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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 죽어야 사는 여성 연예인들의 인권 (젠더리뷰, 2009 여름)
  • 2009-10-14
  • 2877

 

죽어야 사는 여성 연예인들의 인권

 

: 고 장자연 씨의 죽음에서 기억해야 할 것

 

 

허은주(한국성폭력상담소)

 

 

 

지난 3월 6일 고 장자연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었던 그녀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관할 경찰서인 분당 경찰서는 고인의 죽음 3일 후인 3월 9일에 수사를 종결하고 수사 결과를 우울증으로 인한 단순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여자 연예인의 자살 사인으로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우울증’이라는 경찰의 발표는 늘 그렇듯 ‘의혹만을 남긴 채’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경찰의 발표 이후 몇몇 언론이 고인이 직접 작성했다는 소위 ‘리스트’를 공개하면서 시작되었다.

 

 

 여성 연예인 가십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연예인의 자살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 때마다 경찰은 사인을 우울증이라고 말해왔고, 적지 않은 수의 여성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우울증은 여성 연예인들의 고질적인 직업병으로까지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동시에 카더라 통신으로 존재하는 여성연예인 ‘성상납’ 에 대한 의혹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왔다. 신인 여자배우가 성공을 위해 소위 높은 분들에게 성 접대를 하는 것은 ‘루머’로 보면 대중들에게는 익숙한 가십거리이다. 이런 관행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는 것에 비해 실제 성접대를 강요, 알선한 자가 처벌을 받거나 성접대를 받은 이들이 공개되어 처벌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여자 연예인 성상납 문제는 권력형 비리이긴 하나, 정치인들의 뇌물 수수사건처럼 책임자 처벌에 대중적 관심이 모아지는 이슈는 아니다.

오히려 여성 연예인들의 성과 관련된 협박성 사건이 이슈화되는 방식은 성적 스캔들이다. 각종 ‘비디오 사건’에 등장한 여자 연예인들은 모두 비디오를 빌미로 부당한 요구를 받아야했고, 보복성 비디오 유출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여자 연예인’으로 회자된다. 심지어 ‘물의 연예인 컴백 논란’이라는 기사(스포츠 서울 2009.1.29 기사)에서는 성매매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남자 연예인과 비디오 사건의 피해자 여성연예인을 동일선상에 놓고 ‘물의 연예인’이라고 싸잡아서 다루고 있다. 여자 연예인은 과 관련되어 신문 지상에 다뤄지기만 해도 물의를 일으킨 여자 연예인으로 취급되고, 섹스 비디오를 유출한 남성이 누군지, 그 자가 결국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언론은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사법적 처벌도 힘을 받지 못한다. 여자 연예인의 성력(sexual history)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국민들의 알권리라고 포장하여 보도하는 황색 신문이 있을 뿐이다.

고 장자연씨의 죽음에 대한 루머도 그렇게 사라질 줄 알았다.

  

 

‘리스트’, 형편 없는 경찰 수사

 

