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 후기 (1) 크리스마스이브
12월 24일.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팀은 크리스마스 이브, 데이트의 거리 홍대로 나갔습니다.
첫 번째 거리캠페인! 매주 회의를 하면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어떻게 말할 것인지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첫 거리캠페인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성폭력적 상황을 세 가지 판넬로 제시하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팜플렛과 스티커를 나누고, 젤리와 핫팩으로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당신이라면?
1) 호감이 있는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다 상대방에 취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상대방과 성관계를 할 수 있습니까?
2) 떨리는 데이트를 앞둔 당신에게 흥분제가 생겼습니다. 성공적인 성관계를 위해 상대방 모르게 음식에 흥분제를 넣어도 될까요?
3) 당신의 데이트 상대는 도수가 낮은 달콤한 술을 마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관계를 쉽게 하기 위해 달콤하지만 도수가 높은 술을 몰래 주문해도 될까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시작한 우리의 대회는 어렵게 시작했다. 장소를 찾지 못해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정착한 곳은 공교롭게도 술집이 밀집해있는 거리 앞이었고, 과연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쓸까 싶을 정도로 많이 걱정했다.
하지만 관심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왜 골뱅이 안주를 시키는 게 나쁜 거에-그요?"라는 질문부터 "그래서 그런 흥분제는 어디서 파나요?"라는 불쾌한 질문까지 여러 질문을 받으며 우리의 대회는 진행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거 어디서 하나요?" 라고 물어보고 "한국성폭력상담소요" 라고 대답하니까 눈빛이 따뜻해지시던 분. 처음에는 낯가리고 쭈뼛쭈뼛해하던 나도 나중에는 열심히 다른 자원활동가 분하고 "뭐라고? 설문조사를 하면 핫팩을 준다고?" 이런 콩트식 대화를 나눌 정도로 재미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관계를 좀 더 쉽게 맺기 위해 몰래 도수가 더 높은 술을 시키는 것"을 술/약물에 의한 강간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흥분제(라고 말하는 데이트강간약물)에, 혹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과의 섹스를 강간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적당히" 술에 취한 사람은 동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한편으로는 그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슬퍼졌다. 커플끼리 왔을 때 남성분이 YES에 스티커를 붙이려 하는데 여성분이 "뭐야 난 이런 거 싫어"라고 해서 NO에 붙이게끔 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다른 마음 아팠던 예로 남성분들 여럿이 온 경우 한 남성분이 NO에 붙이자 다른 남성분들이 "진심을 말해봐"라고 킥킥 웃었을 때가 있었다. 그분의 진심은 아무도 모르는 것인데, 마치 YES에 붙여야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그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끝나고 정리하고 사진을 찍는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게 뭐에요?"라고 묻고 스티커를 붙였다. 모든 분들의 열정적인 참여에 감사를 드린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NO에 스티커를 (하지만 이상적으로는 아무도 YES에 스티커를 붙이지 말았어야 했지만) 붙였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만족했던 점은 이 둘이었던 것 같다.
_겨울(기획단)
크리스마스 이브에 홍대에서 캠페인을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조금 두렵기도 했습니다. 연인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혹여나 캠페인의 취지에 공감하지 않으시는 분이 캠페인에 불만을 가지고 시비를 걸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술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의 주요 타겟인 연인들이 많은 때와 장소를 선택한 만큼 캠페인의 효과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걱정반 설렘반으로 캠페인을 준비하였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이 낸 여러 아이디어들을 조직하여 하나의 깔끔한 컨텐츠로 팜플렛, 피켓, 몸자보, 스티커를 제작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정말 멋진 기관입니다. 저를 포함한 열명 남짓의 자원활동가들도 모두 열정적으로 캠페인에 임하였던 것 같습니다.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관계는 성폭력이고 강간! 이라는 멘트가 한시간 반 내내 홍대 거리에 울려퍼졌고, 정말 많은 시민분들이 호의적으로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관계에 대한 인식조사를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세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은 ‘NO’였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YES 응답이 많았습니다. 어떤 시민들은 ‘술, 약물을 이용한 섹스는 강간!’이라는 피켓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아닌데..’라며 이를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반응들은 아직 강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협소하고,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는 강간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응답을 통해 두 달 동안의 남은 자원활동기간 동안 더 많은 캠페인과 그 밖의 다양한 기획을 통해 강간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색다르고 의미있는 활동을 하여 더욱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습니다 :)
_그녹(기획단)
아니나 다를까, 날씨가 매우 추웠다. 평소의 크리스마스이브라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홍대에서 나는 얼어붙은 손발을 웅크리며 길거리에 서있었다. 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캠페인을 하겠다고 모였다.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니었다. 길 한 편을 차지하고 피켓을 내보이며 술에 취한 사람의 동의는 동의가 될 수 없다고, 그건 강간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십여 명이나 있다는 사실은 나를 든든하게 만들었다.
캠페인이 진행되는 2시간 동안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보다 무시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솔직히 나는 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 와서 그게 왜 강간이 되는 거냐고, 그럼 술 마신 사람과는 섹스하면 안 되는 거냐고 소리 지르며 날 밀치는 장면을 상상해왔다. 그리고 그 상상 속의 상대방은 대체로 남성이었다.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의 물리적 폭력에는 제대로 대항할 수 없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상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남성들의 눈을 마주치며 캠페인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했다.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지나친 우려를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즐겁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동안 이 말을 믿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분노에 못 이겨 움직이고 있었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캠페인은 즐겁다. 그것도 매우. 우리를 스쳐간, 그리고 캠페인에 참여한 사람들 전부가 우리의 메시지를 받아들였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대다수는 곰젤리에, 그리고 핫팩에 이끌려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활동이 크리스마스이브의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_수진(기획단)
이날은 기획단들 뿐만 아니라, 이메일로 연락주셔서 당일에 함께해주신 분들,
트위터를 보고 찾아오신 분들도 거리캠페인에 함께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