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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일곱번째 작은말하기 후기입니다.
  • 2011-10-13
  • 2576

작은 말하기 9월


나에게는 그러니까 3번째 참여다.

이 경험들을 말하는 것이 나는 관계 안에서 굉장히 힘들었었다.


관계 안에서 그것을 풀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복지관에서 지원하는 상담소도 갔었지만

(그때는 나의 상처의 근원이 어릴 적부터 축적되어온 성폭력의 그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처음 작은 말하기를 참여할 때는 나 역시 두려움이 많았다.

나의 문제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얼마나 보여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 후에 내 마음에 다른 파장은 없을까도 생각했다.



이번 3번째 모임에서는 그런 말하기 자체의 파장과 관계들 

그리고 그 안에서 말하는 주체의 나로서, 듣는 타자의 입장의 나는 어떤 입장인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작은 말하기를 처음 시작하기 전엔, 이 경험을 10년 이상 가슴속에만 담아 놓고 있었다.

일기나 글로도 도저히 적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묶어 두었다가 후에 나를 설명할때 이 부분이 가시처럼 걸리는 무엇이 되었고 자책이나 우울함등을 겪을 때면 필연 그 경험들이 한데 엉키기도 했다.나는 종종 누군가가 내 머릴 둔기로 때리고 도망을 간 것처럼 이따금 멍하고, 참을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글로 써보는 시도부터 시도하면서 나는 이 경험을 말하는 단계에 이를 때

마침 작은 말하기란 모임이 있었다.


이 일은 내게만 있던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나처럼 괴롭고 고통스러운 현재를 살아가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경우의 수일 뿐이다. 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어떤 병명이나 어떤 사고처럼 그 무엇으로 부를 수 있고 지나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지난 경험들이 나를 묶어두는 강력한 감정 상태와 절망감들이 나의 전부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을 말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 그 이후에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숙제였다. 

작은 말하기는 어쩌면 이 숙제들의 답을 조금은 내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3번째 모임 2차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

2차에는 이 경험들을 직업으로 겪어내시는 분들이 나를 제외하면 3명이셨는데, 모두 서로 안면이 있으셨다. 나는 내가 눈치 없게 이 틈에 낀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작은 말하기 1차 모임에서 말 꺼내기를 조심스러워한 한 분의 입장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경험을 겪고 말하려는 분보다 듣는 입장의 분들이 다수라고 느껴지자 말을 꺼낼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최대한 그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작은 말하기는 동등한 경험을 가진 분들의 모임은 아니다.

동일한 경험이긴 하지만 한분 한분의 인생의 색깔만큼이나 다양하고 다르다.


때문에 이 모임을 처음오신분과 많이 오신분과 이 경험을 다루는 직업을 가지신분과 

물어물어 인터넷으로 겨우 참가신청 하신분등 한 달 단 하루 많아야 3시간 남짓. 

어떤 분은 생전 처음 보는 분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주 깊숙이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특별한 룰도 없고 연령도 다르다.

모임의 날에 따라 분위기도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그 안에 관계가 있다.


아는 분과 모르는 분. 이 일을 직업을 겪는 분. 

그것이 작은 말하기의 힘일 수도 있지만 처음 오신 분이거나, 관계의 장치에서 벗어나 자신을 처음 풀어놓으려는 분에게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번 2차에서는 작은 말하기 모임시간에 느껴지는 차분함과 경청의 자세보다는 좀 풀어진 느낌으로 이런 경험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한결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2차에서 입장이 나만 다르다고 느껴지자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기분이 살짝 밀려왔다. 

그래서 모임 때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던 한분의 입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말을 꺼내는 것. 자신의 가장 마음속에 깊이 담아 꺼내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용기다. 

그리고 그 말을 들어주고 같은 상처지만 다른 경험인 상대의 입장이 되어주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그러기에 각본처럼 어떤 정답에 가까운 내가 되질 못하기도 하는 것 같다.


들어줄 때는 진심이려고 애를 쓰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상대방보다 더 흥분하거나 적절한 형용사를 찾지 못해 당황스러운 말을 한건 아닐까 

더 조심스럽게 됨을 느끼기도 한다.



2차가 파할 때쯤 지하철이 끊겨버릴 시간이 되었음에도(그래도 다행히 막차가 늦게와서 탔지만) 나는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마지막 대화에서 남성들을 상대로 한 폭력들도 많아졌다는 이야기에 불쑥 내 동생이야기를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린 내 남동생의 바지를 벗겨서 보려했던 이야기였는데 "어머니는 왜 그때 가만히 계셨을까" 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2차를 파했는데 다행히 막차가 늦어져서 타게 되었지만 오는 내내 내가 왜 그 자리에서 먼저 가겠다고 하지 못하고 그런 이야길 불쑥 꺼낸 것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두 가지를 캐치했다.


하나는 타이밍이다. 나는 그때 집을 향해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만 집으로 가야 한다가 아니라, 상대의 말에 호응을 하기 위해 내 경험을 말한 것이다.

어쩌면 나는 무리하게 이 경험으로 부터 괜찮다는 증명을 스스로에게 내보이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


작은 말하기는 우리의 경험들을 털어놓는 공간. 

하지만 그 안에서도 관계가 있고 입장이 저마다 다르다. 

상처의 내용도 그것을 대응하는 방법도,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는 현재도 그렇다. 

나는 이미 괜찮아 보이는 그들을 알고 싶었을 수도 있고 그 관계 안에 더 다가가고 싶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는 별거 아닌 듯이 말할 수 있다고 증명하려다 살짝 오바한 것일지도.


두 번째 는 어머니 이야기다.

나는 이 작은 말하기에 올 때 무엇 때문에 외출하는지 어머니는 궁금해 하시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나의 경험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무지한 방관자 느낌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머니와 그 부분에 대해 대화를 포기했다.

그래놓고는 그 대화에서 또 다른 경험을(동생의) 드러냄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잘못을 말하며 풀어내려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여긴다면 "나도.. 참" 하게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단순한 타이밍의 문제인가도 여겨본다.

물론 이런 경험들과 관련한 대화였지만 그저 대화 내에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생긴 단순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경험을 말하고 듣는 것이 아직은 숙련되지 않은 것에서 나온 예민함 같은 건 아닐까.



모든 일을 나의 경험으로 연결 짓는 오류도 지금의 나를 그 일에 묶어 두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이번 모임에는 그런 나를 발견함으로 인해 듣고 말하는 것에 밸런스를 맞추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경험을 내 마음에서 다루는 문제, 경험을 말하고 그것을 조절해 나가는 시간의 문제,

상대의 이야기에서 그 사람의 심경이 무엇인지 알아주는 일..까지도.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살면서 평범한 관계 안에서 이런 말하기를 평생 얼마나 할 수 있을까도 여겨본다. 

정말 이런 경험들을 얼마나 속 깊게 털어놓고 또 제대로 상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들을 수 있을까도...

하지만 분명, 꽁꽁 숨기기만 하면서 혼자 아파하는 것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임은 맞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말하기는 소중한 모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그런 분야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더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기도 하다.


- by 유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