그러던 중, 사인을 우울증으로 인한 단순 자살’로 정리한 경찰의 발표를 뒤집는 사건이 벌어졌다. 방송사가 고인이 작성했다는 ‘성접대 리스트’를 확보하였다는 언론 보도를 내보낸 것이다. 경찰은 언론의 리스트 확보 보도 이후 뒤늦게 전담수사반을 꾸렸고, 3월 16일 리스트가 고인의 육필로 작성되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경찰은 이후 수 차례의 수사 브리핑에서 ‘리스트’와 관련된 말들을 번복하기 시작하였다. 리스트가 고인의 육필로 작성된 것이 확인된다면 그 리스트에 있는 이들을 소환 조사할 것이라던 경찰은 언론사로부터 이름이 지워진 리스트를 받아 실명이 없고, 급기야 문건과 관련된 리스트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리스트 자체를 부인했다. 이에 대한 경찰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경찰은 다시 최종 수사 때에 ‘문건에 누가 등장했으며 유족들이 고소한 피고소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에게 어떤 혐의를 두고 조사했는지 다 밝힐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경찰은 다시 ‘다 밝힌다는 의미가 실명 공개는 아니다‘라며 주 3회 진행되던 수사 브리핑을 주 1회로 축소하겠다고 기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수 차례의 기자회견과 경찰에의 의견서 발송 등, 고인의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주장해왔던 시민사회단체들은 경찰의 계속되는 말 바꾸기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특검 청원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고인의 49재 날이었던 4월 24일, 경찰은 본 사건의 수사를 잠정 중단하겠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그 핵심 내용은 총 8명의 수사대상자를 불구속 입건했으나 혐의가 확정돼 구속된 대상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경찰은 수사 대상자들이 사회활동에 바쁜 사람들이라 조사 일정 잡기가 힘들고, 피해자가 사망한데다, 중요 피의자인 전 소속사 대표가 일본에 도피 중이라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덧붙였다. 수사에 성역이 있을 것이라는 대중적 우려는 보란 듯이 현실화되었고, 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독점하고 있는 경찰의 수사 방식과 태도는 시민단체들의 ‘성역 없는 수사 촉구’라는 구호를 무력화시켰다. 지난 4월 27일 일본 도피중인 고인의 전 소속사 대표 김씨에 대해 한국의 체포영장에 해당하는 가구금 허가서가 발부돼 일본 경찰력의 투입이 가능해졌고 지난 5월 14일 김씨의 여권이 만료돼 불법체류자 신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중요 참고인을 인도조차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중요 참고인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리스트’에 있는 높으신 분들에게 ‘혐의 없음’을 판단한 경찰은 결과적으로 고인에 대해 ‘거짓을 써갈기고 죽은 사람’이라는 불명예를 덧 씌운 셈이다.

 

 조선일보의 등장, 사라진 고인(故人)

 

경찰의 수사 중단 발표 이전인 4월 6일,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의 때에 행정안전부장관에게 질의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고인의 죽음에 대한 여론은 특정 언론사에게로 집중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 방사장을 술자리에 만들어 모셨고 그 후로 며칠 뒤에 스포츠 조선 방사장이 방문했습니다 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보고받으셨어요?(09.4.6 국회 속기록)라는 국회 대정부 질의 내용이 언론 보도되면서 책임자로서 특정 언론사 사주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회의원의 발언을 인용하며, 4월 8일 조선일보에게 적극 수사에 협조하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조선일보사 앞에서 진행되었다. 기자회견의 주최는 여성, 언론, 인권 단체였고 기자회견에서는 이종걸 의원의 대정부질문 내용을 인용하며 조선일보의 경찰 수사 협조를 요구하였다.

 

조선일보는 이에 대한 발빠른 대응을 보였다. 대정부 질의 때 본사와 본사 특정 임원의 이름을 거론한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해당 내용을 언급한 국회의원, 시민․언론 단체 대표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고, 국회의원 두 명에게 각각 10억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이에, 이종걸 의원은 조선일보사가 자사 인터넷 사이트 <조선닷컴>에 이종걸 의원에 대한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기사 제목을 고의적으로 노출하였다며, 조선일보에 맞고소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일보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된 인사들 중에 여성단체 관련자들이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종걸 의원의 발언 직후 조선일보 앞에서 기자회견을 주도한 단체가 여성 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가 명예훼손 검찰 고소에서 여성단체를 제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조선일보사의 기사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다. 조선일보사는 명예훼손 혐의로 몇몇을 고소한 사실을 5월 17일 기사로 밝히며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은 지난해 촛불시위 당시 조선일보 광고 불매운동을 주도한 세력들이 만든 단체이고,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좌파 성향의 단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조선일보가 여성단체들을 명예훼손 고소 대상에서 제외했던 것은, 조선일보가 고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불거지는 당시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자연 씨의 죽음은 하나의 빌미일 뿐, 기존에 조선일보의 언론 권력에 도전해왔던 단체들이 이 사건을 통해 또 다시 조선일보를 공격하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작년 촛불 시위 때부터 조선일보 광고 불매운동을 벌여온 단체, 민주언론운동을 내걸고 언론사의 해임 기자들이 만든 단체들은 ‘조선일보의 권력에 계속 딴지를 거는’ 불편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해당 국회의원을 명예 훼손 고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정부 질의를 했던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인터넷에서 스타가 되었다. 정치 후원금이 쇄도하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의원을 지지하는 카페가 만들어지는 등 ‘조선일보와의 한 판 승부’를 내건 국회의원에 대한 응원의 여론이 높아졌다. 특히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번 사건은 ‘친일파-독립군’간의 대결로 상징화되었는데, 이종걸 의원이 항일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의 손자이고, <조선>은 같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 부역’을 했다는 점을 들어, ‘이종걸 의원의 행동도 역시 독립군 이회영 선생의 후손답다’는 격려가 이어졌다. 조선일보의 명예훼손 고소는 오히려 이종걸 의원을 ‘아무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에게 바른 말을 하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고 장자연씨의 죽음에 대한 수사가 흐지부지 중단된 상황에서, 조선일보가 만들어놓은 ‘색깔론’의 전선은 더 선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한 여자 연예인의 죽음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그녀의 죽음은 하나의 빌미이자 계기일 뿐이었기 때문에, 그 죽음의 무게를 쉽게 증발하였다.

