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동북여성민우회 소식지에 실린 글입니다.
여성 연쇄 성폭력 살인 사건으로 확산되는 이 사회의 공포 정치에 맞서자
키라(한국성폭력상담소)
연일 언론에서 여성 폭력 피해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다. 경기서남부에서 발생한 여성 연쇄 성폭력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올해 1월 24일 검거되고 수사 내용이 노출되면서 이 사건에 대한 뉴스와 기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동시에 피의자의 범행 동기와 범행 수법이 ‘싸이코패스’형 범죄라는 다양한 분석 기사들이 유행처럼 실리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여성 폭력 살인 사건들은 우리에게 낯선 사건이 아니다. 많은 연쇄성폭력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은 여성들이었고, 이러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대중적으로 흥행할 정도로 ‘여성 폭력, 살인 피해’는 우리에게 끔찍하지만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 자체로 끔찍한 사건이지만, 사실 이 사건에서 더욱 주목해야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거대한 공포와 무기력감을 유포한다는 것이다.
근대 역사는 여성들이 개인성을 획득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은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참정권, 교육권 등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여성들이 쟁취해온 것이다. 여성 운동의 역사는 그 권리를 구체화하여 제도화시키기도 했으며, 많은 여성들은 ‘성평등’의 권리를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한다. 졸업 후 진로를 물었을 때 대다수의 여학생들은 자신의 꿈에 대해 자아 실현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하고 있다. 그 꿈의 가짓수와 내용은 그야말로 다양하며, 그 꿈을 통해 보이는 그들은 ‘여성’이라는 동질한 범주로 환원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 폭력 살인 사건이 기사화될 때 우리들이 접하는 ‘여성’은 극도로 무기력한 몸뚱아리일 뿐이다. 피의자의 잔인함과 반사회성은 진술 과정에서 아주 세세한 것 까지 기사화되지만, 이미 피해자 여성들은 폭력 피해 이후 살해되어 유기된 ‘사체’로만 존재하며, 현장 검증에서 등장하는 피해자 마네킹으로 등장한다. 사건에 관한 기사들을 접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성별을 이유로, 이러한 폭력 피해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하며 공포와 무기력감을 느낀다. 이 사건에 관한 기사들을 접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폭력 피해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한다(실제로 이 사건 이후로 여성들의 평균 귀가 시간이 한 시간 이상 앞당겨졌다는 기사도 나온 바 있다). 이러한 공포의 실체는 여성 개인의 존엄성과 고유함이 모두 삭제되고, 어떤 남성에게 강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그야말로 ‘구멍이 있는’ 존재로 일순간 환원될 수 있다는 공포이다. 이러한 공포는, 여성들의 공적 영역에의 진출과 개인성 실현을 당연한 권리로 쟁취해온 여성들의 투쟁의 역사를 거스르게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여성들 역시 다양한 성폭력 피해와 여성 혐오범죄를 접하면서 성폭력에 대한 공포와 무기력함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뉴스에서 여성 성폭력 살해 사건을 접하고 밤길에 대한 무한대의 공포를 느꼈던 내 유년 시절의 어떤 순간이 기억난다. 또,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어느 날 오후, 나와 내 친구들이 교문 옆에서 마주쳤던 (일명) 바바리맨이 흔들고 있는 페니스를 보고, 오랫동안 남성 성기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가졌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랬듯이, 다음 세대의 여성들이 자신을 ‘잠재적 연쇄 성폭력 피해자’로 생각하며 스스로의 시공간과 일상을 통제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이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다양한 계보와 그 범행 수법의 잔인함을 목격하며 ‘밤길’에 대한 무한대의 공포를 갖길 원하지 않는다. 남성 성기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성폭력을 ‘여성에게 가장 끔찍한 경험’으로 생각하며 공포스러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갖는 이 무기력감과 공포를 우리는 방치할 것인가? 다음 세대의 여성들이 이 공포로 인해 자신의 삶을, 기회를, 용기를 포기하는 것을 두고만 볼 것인가?
2004년 유영철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러웠을 때, 많은 여성들은 유영철이라는 범죄자와 더불어 성폭력 사건으로 대두되는 이 사회의 공포 정치를 비판하며 ‘달빛시위’라는 이름으로 모여 가두 시위를 열었다. 2004년 이후로 달빛시위는 현재까지 매 여름마다 열리고 있다. 달빛 시위의 캐치프레이즈는 ‘여성들도 밤길을 걸을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서, 그 자리에 모인 달빛 시위대는 성폭력 사건으로 환기되어야 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성통제’가 아니라 ‘여성을 성폭력에 취약하게 만드는 성폭력에 대한 통념의 부당함’임을 주장해왔다. 지금, 연쇄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만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대신하여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이와 함께, 여성들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여성들의 신체적 물리력과 외부 공격에 대한 대응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범죄자, 피해자, 우리 대부분은 여성들을 ‘쉬운 공격 대상’이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범죄자는 쉽게 굴복할 것이라 기대하며 여성을 공격하고, 피해 여성 역시 극도의 공포에 압도되어 공격에 대한 대응을 시도하기 어렵다. 스스로 취약하다고 여기는 피해자와, 그런 믿음을 공유한 가해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생각해야하는 것은, 여성들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하지 않도록 훈련하고 교육하고, 홍보하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적 취약함과 무기력은 부모의 양육태도에서, 공공기관의 교육에서, 연약하고 의존적인 여성 신체가 아름답다고 광고하는 미디어를 통해 여성의 몸에 각인된다. 이 모든 것은 넓게 보아, 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무기력감을 만들어낸다.
연쇄 성폭력 살인 사건에 대한 사회적 해법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대안들이 있다. 피의자의 얼굴 공개, 수사 기법의 정교화, 범죄자 처벌의 강화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대안이 여전히 여성들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현재 상황을 방치한다면, 그 대안의 실효성은 다시 질문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