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 성폭력범 강력처벌을 피해자가 원한다는 가정에 대하여
[벼리] 성폭력범 강력처벌을 피해자가 원한다는 가정에 대하여
김민혜정
3월 31일 우여곡절 끝에 288차 국회 2차 본회의가 끝났다. 최근 부산 김00 성폭력 사건의 여파로 시급히 정리된 성폭력관련 법률개정안의 ‘대안*’은 찬반투표를 곤혹스럽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질적이고 방향도 철학도 제각각인 개정 내용들이 세트로 한데 묶여 있었다.
“전자발찌가 확대되어 환영하는 입장이지요?” “징역상한이 높아지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겠죠?” 하도 많이 듣는 질문이라 옆구리를 찔린 채 그냥 절이라도 해볼까 싶지만, 반복해서 말해왔다, 사실과 다르다. 다시 말해야겠다, 그렇지 않다고.
극형주의는 성폭력을 외면한다
가해자를 극형에 처하면 피해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할 거라는 가정. 사형을 다시 집행하거나, 전자발찌를 형 만료된 이에게 소급해서 채우거나,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면 속이 다 시원할 거라는 가정은, 일견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누구의 입장에서 그런지는 빼놓고 이야기된다.
성폭력 사건에 분노하는 사람 중 많은 경우는 성폭력이 있다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다. 평소에는 듣고 싶지도 않아 하다가 어쩌다 알게 된 경우에는 가해자를 죽여 버리겠노라고 나선다. 사실 그 가해자는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를 잡고 더 더 자세한 상황 묘사를 요구하던 이들은, 들을수록 괴로워하다 급기야 스스로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그러게 거길 왜 따라갔냐, 그런 옷을 왜 입었냐, 너도 좋아했냐,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제정신이냐, 이런 비난은 전형적인 2차 가해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가해자를 ‘무죄’로 만드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경험한 이에게 먼저 귀 기울이지 않는, 훨씬 앞서 나가는 분노는 혐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성, 보호되었어야 하는데 더렵혀진 성에 대한 혐오는 피해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법정형이나 가중처벌 형량이 높아지면 성폭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경계는 더 심해지고, 가해자에 대한 동정론은 더 깊어진다는 것을 경험해왔다. 전자발찌를 소급적용하면? 소수 가해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희생 책을 단행할수록, 그 부담을 피해자에 대한 공격과 비난으로 푼다는 것 역시 익히 보아왔다.
김00와 조00를 몇 차례나 광화문 복판에서 찢어죽이고 말려죽여야 한다던 분노들은 역설적으로 성폭력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쏟아지는 글들 속에서 성폭력 경험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나? 한번 성폭행을 당하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는 일방적인 낙담, 낙인과 저주 속에서 성폭력 경험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잘 살고 있는 나를 응원해달라고, 성폭력이 점점 희미한 옛일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하면 과연 의미있게 받아들여질까.
친고죄, 이야기하지 않을 ‘자유’
3월 23일 국회에서 성폭력상담소, 여성단체,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등은 함께 ‘비친고죄 개정이 우선이다’ 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자발찌, 사형집행, 화학적 거세가 ‘성폭력 문제 해결’ 방책이라며 논의되고 있지만 친고죄 폐지안은 개정안이 가끔 발의되지만 논의조차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고, 이번에도 본회의에 상정 되지 못했다.
사실 성폭력 신고율은 7.1%에 지나지 않는다. 저 법들이 시행된다 해도 그 해당되는 사례는 전체 성폭력의 발생 중 극히 미미한 퍼센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장벽에는 현행 성폭력이 형법상 친고죄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가 있다.
친고죄는 본인만이 고소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5개 강력범죄 중 하나라고 강조하면서도, 이것이 문제인지 아닌지, 내 잘못인지 아닌지를 먼저 충분히 고민하고 오라고, 정말 정말 확신 하냐고 피해자에게 되묻고 있는 셈이다. 이 사이 피해자는 수차례 고소를 뭐 하러 하냐는 주변의 만류, 자기 자신의 포기와 낙담을 경험한다. 친고죄 존치론자들은 “피해자에게도 사생활이 있는데 어떻게 다 공개하라는 거냐” 라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극도로 강조하는 13세 미만 어린이 피해자나 장애인, 특수강간의 경우 이미 비친고죄 이다. 누구의 어떤 사적 자유를 말하는 건가.
