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문재인 정부는 책임지고 ‘낙태죄’를 폐지하라
헌법재판소의 결정 미루기, 법무부의 무책임, 보건복지부의 기만적 역행을 규탄하며
‘낙태죄’의 현실을 보라.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낙태죄는 사문화된 법이라고 의견을 밝혔지만 낙태죄는 사문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임신중지한 여성과 시술 의사만 처벌하는 법의 특성을 악용하여 협박 수단이 되고 있다. 연인 관계에서 이별을 통보하였을 때, 연인이나 배우자의 폭력을 고발하였을 때, 이혼을 할 때, 낙태죄는 여성을 징벌하고 응징하기 위해서 악용되고 있다.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행위는 인공임신중절을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시술을 더욱 부추겨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행위일 뿐이다.
촛불 혁명으로 출발한 정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 선언하였다. 여성을 2등 시민으로 제약하는 대표적인 제도적 불평등인 ‘낙태죄’ 폐지에 대한 요구가 거리에서, 청와대 청원에서, 시민사회 각층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는 여성에 대한 구시대적 악법을 시정하라는 정당한 분노이자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임한 정부에 거는 최소한의 요구였다. 그러나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 그 어느 곳에서도 여성의 건강권과 시민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낙태죄를 폐지하겠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없다. 청와대는 23만 명의 청원에 대해 보건복지부를 통해 실태조사를 시행하고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답변하였으나, 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 시술에 대한 의료인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날치기 시행시켰다. 헌법재판소에는 낙태죄의 위헌성에 대한 결정이 기약 없이 멈춰있다. 해당 사안에 대한 직접적 책임이 있는 행정부처인 법무부는 낙태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에서 수준 이하의 의견서를 내놓았다가 사회적인 분노에 슬그머니 철회하였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요구는 여성이 이 사회에서 시민으로 시민권과 건강권,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정당함에 근거한다. 문재인 정부는 책임지고 낙태죄를 폐지하라.
헌법재판소는 역사를 후퇴시키지 말라
‘낙태죄’ 위헌 결정을 차기 재판부로 미룬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역사를 후퇴시키는 오판이다. 지난 5월 24일 형법 269조, 270조 위헌 소송에 대한 3시간여의 공개변론은 ‘낙태죄’의 위헌성을 명증하게 보여주었다. 시민사회 각계와 다양한 전문가 집단이 제출한 의견서를 검토하고 공개변론을 진행한 재판부가 이를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태’한 여성과 시술 의사만을 처벌하고 있는 시대착오적 형법 조항에 대한 위헌 결정은 또다시 ‘나중에’로 미루어졌다. 이를 틈타 보건복지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비도덕적 시술로 규정하고 ‘낙태’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발표했다. 임신중지를 범죄로 보는 ‘낙태죄’는 1953년에 제정된 후 단 한 차례도 개정조차 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더 이상 역사를 후퇴시키지 말고 조속히 ‘낙태죄’ 위헌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여성의 건강과 인권을 제도적으로 차별하고 여성을 범죄자로 취급해온 65년의 세월을 종결하는 역사적 순간을 앞에 두고 헌법재판소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법무부의 무책임을 규탄한다
지난 5월 24일 헌법재판소 공개변론 시 법무부는 “낙태죄가 우리 사회의 논란이 된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관계부처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법무부 측 대리인은 재판부의 그 어떤 질문에도 명쾌하게 답을 하지 못했다. 재판부는 행정부로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법무부를 지탄했다. 여러 차례 논란이 된 후 스스로 철회하기까지 한 법무부 의견서의 내용뿐만 아니라 변론의 수준 역시 참담했던 것이다. 법무부 측 대리인은 “제 생각으로는 이 문제는”이라며 답변하다가,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에게 이 자리는 대리인의 생각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요지로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 이것은 비단 법무부 측 대리인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법률적 논리체계 안에서도 옹호할 수 없는 ‘낙태죄’를 변호하려다 보니 발생하는 모순이다. 여성의 실질적인 재생산 경험과 이를 제약하는 수많은 구조적 조건을 외면한 채 ‘낙태’를 성적 방종과 무책임한 행위로 호도할 뿐 정작 관계부처 협의조차 시도하지 않는 법무부는 더 이상 책임을 방기하지 말아야 한다.
