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상] 여성의 선택권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동아일보 10. 03. 04)
■ 정부가 실효성 있는 후속계획 내놔야
■ 여성의 선택권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에서 설립한 원스톱 지원센터에서조차 성폭행에 의한 피해인지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며 고소하지 않으면 시술할 수 없다고 손을 내젓는다. 이제는 낙태 수술을 받기 위해 국가에 나의 피해를 보고해야 하다니, 비밀을 보장하며 피해자를 지원하겠다던 정부 지원책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국내 성폭력 피해 신고율이 6∼7%에 불과한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끊이지 않는 사회의 편견 때문이다. 현행법으로도 보장되어 있는 낙태조차 거부당하고 하루하루 애타는 심정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는데 정부는 나 몰라라 뒷짐이나 지고 있는 형국이다.
종합계획에서는 실효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낙태를 줄이기 위해 출산과 양육을 지원하는 사회적 지원책이 절실하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런 대책의 일환으로 청소년 한부모의 양육을 지원하기 위해 월 10만 원의 아동양육비와 월 2만4000원의 의료비를 지원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10만 원의 아동양육비를 믿고 사회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어려운 청소년이 출산을 선택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부의 종합계획에 임신 낙태 출산 초기양육의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낙태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위험요인을 생명 경시 풍조와 성 접촉 증가로 꼽으면서 여성을 성 절제와 생명존중을 배워야 하는 계몽의 대상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여성이 무분별하게 성 접촉하고 생명을 경시하기 때문에 낙태가 이루어졌다며 또다시 여성 비난으로 이 사태의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성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개선해야 할 인식은 생명 경시가 아니라 비혼모나 10대 출산에 대한 낙인이며, 부끄러워해야 할 당사자는 낙태를 결심하는 여성이 아니라 보육과 교육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사회 경제적 사유를 낙태 허용 사유에 포함시킬지가 가장 뜨거운 쟁점인데도 종합계획에는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나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기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낙태 결정은 태어날 아이, 이미 태어나 있는 가족과 주변인, 여성이 감내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통합적인 고찰 끝에 내리는 책임 있는 결론이며 바로 여기에 사회 경제적 사유가 자리 잡는다. 여성을 단속과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면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모두가 한마음으로 원하는 낙태 감소 목표는 이룰 수 없다. 고발과 처벌이 해답이 아닌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