  

죽어야 사는 여성 연예인의 인권

 

고인의 죽음 이후 많은 이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고인이 남긴 리스트의 힘없는 여자 배우입니다라는 문구는 많은 이들에게 인용되며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었고, 대한민국의 절대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된 죽음의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절대악이라는 특정 권력자들이 이 사건의 책임자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에 비례해서 고인의 죽음은 그만큼 순결한 희생으로 의미화 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권력자에게 ‘성상납’한 여성 연예인들에게 그렇게 관대해왔던가? 성과 관련된 여성 연예인들의 가십은 여성 연예인들의 활동을 중단하게 할 만큼 치명적이다. 이미지로 먹고 사는 연예인들에게 대중들의 시선과 평가는 연예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이고, 특히 여성 연예인들에 대한 평가는 여성에 대한 온갖 가부장적 통념을 무차별적으로 드러낸다. 섹시해야하지만 걸레는 안 되고, 전 남자친구가 협박과 보복성으로 섹스 비디오를 유출하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가 된다. 여자 연예인들에게 요구되는 규범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예뻐야 하지만 성형하면 욕먹고, 다이어트 성공기는 칭찬받지만 지방흡입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은 방송 출연 중지의 이유가 된다. 지적이면 좋지만, 지적 능력은 적당해야 하며 정치적 견해를 밝히면 너무 나대는 여자가 되어 비호감이 되어 결국 ‘안 팔리게’ 된다.

 

