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셀프디펜스 후기
작성: 척 (퀴어셀프디펜스 참여자)
‘퀴어셀프디펜스’에 대한 기대: “더는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
‘퀴어셀프디펜스’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 이거다!’ 싶었지만, 주관이 한국성폭력상담소라는 것을 알고 어리둥절했었다. ‘이런 게 필요하긴 했지만, 성폭력상담소가 왜?’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대와 궁금증을 안고 퀴어셀프디펜스에 참가신청서를 넣었다.
내가 퀴어셀프디펜스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작년 퀴어문화축제에서 발생한 혐오폭력의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맞으면 어떡하지’를 걱정하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차례 폭력상황과 대처를 상상하고 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진짜로 주먹이 날아오니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던 것 같다. 가장 기가막혔던 건 그 상황을 경찰이 전부 지켜보고 있었으면서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실제로 발생했는데도 ‘담당자가 아니다’라는 말과 ‘시위 참가자 간의 소동(?)이니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번 자기방어훈련의 참여가 나에겐 그 때 풀지 못한 억울함과 독기를 진짜 무기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작업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격을 위한 훈련은 아니었다.)
마음열기를 진행해주신 류은찬 님
6/26 1주차
마음열기..?
“어떤 필터나 어플도 쓰지 마시고 자기 얼굴을 정면으로 찍어보세요.”
“......(일동 당황+수치사)”
처음 모인 자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동그랗게 모여 앉았지만, 다들 자기가 길냥이인 양, 지나가는 행인을 마주친 것처럼 서로 경계했다. 뭐, 일단 그러라고 하니까 우리는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채로 일단 셀카를 찍었는데, 모두가 필터 하나 깔리지 않은 자기 사진이 생경하고 웃겨서 핸드폰을 쥐고 킥킥 웃었다.
“자, 이제 그 사진에 드러난 자기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어주세요.”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성의껏 우리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얼굴이 동그래요” “약간 수염이 있는 편이에요” “눈이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하고 있어요” “양 눈썹의 길이가 달라요” “가르마가 잘 타져 있어요” 그리고 그 묘사는 무작위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무려! 그림으로 탄생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서 좋았거나 어려웠던 점을 설명하면, 그 묘사의 주인이 자기소개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림을 전하면서 우리들 사이에 온갖 죄송함이 오갔는데, 그날이 아마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죄송했던(?) 날이 아닌가 싶다. 이후에는 바닥에 상대를 패대기쳐도 서로에게 별로 미안해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첫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죄송함 총량을 다 써버려서 그런 것 같다.
깊은 상처와 원망..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의심만을 남긴 우리들의 초상화.., 넝..담~ㅎ ( ͡° ͜ʖ ͡°)..
소개가 끝나고 우리는 조금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각자에게 젠더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야기 했다. ‘퀴어’인 우리에게 젠더는 어떤 의미일까? 시간이 부족해서 젠더자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각자 속한 곳에서 젠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느껴지는 한계에 공감했다. 마지막으로, 위기상황에서 우리가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효과적인 위기대처를 위해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
1.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의 패턴에 가까운 루트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재구성
2. 장을/영화를/산책을 본(간)다면 주로 어디로 가는가?
3. 평일과 주말의 차이는?
4. 직접 겪었거나, 특정 시간대나 특정 위치에서는 좀 더 위험상황이 있거나 가능성이 있는지를 유추
5. 내 주변의 위험/안전 포인트 체크: 사람, 안전기관, 경비실, 파출소, 편의점 CCTV, 비상호출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6. 위험상황일 때 실제로 안전보장을 요청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7. 내가 주로 다니는 길 이외에 위험을 피해서 집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8. 위험지대에서 안전지대까지 어떤 길로, 얼마 만에 갈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7/3 2주차
밀기.. 밀기.. 또 밀기.. 그리고 밀기..
2주차는 밀기와 버티기의 굴레였다. 나는 이 시간에는 참여를 못했었는데, 전해들은 바로는 세 시간동안 끝없는 ‘밀기-버티기’의 향연이었고, 체력이 소진된 사람들이 뒤풀이에 가서 의자에 앉아 있질 못하고, 녹아내렸다는 소문이 있다. 직접 참여했던 친구의 말을 들어보자.
“엄, 두 번째 시간엔 어땠는지 소감을 알려줘.”
“처음으로 몸을 움직여 본 날이네. 일단 목소리 크게 해서 소리 질러 본 날인데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 나는 원래 사람들 많은 데서 목소리 크게 내는 거 되게 못하는데 그걸 돌아가면서 질러보고 나니까 내가 큰 소리 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고, 그 이후부터는 큰 소리 내는 게 안 어려워.”
“좋은 변화다! 밀기를 배운 것 자체는 어땠어?”
