ㆍ물리적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 이 경우에도 여성은 ‘혼자’ 임신한 상황을 겪게 되는 것이다.
임신ㆍ출산 과정에서 남성의 권리와 의무가 나타나는 모습을 다섯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는 유형 두 가지(첫 번째와 다섯 번째), 동등한 파트너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유형(두 번째), 가부장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는 유형(세 번째), 가부장으로서 권리만 행사하는 유형(네 번째)이다. 두 번째 유형이 드문 우리 사회 현실이 결국 저출산 현상이나 높은 낙태율로 이어진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특히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로서 낙태 방지가 요즘 논의되고 있다. 저출산을 소재로 하여 낙태를 사회적 이슈화하는 전략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그런데, 이 논의에서 여성을 아이 낳는 존재로 수단화할 뿐 남성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임신ㆍ출산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남성의 행태에 대한 문제 제기와 변화 전략이 선행되어야 낙태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을 텐데, 논의에서 남성은 빠져 있는 상황이 많이 허탈하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계간지 「나눔터」61호(2008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