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자 맘먹은지 반년 가까이 돼서야 오게 된 작은 말하기,
게으름을 자책하는 마음과 함께 모임에 대한 기대감도 알맞게 부풀어올라와 있었습니다.
말하기는 천천히, 요란떨지 않고 시작됩니다.
처음 만나는 낯선 얼굴들은 낯익은 일상의 이야기를 합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이야기를 합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어릴 때 어머니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 것이 상처가 되어
성적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로 나옵니다.
그녀가 현재의 이성애연애를 통해
성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
여러 말하기가 오갑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표현방식이
우리에게는 조금 더 첨예尖銳하게 다가옵니다.
이것은 행운일까요 불운일까요.
삶에서 어떤 모서리edge를 가지는 것이 치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모서리로 우리는 무언가를 자르고 다듬어 만들 수 있지요,
그 모서리에 찔릴 수도 있지만 돋아낸 새살로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삶의 모서리는 사람을 엣지있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 모서리를 만나는 방식으로 ‘상담’에 파고들기도 합니다.
내담자가 되기도, 상담을 공부해 상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 다양한 장면에서 만나게 되는 언어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상담과 관련한 경험과 고민들을 나누는 것이 또한 일종의 상담처럼 풀려나가기도 합니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말하기의 끝은
시작보다는 수다스럽게, 적당히 달궈진 온도에 다다랐습니다.
이 온기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때문에 아마도 다음 작은말하기가 가능한 것이겠지요.
기억을 떠올려보면,
성폭력을 경험했을 때 제게 점점 차올랐던 욕망은 두 가지였습니다.
말하기와 글쓰기.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든 풀어내고 싶다는 바람,
그래야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예감.
말하기와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비단 피해 자체에 집중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자기표현의 욕망을 자각하고 다양한 방식의 표현을 모색하게 된 계기로서
그 경험은 나라는 사람의 일부로 녹아져 있습니다.
저는 제게 불었던 그 강렬했던 바람을 기억합니다.
요즘은 제 바람의 방향이 변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이제 말하기보다는 듣기에,
자기이해보다는 타자이해에 조금 더 다가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쌍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국 하나의 ‘대화’, 하나의 ‘삶’을 완성해가는 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말하기는 작은 듣기이며 작은 대화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우고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