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간의 기다림끝에 2013년 3월 작은말하기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성폭력 피해경험을 말했을때,
" 아, 그랬었구나..." 가 아니라,
" 맞아, 맞아" 라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그 감정을 오롯이 공감할수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어렸을때 지속적인 피해에 노출되었던 아이가,
가해자인 어른에게 사탕선물을 받고, 사랑받았던 것을
내가 동의한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아이에게 어른이라면
성폭력 가해의 댓가로가 아니라
누구나 해야할 일들이라는 사실에
무겁게 나를 짓누르던 죄책감을 벗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울고 힘들고 그래서 지치고 괴로운 모습의 내가 아니라
밝게 옷으면서, 울지 않으면서도 내 피해경험을
말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가해자인, 친부에게,
이 편지를 보냅니다.
다음달에도 또 다시 만나 우리 말해요.
* 2013년 3월 처음으로 참여한 하나의 편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빠에게
당신이 나에게 한 일 중 가장 나쁜 일은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입니다.
어린 나의 뇌가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고 판단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을, 관계를 무서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용기를 갖기 어렵게 한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내가 하지 못한, 하지 못 할
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분노와 증오로 치가 떨립니다.
당신으로 인해 잃은, 그리고 잃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신이 미워죽겠습니다.
내 인생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앗아간
그리고 앞으로 그것을 스스로 얻을 능력마저 손상시킨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빠입니다.
당신 때문에 오래도록 나는 내 자신이 싫었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더럽혀졌다는 느낌으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고,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슬펐습니다.
내게서 나 자신을 앗아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빠입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오래도록 사람들이 싫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싫어할 것 같았습니다.
나를 이용할 것 같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화내고 때릴까봐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상처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교실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모두를 피하고, 책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추억도 별로 없습니다.
내게서 사람을 뺏어가고
관계를 맺는 능력을 손상시킨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빠입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오래도록 남자가 싫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싫었습니다.
당신처럼 나를 잡아 못 움직이게 만들고
나를 때리고 걷어찰 팔다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싫었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생김새, 비슷한 목소리, 느낌, 냄새
모두가 싫었습니다.
나를 좋아한다는 남자 아이도 싫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면 도망갈 까봐 무서웠습니다.
내가 좋다면서, 자기 마음대로 나를 좋아해놓고
이것저것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멋대로 요구하고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나를 미워할까봐
아무의 마음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에게서 남자를 뺏어간
그래서 내가 세상의 절반과 밖에 교류하지 못하게 만든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를 뺏어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빠입니다.
당신 때문에 오래도록 나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살 수가 없었습니다.
현실이 시궁창이었기에, 늘 다른 삶을 꿈꿨습니다.
주변에 멋진 인연과 기회들이 많았겠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로지 이 더러운 집, 더러운 상황, 더러운 아빠에게서
벗어날 상상만 하며 살았습니다.
어서 어른이 되기를 바라면서.
지금도 나는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기가 힘듭니다. 행복하기가 힘듭니다.
나에게서 행복을, 나의 귀중한 시간들을 뺏어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빠입니다.
당신은 나쁩니다.
당신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은 나쁩니다.
나에게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큰 죄를 지어놓고는
평생을 뻔뻔하게 진심어린 사과 한 번 하지 않습니다.
‘너도 나한테 관심 없잖아’라는 당신의 말은 내 가슴 속에
비수를 꽂아 넣었습니다.
혹시나 나에게 미안해하고 죄책감에 괴로워하지는 않을까 했던
나의 어리석은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조금도 모른다는 걸.
이제는 당신이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나빴는지.
내가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슬펐는지.
이제는 당신이 알아야 할 때입니다.
당신은 얘기했지요.
내가 나의 인생을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나는 당신의 생각보다 강한 사람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13년 동안 성폭행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내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이 가해자이고 내가 피해자이기에
세상이 당신을 욕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이 세상에는 나의 편이 아주 많고,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옳기 때문에
마침내 내가 이길 것임을 잘 압니다.
나는 이제 피하지 않고 맞서려 합니다.
내 삶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니 당신도
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2013.03.18. 월요일
세상에서 가장 강한 하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