리스트를 작성한 고인이 살아있다면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고인이 용기를 내어 ‘책임자들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요구했다면? 성적인 것(sexual)이 여성 연예인과 관련되어 언급되면 그 사건의 피/가해자 구도는 증발하고 모두 ‘사회적 물의’로 해석되어 결국 ‘사회적 물의’에 대해 책임지는 방식으로 여성 연예인의 활동 중단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여겨져 왔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그 상상의 내용은 암울하다. ‘그게 뭐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대놓고 공개하느냐’, ‘룸살롱 출신 아니냐’ ‘받을 거 다 받아 놓고, 이제 와서 공개하는 걸보니 꽃뱀 아니냐’라는 인신 공격과 더불어 오랫동안 낙인이 지워지지 않을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것일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상당수의 신인 여성 연예인들이 자신이 겪은 부당한 계약 조건과 기획사의 횡포를 ‘폭력과 피해’로 사회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발언한 적이 없고, 따라서 성 접대를 알선․강요한 자들이 사법 처리 되거나 성 접대를 받은 자들이 사법 처리된 경우도 없다. 고인의 죽음을 수사했던 경찰 조사에 참고인으로 진술했던 관련인의 진술을 보면, 강요된 성 접대의 현장에는 장자연 씨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 연예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성 접대의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그녀들의 경험은 ‘사회적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공한 스타이든, 신인 여배우이든 간에 여자 배우들에게 그들의 배우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가부장적 규범 안에 조신하게 운신해야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 접대’나 ‘성적 피해’가 자기 이름과 연루된다면 그것은 성차별이나 성폭력, 성매매가 아니라 성공을 위해 자발적으로 몸을 파는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자’로 쉽게 해석될 것임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대중들의 눈과 여성 연예인들의 개인 신상 정보와 루머를 국민들의 ‘알권리’로 포장하여 기사화하는 언론들을 접하는 것은 익숙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네티즌, 혹은 시청자라는 중립적 평가자의 이름으로, 혹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수 많은 성차별적, 여성 혐오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시청률이 왕’이라는 불문율 속에서 여성 연예인들에 대한 성차별적 통념은 재생산된다. 그리고 그 통념으로 인해 고립되는 여성 연예인들이 처한 연예계의 부당한 조건과 환경은 비가시화 되며, ‘연예계는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 속에서 탈 정치화된다. 이런 식의 탈정치화는 여성 연예인들에게 성접대를 강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연예계 산업의 구조를 권력과 여색으로 낭만화 하여 그 구조의 변화를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일말의 변화 가능성을 찾지 못하는 여성 연예인들은 고립되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고 장자연 씨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되, 그것이 특정한 몇몇 권력자’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책임이 면피될 수 없음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증거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그 수많은 여자 연예인들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명예와 인권은 죽어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변화의 실마리는 ‘안티-조선’을 넘어선 곳에서

 

고인의 죽음을 수사하던 경찰에 대한 회의적 여론이 높아지던 3월 중순, 공중파 방송(SBS)에서 여우비(女優悲)-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며 잠시 화제가 되었다. 여자 배우 문정희 씨가 MC겸 공동연출을 맡아, 직접 한국의 여자 배우들을 만나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문희, 윤여정, 채시라, 유호정, 한혜진 등 유명 여자 배우들이 인터뷰에 응해 솔직하게 털어 놓은 내용이 담겼고, 심야시간대에 방송되는 다큐로서는 보기 드물게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 연예인의 삶과 일에 대한 고백이 그렇게 새로운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브라운관에서 접하는 ‘캐릭터’나 ‘이미지’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개별자로서의 여자 연예인들의 삶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나 버라이어티 쇼에서는 이야기하지 못했던 ‘연예계(연예산업)’에 대한 그들의 파악과 평가, 여자 연예인들에 대한 대중들의 모순적인 기대와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는 여성 연예인들을 보면서, 이미지 뒤에 있는 ‘연예계 종사자’들의 삶의 목소리가 들렸다. 캐스팅으로부터 아무도 자유롭지 않은 스타 시스템이라는 노동 조건에서 배우로서의 자부심과 전망을 갖기 위한 구체적인 삶의 목소리와 고민을 들으면서, 저들이 처한 노동 조건이 부당하고 차별적이라면, 당연히 피해와 차별로부터 구제받고 권리를 찾아야한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이 가능한 내용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5월 22일 열렸던 '장자연씨를 죽음으로 내몬 성착취 침묵의 카르텔 어떻게 깰 것인가' 토론회에 참석하였던 문제갑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하 한예조) 정책위원장은 한예조의 조합원 중 몇몇 스타들은 억대 수입을 올리지만, 전체 69%는 1년에 1천만원도 벌지 못하며, 이와 같은 경쟁구조 때문에 여성연예인들이 성착취 상황을 폭로하기 어렵다는 점을 언급했다. 하지만 문위원장은 “폭로를 해도 캐스팅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호받을 수 있다면 봇물처럼 (성착취) 피해 경험이 터져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자 연예인들이 우려하는 캐스팅 불이익을 누가 어떻게 막아줄 수 있을 것인가? 부당한 연예계의 현실을 폭로하는 여성 연예인들의 정치적 발언을 우리는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첫째. 스타시스템의 관점에서 본다면, 방송은 스타가 대중들에게 노출되고 수익을 창출하는 유통의 역할을 한다. 제작사, 방송사, PD, 감독들에게 연예계의 성차별적 관행을 끊어달라고 부탁한다면 그것이 가능할까? 사실 방송이나 영화라는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제작자들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 배우들의 역할은 끔찍할 정도로 ‘가부장적 판타지’를 반영한다. 어리고 예쁘고 적당히 섹시한 여배우들은 여자 주인공이 되지만, 나이가 들어 갈수록 여자 배우들은 자기 가족 이기주의의 최첨병 역할을 하는 못된 시어머니 역할만이 배정된다. 여자 주인공 옆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은 순진한 남자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정상 가족에 균열을 내지만 결국 파멸하거나 눈물의 회개를 한다. 어머니와 아내, 가부장적 가족을 유지하는 시어머니, 그 가족의 갈등을 제공하는 팜므파탈 이라는 구도를 반복하는 ‘여성 연예인’ 캐릭터들 속에서 여자 연예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자신의 연기 색깔을 키워가기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보다 어렵다. 제작자들이 충실히 구현한 ‘가부장적 세계’를 가상으로 채워가는 여자 연예인들의 필모그라피는 따라서 단선적이 되기 쉽다. 한편, 제작자들은 종종 외압이 작동함을 토로하며 여자 배우 캐스팅에서 ‘연기력’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평가하지 못 하게 하는 상황을 탓한다.

