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태아의 생명권 &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협소한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
이은심 한국성폭력상담소
2010년 2월3일 오전 10시, 프로라이프 의사회(진오비)는 낙태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병원 세 곳을 고발조치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에서는 태아의 생명의 소중함을 내세워서 불법낙태를 강력하게 근절하겠다고 주장한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모체의 건강을 위협하는 경우 외에 모든 낙태를 금지해야하며, 심지어 강간당한 여성들도 다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한다는 극단적 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낙태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는 사회 환경 속에서 형사처벌만을 고집하는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행보는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절박함과 위급함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재생산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으며, 단지 아이를 임신하는 도구로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낙태문제와 관련해 미국에서는 태아의 생명권에 기반한 pro-life측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기반한 pro-choice측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1970년대 한국의 경우 정부에서는 낙태를 인구조절정책의 일환으로, 일종의 피임법처럼 널리 권장하였고, 한국에서의 낙태는 별다른 논쟁 없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다소간 무임승차했다고 볼 수 있는 낙태논쟁은 저출산문제로 인해 정부의 태도가 바뀌자마자 지금에 와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낙태를 반대하는 논자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내세워 낙태는 살인이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으며,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이미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과연 수정란 그 자체가 바로 태아이며 생명이라면, 생명의 맹아를 가진 정자와 난자 또한 생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자위를 통해서 정자를 배출하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로 생명을 제거하기 때문에 살인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렇듯 원칙론에 근거한 생명권은 극단적인 결론을 도출하여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논의를 한정할 뿐만 아니라, 생명권이 기반하고 있는 복잡미묘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제거하고 있다.
또한 낙태반대의 이유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의 근저에는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통념이 자리잡고 있다. ‘낙태는 문란한 성관계를 가지다가 덜컥 임신하게 된 무책임하고 젊은 여자애들이나 하는 것이다’라는 가부장적인 통념이 그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낙태를 하는 이기적인 여자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친다면 낙태가 줄어들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2005년 보건복지부 연구에 따르면 미혼여성보다 기혼여성들이 더 많이 낙태를 하며, 1회 이상 반복적으로 낙태를 하는 숫자도 기혼여성이 더 많다1).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기혼여성들이 더 많이 낙태를 하는 현실은 이 사회가 얼마나 아이를 키우기 힘든 환경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낙태가 단지 생명을 경시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단순논리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낙태가 이루어지는 사회경제적 이유에 대한 분석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이성애섹스에서 아이는 여성이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남녀 모두가 양육의 책임이 있지만, 혼외관계 임신의 경우 많은 남성들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간다. 낙태반대운동연합의 실무자조차도 10년간 자신이 도운 100여명의 비혼모 출산 중에서 남성이 책임지겠다고 나선 경우는 단 두 번뿐이었다고 증언한다2). 하지만 낙태를 반대하는 논자들은 이 모든 사회경제적 이유들을 외면하며, 원칙론적이고 극단적인 생명론을 내세워 마녀사냥 하듯이 여성만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낙태를 둘러싼 많은 논의들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는 낙태가 일어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태아의 보호에도 실패하고 있다. 태아는 여성에게 자신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아직은 여성의 신체 내부에 머물러 있는 잠재적 인간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고려하여, 통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낙태는 여성의 삶에 대한 통제가능성과 뗄 수 없는 문제로써, 여성의 신체적 통합성에 기반한 몸의 결정권과 프라이버시권∙평등권∙재생산권 등을 두루 검토하여 여성의 근본적 권리중의 하나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3). 태아의 생명권 &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협소한 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대학 내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어본다.
1) 고려대학교(2005),『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및 종합대책 수립』, 보건복지부.
결혼상태: 미혼 42.0%, 기혼 58.0%
시술이유: 미혼 96.0% - 사회경제적 이유(미혼이어서, 미성년자, 경제적
어려움)
기혼 76.7% - 가족계획(자녀불원, 터울조절, 원하는 성별 아님)
시술 당시 반복 낙태(이전 낙태횟수 1회 이상): 기혼 57.5%, 미혼 49.5%
시술 당시 현존 자녀수 0명: 전체 45.4%, 기혼 10.8%
2)「인공임신중절의 현황과 대책」(2005.9.13) 공청회에서 낙태반대운동연합
공동실무책임자인 김현철씨의 발언; 오승이(2007), “법여성주의를 통해 본
낙태죄의 비판적 고찰”, 서울대학교 법학과 석사학위논문 재인용.
3) 오승이(2007), “법여성주의를 통해 본 낙태죄의 비판적 고찰”, 서울대학교
법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