보건복지부의 기만적 역행을 규탄한다
2016년 보건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비도덕적 시술로 규정하고 ‘낙태’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을 시도했다가 강력한 사회적 반발에 부딪쳤다. 성난 여성들의 ‘낙태죄’ 폐지 요구는 검은 시위와 촛불 혁명을 거쳐 2017년 무려 23만 명의 청원으로 모였다. 청와대는 청원에 대한 답변으로, 현행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의 처벌 위주의 정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언급하며 국민 건강의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를 통해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실시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보건복지부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 결정을 미루겠다고 결정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2년 전 실패했던 개정안을 슬그머니 처리했다. 심지어 보건복지부는 지난 5월 헌법재판소 공개변론 시에는 정부 부처로서 당연히 개진해야 할 의견서에 ‘의견 없음’을 통보했다.
낙태죄 및 여성 건강에 대해 어떤 의견도 없는 부서가 진행하고 있는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는 연구 마감이 10월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조사 도구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2016년 의료법 개정안으로 시작된 검은 시위 이후 보건복지부는 여성 단체의 재생산 건강에 대한 포괄적 정책 요구에 관련해서 단 한 차례도 논의의 장을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낙태죄 처벌 강화 개정안을 통과시킨 후, 연구 마감을 겨우 한 달 앞둔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대한 여성 단체의 일회적인 자문을 요청하는 것이 해당 연구에 구체적인 젠더 관점을 반영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행위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낙태죄’가 여성의 재생산 건강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인공임신중절율조차 낮추지 못한다는 전 세계적인 연구 결과들이 있음에 이를 역행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검은 시위와 촛불 혁명, 청와대 청원과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이 진행되는 동안 슬쩍 빼놓았던 ‘낙태’ 처벌 강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을 이처럼 졸속 행정 처리하는 것은 비겁함의 소치이다. 그리고선 2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낙태’ 수술을 한 의사에 대한 자격정지 처분을 당분간 시행하지 않을 수 있다고 물타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것이 한 국가에서 국민의 건강과 보건을 책임지는 행정부처의 모습인가.
의료인들은 ‘낙태수술 전면중단’이 아닌 ‘낙태죄 폐지 운동’에 동참하라
가족계획의 역사 및 현행 모자보건법에 여전히 남아있는 우생학적 사유 등은 오히려 국가가 생명을 선별하고, ‘낙태’를 장려하고, 국가의 입맛에 따라 단종 시술을 해왔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공임신중절 시술은 전문성에 대한 고려 및 일관된 원칙 없이 국가의 인구정책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려왔다.
8월 28일 직선제 대한산부인과회는 보건복지부가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안 공표를 철회할 때까지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현실과 괴리된 법과 변덕스러운 국가정책 사이에서 의료적·인도적 차원으로 부득이하게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해왔던 의료인들의 고뇌에 공감한다. 그러나 대한산부인과회의 파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며, 복지부와의 힘겨루기 사이에서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는 것은 여성의 건강과 생명이다. 인공임신중절은 원치 않는 임신뿐만 아니라 임신의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 안에서 필수불가결한 의료행위이며,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법적이고 안전한 시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는 의료인들이 여성의 건강을 담보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문가로서 ‘낙태죄’ 폐지 운동에 동참하여야 하며, 이번 사태에서 여성의 건강을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고려할 것을 촉구한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재생산권 보장하라!
2016년 검은 시위와 2017년 청와대 청원, 그리고 2018년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을 거치며 ‘낙태죄’의 실태가 민주 사회의 공론의 장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생명권’이라는 허상 하에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범죄자로 내몰았던 ‘낙태죄’의 위법성은 만천하에 밝혀졌다. 지난 7월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낙태죄’ 폐지를 넘어 여성의 재생산권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를 촉구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의 취지에 동의하는 전 세계의 연대 메시지 역시 이날 광화문에 울려 퍼졌다.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상당한 ‘선진국’의 위치이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억압적이고, 후진적이며, 심지어 여성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낙후된 법적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현실이다. UN 조약기구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낙태죄 폐지 권고를 받고 있으며, 2011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임신중절을 한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처벌조항을 삭제하고,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절로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관리를 위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권고문을 보냈다. 2018년 올해 CEDAW는 “2011년의 권고를 이행하고, 모든 임신중절을 비범죄화하고 임신중절 여성 처벌조항을 삭제할 것”을 재차 촉구했다.
‘낙태죄’의 폐지는 시대적 과제이다. 임신중지를 한 여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으면서, 한 사회의 재생산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오롯이 전가해 왔던 역사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우리는 여성들을 처벌함으로써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 장애나 질병, 연령, 이주, 가족 상태, 경제적 상황 등 다양한 조건이 출산 여부에 제약이 되지 않도록 사회적 여건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2018. 09. 03.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건강과대안, 녹색당,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불꽃페미액션,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성과재생산포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회, 장애여성공감, 전국학생행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탁틴내일, 페미당당, 페미몬스터즈,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