“밀기는 며칠간 근육통 있을 정도로 팔근육을 많이 쓴 거 같은데 류운 선생님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걸 밀어낼 때 그 경험이 무서웠지만 동시에 짜릿했어. 훈련인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다가올 때는 진짜 무섭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진짜 전력으로 밀어냈던 거 같아.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훈련하고 나니까 내가 "할 수 있구나"라는 경험이 남더라고. 그게 중요한 거 같아.”
4주간 자기방어 기술을 알려주신 류운 선생님
7/10 3주차
‘조금씩 경계를 허물다’
3주차 훈련부터는 본격적으로 자기방어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익히고, 공격과 방어의 역할을 나누어 실습도 해봤다. 한 번에 많은 기술을 배워서 과연 기억에 남을까 싶었지만, 머리로 세세한 동작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직접 몸으로 익혀두니 어설프게나마 연습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우리들 중 다수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조차 감이 없었는데, 실제로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모면 혹은 방어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움츠리고 있던 몸을 점점 펼칠 수 있었다.
달려들고, 부딪히고, 싸우면서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가졌던 경계는 어느새 허물어져 있었다. 내가 누군가의 몸을 쳐내고 꺾고 넘어뜨리고 밀고… 매일 몸을 통해(?) 살고 있지만, 내 몸을 그렇게 써본 적은 처음이었다. 몸을 써봤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한 자신감이 붙었던 날이다. 그리고 무려 주짓수를 배우기로 결심한 날이기도 하다!
자기방어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
자기방어훈련에 있어서 ‘퀴어’라는 특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퀴어당사자들에게 있어 퀴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은 꽤 중요한 조건이다. ‘보통의’ 관계맺기에 있어서는 상대가 성적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있는지 없는지, ‘좋은’사람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내가 누구에게, 나를 얼마나 드러낼지를 끊임없이 계산하게 된다. 그런데 일단 함께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퀴어로 좁혀지고 났을 때에는 묘한 안도감이 든다. ‘일단 여기서는 괜찮아’라고 하면 표현이 좀 그런가.
7/17 4주차
‘우리퀴어끼리’ : 안녕, 우리 또 만나요!
“레즈사회 호령하던 부치 언니 페미들이 망쳐놨네.
여자 돈은 안 쓴다던 부치 언니 더치페이 배워왔네…“
“남성사회 호령하던 페미언니 게이들이 망쳐놨네.
비폭력대화만 하던 페미언니 입에 살짝 걸레 물어 보네…“
- 이반지하, ‘오염’
“길다란 손톱보고 눈치챘겠지, 나는 레즈바에 온 작은 헤테로…
다 같은 여자라 하지 말아줘 난 너희와는 달라 나를 갖고 싶겠지…“
“성과사회 리포트 쓰러 온 거야…
당당한 그녀들이 아름답네요. 하지만 전 그쪽은 아닙니다… “
- 이반지하, 레즈바에 온 작은 헤테로‘
4주차 훈련은 내가 상담소에서 인턴을 시작한 이후에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훈련이었는데, 상담소에서 인턴으로 있을 때와 프로그램 참여자로 있을 때의 기분이 또 달랐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태도와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마지막 훈련은 가히 이 시대의 명곡이라 할 수 있는 이반지하의 노래로 열렸다. 차차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오염’, ‘레즈바에 온 작은 헤테로’, ‘트랜스’를 따라 부르는데, 그렇게 화목할 수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이전에 배웠던 것을 복습하고,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면서 우리는 마지막 훈련을 마쳤고, 대중교통이나 길거리에서 성폭력 등의 위험상황이 발생했을 때, 당사자나 목격자로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폭력의 상황에서 피해자와 목격자의 연대는 언제나 강조되어 왔지만, 막상 그것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나 실습은 부족했던 것 같다. 4주간의 자기방어훈련을 통해서 ‘우리퀴어끼리’ 서로를 지지하고 평소 터놓기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도 물론 의미 있었지만, 성적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만연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실제로 폭력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당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익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퀴어셀프디펜스는 그런 점에서 내가 폭력상황에 놓여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는 자신감, 내가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자각, 위기상황에서 어떤 몸짓을 더 편하고 빠르게 낼 수 있는지에 대해 익힐 수 있도록 도와준 시간이었다.
일지요정님과 함께한 뒤풀이, 사실은 술도 있었다
역시 마지막답게(?) 광란의 뒤풀이도 있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4주간 하지 못했던 말들, 그리고 어디에서도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우리끼리 소심한 연대를 약속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특별히 거창한 것들을 해서가 아니라 일요일마다 퀴어들과 모여서 안심하고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꼭 다시 만나기로 했다. (물론 모든 모임이 그렇듯 기약은 없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