또 다른 존치주장은 “사법절차상 피해자에게 진술하게 하고 반복하면서 두 번 상처를 주는 제도가 개선되어 있지 못한데도 비친고죄로 바꾸는 것은 시기상조다” 라는 내용이 있다. 제도는 바뀌어야 하고, 반복진술의 문제는 현행 비친고죄의 대상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반론 끝.
여성들의 선택권,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그 내용은 ‘말하지 않을 자유’를 일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친고죄의 영향은 비친고죄 유형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친족, 장애인, 13세 미만 성폭력에서도 피해자를 의심하고 합의를 크게 강조한다든지, 왜 굳이 고소나 신고를 했냐고 신고를 함께 한 이를 힐난하는 문화는 이미 팽배해있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법인가?
극소수의 가해자를 격리하고 회피, 혐오하는 것과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을 쏟아 붓는 양 극단의 사이에서 피해자들이 원하는 형사 처벌에 관한 대책이 있을까.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실 그런 일이 왜 일어난 것인지 알고 듣고 싶다. 80%의 성폭력은 가까운, 알고 있던 관계의 사람이 시도한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 자신에게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기로 한 것인지 들어보고 싶다. 모르는 관계에 있던 가해자 역시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왜 생긴 거니?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주변사람들이 형식적으로 던져 주문처럼 외기 보다는, 가해자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스스로 골몰해 깨닫고 해명하고, 반성하기를 바란다.
내가 겪은 일을 말하고 싶다. 이것만은 단 하나의 비밀로 간직하라면 그것 때문에 속병이 날 것 같다. 다른 이들과 도움, 지지, 위로를 나누려면 일단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야기를 듣게 되는 과정에서 주변인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성폭력이 자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내 마음에 공감하고, 가해자의 생각도 알게 되어 그를 다 같이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해결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소수의 가해자를 극단적으로 처벌하면서, 그런 극단적인 처벌을 할 수 있는 피해사건은 무엇인지 피해자를 조각내고 의심하고 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성폭력의 현실에 차분하고 공평하고도 전면적으로 대처하면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말’을 나누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피해자도 더 주체적인 지위에서 능동적으로 형사처리 과정에 참여하고, 가해자의 말을 반박하는 언어가 재판과정에서 더 많이 오가고, 많은 이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면서 생각이 변화되고, 가해자 역시 차분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문제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된다면, 솔직히 형량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전자발찌가 확대되어 환영하는 입장이지요?” “징역상한이 높아지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겠죠?” 하도 많이 듣는 질문이라 옆구리를 찔린 채 그냥 절이라도 해볼까 싶지만, 반복해서 말해왔다, 사실과 다르다. 다시 말해야겠다, 그렇지 않다고.
극형주의는 성폭력을 외면한다
가해자를 극형에 처하면 피해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할 거라는 가정. 사형을 다시 집행하거나, 전자발찌를 형 만료된 이에게 소급해서 채우거나,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면 속이 다 시원할 거라는 가정은, 일견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누구의 입장에서 그런지는 빼놓고 이야기된다.
성폭력 사건에 분노하는 사람 중 많은 경우는 성폭력이 있다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다. 평소에는 듣고 싶지도 않아 하다가 어쩌다 알게 된 경우에는 가해자를 죽여 버리겠노라고 나선다. 사실 그 가해자는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를 잡고 더 더 자세한 상황 묘사를 요구하던 이들은, 들을수록 괴로워하다 급기야 스스로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그러게 거길 왜 따라갔냐, 그런 옷을 왜 입었냐, 너도 좋아했냐,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제정신이냐, 이런 비난은 전형적인 2차 가해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가해자를 ‘무죄’로 만드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경험한 이에게 먼저 귀 기울이지 않는, 훨씬 앞서 나가는 분노는 혐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성, 보호되었어야 하는데 더렵혀진 성에 대한 혐오는 피해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법정형이나 가중처벌 형량이 높아지면 성폭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경계는 더 심해지고, 가해자에 대한 동정론은 더 깊어진다는 것을 경험해왔다. 전자발찌를 소급적용하면? 소수 가해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희생 책을 단행할수록, 그 부담을 피해자에 대한 공격과 비난으로 푼다는 것 역시 익히 보아왔다.
김00와 조00를 몇 차례나 광화문 복판에서 찢어죽이고 말려죽여야 한다던 분노들은 역설적으로 성폭력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쏟아지는 글들 속에서 성폭력 경험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나? 한번 성폭행을 당하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는 일방적인 낙담, 낙인과 저주 속에서 성폭력 경험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잘 살고 있는 나를 응원해달라고, 성폭력이 점점 희미한 옛일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하면 과연 의미있게 받아들여질까.