 

둘째. 그렇다면 스타 산업의 생산자에 해당하는 기획사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한예조는 현재 연예인과 연계 기획사와의 계약을 위한 표준약관 제정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요구한 상태이다. 기획사가 연예인들과 공정 계약을 맺고, 기획사는 소속 연예인들을 ‘띄우기’ 위해 외부 권력에 ‘성상납’을 시키기보다, 실력을 키우도록 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기획사가 난립하고, (매해 대중문화 관련 학과와 각종 교육기관, 기획사에서 배출되는 인원까지 포함한다면) 스타가 되기 위한 경쟁률이 크게 3만대 1 수준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현재의 이러한 부당한 관행이 기획사들의 자성적 노력으로 사라질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셋째. 소비자인 시청자들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청자들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고, 시청자들의 역할을 어떻게 정치적 힘으로 결집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여자 연예인들을 성적으로 등급화 하여 연예계에서 퇴출시키는 분위기가 온존한다면 여자 연예인들이 자신의 부당한 경험을 사회적으로 드러내어 해결하는 일은 요원할 뿐이다. 여자 연예인들이 실력으로 평가받기를 바라고, 부당한 노동 조건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의 목소리가 모아진다면 할 수 있는 일들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특정 방송사에서 ‘성적 물의를 일으킨’ 여배우를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킨다면 그 방송사에 항의를 하고 실력행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여성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제작자와 감독, 피디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아질 수도 있다. 자연히 그러한 제작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자신의 경력을 쌓는 여자 연예인들도 생길 것이다. 성차별적인 통념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대중들 뿐만 아니라 배우로서의 자신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대중들이 있다면 여성 연예인들이 자신의 캐스팅 불이익을 고려하여 정치적 발언을 아끼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 연예인들을 남성 판타지 안의 각본 안에서 일회적으로/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제작자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더불어 그런 제작자들을 낙후시키는 시청자들이 드러난다면, 그 과정은 새로운 시각으로 문화 컨텐츠를 제작하는 제작자들의 더 많은 등장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고인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가 집중해야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스타가 되기 위해 살인적인 경쟁률을 통과해야 하는 연예계 스타 시스템, 난립하는 연예 기획사, 방송 캐스팅에서 외압을 행사해왔던 대한민국의 권력자들, 여성 연예인들에게 덧씌워지는 성차별적 통념들. 이것들은 모두 신인 여자 배우를 계속 ‘취약하게’ 만들어가는 이 조건들이다. 해결이 어려워 보인다고 하여도 포기할 수 없다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변화의 시작을 위한 싸움의 전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하고 움직여야 할 때이다. 더 이상 ‘죽어야 사는 여성 연예인’의 인권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