친고죄, 이야기하지 않을 ‘자유’
3월 23일 국회에서 성폭력상담소, 여성단체,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등은 함께 ‘비친고죄 개정이 우선이다’ 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자발찌, 사형집행, 화학적 거세가 ‘성폭력 문제 해결’ 방책이라며 논의되고 있지만 친고죄 폐지안은 개정안이 가끔 발의되지만 논의조차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고, 이번에도 본회의에 상정 되지 못했다.
3월 23일 국회에서 성폭력상담소, 여성단체,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등이 개최한 ‘비친고죄 개정이 우선이다’라는 제목의 기자회견 모습.
사실 성폭력 신고율은 7.1%에 지나지 않는다. 저 법들이 시행된다 해도 그 해당되는 사례는 전체 성폭력의 발생 중 극히 미미한 퍼센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장벽에는 현행 성폭력이 형법상 친고죄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가 있다.
친고죄는 본인만이 고소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5개 강력범죄 중 하나라고 강조하면서도, 이것이 문제인지 아닌지, 내 잘못인지 아닌지를 먼저 충분히 고민하고 오라고, 정말 정말 확신 하냐고 피해자에게 되묻고 있는 셈이다. 이 사이 피해자는 수차례 고소를 뭐 하러 하냐는 주변의 만류, 자기 자신의 포기와 낙담을 경험한다. 친고죄 존치론자들은 “피해자에게도 사생활이 있는데 어떻게 다 공개하라는 거냐” 라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극도로 강조하는 13세 미만 어린이 피해자나 장애인, 특수강간의 경우 이미 비친고죄 이다. 누구의 어떤 사적 자유를 말하는 건가.
또 다른 존치주장은 “사법절차상 피해자에게 진술하게 하고 반복하면서 두 번 상처를 주는 제도가 개선되어 있지 못한데도 비친고죄로 바꾸는 것은 시기상조다” 라는 내용이 있다. 제도는 바뀌어야 하고, 반복진술의 문제는 현행 비친고죄의 대상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반론 끝.
여성들의 선택권,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그 내용은 ‘말하지 않을 자유’를 일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친고죄의 영향은 비친고죄 유형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친족, 장애인, 13세 미만 성폭력에서도 피해자를 의심하고 합의를 크게 강조한다든지, 왜 굳이 고소나 신고를 했냐고 신고를 함께 한 이를 힐난하는 문화는 이미 팽배해있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법인가?
극소수의 가해자를 격리하고 회피, 혐오하는 것과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을 쏟아 붓는 양 극단의 사이에서 피해자들이 원하는 형사 처벌에 관한 대책이 있을까.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실 그런 일이 왜 일어난 것인지 알고 듣고 싶다. 80%의 성폭력은 가까운, 알고 있던 관계의 사람이 시도한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 자신에게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기로 한 것인지 들어보고 싶다. 모르는 관계에 있던 가해자 역시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왜 생긴 거니?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주변사람들이 형식적으로 던져 주문처럼 외기 보다는, 가해자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스스로 골몰해 깨닫고 해명하고, 반성하기를 바란다.
내가 겪은 일을 말하고 싶다. 이것만은 단 하나의 비밀로 간직하라면 그것 때문에 속병이 날 것 같다. 다른 이들과 도움, 지지, 위로를 나누려면 일단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야기를 듣게 되는 과정에서 주변인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성폭력이 자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내 마음에 공감하고, 가해자의 생각도 알게 되어 그를 다 같이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해결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소수의 가해자를 극단적으로 처벌하면서, 그런 극단적인 처벌을 할 수 있는 피해사건은 무엇인지 피해자를 조각내고 의심하고 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성폭력의 현실에 차분하고 공평하고도 전면적으로 대처하면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말’을 나누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피해자도 더 주체적인 지위에서 능동적으로 형사처리 과정에 참여하고, 가해자의 말을 반박하는 언어가 재판과정에서 더 많이 오가고, 많은 이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면서 생각이 변화되고, 가해자 역시 차분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문제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된다면, 솔직히 형량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닐 것이다.
‘대안*’
여러 의원들이 각자 법률개정안을 발의하면, 해당 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같은 법률의 여러 개정안들을 하나의 안으로 만든다. 이것을 ‘대안’이라고 부른다. ‘대안’이 본회의에 상정되면 전체 의원들은 ‘대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