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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에 바라는 성폭력 추방 정책
  • 200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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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성폭력특별법 제정 이후 정부가 성폭력 추방정책을 마련하고 이행해온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전국 111개의 성폭력상담소와 11개의 피해자보호시설에서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지원하고 성폭력예방을 위한 활동들을 해왔다.
2001년에는 여성부가 출범하면서 성폭력 관련 업무가 보건복지부에서 여성부로 이관되었다. 또한 성폭력특별법도 2차에 걸쳐 개정을 했고, 현재 3차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이렇듯 성폭력 추방정책의 외양은 어느 정도 틀을 갖춰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폭력은 여성의 인권을 위협하는 범죄로 존재하고 있음이 일상적으로 보도되는 성폭력 사건 뉴스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담전화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한 해에 몇 건의 성폭력이 발생하는지, 고소율이 얼마나 되는지 등의 통계조차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사와 재판과정에서의 2차 피해는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올해 새롭게 출범한 새 정부가 앞으로 성폭력 추방정책을 추진해 가는데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들을 성폭력 상담 현장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제언하고자 한다.


(1) 성폭력의 개념 및 범위 확대

성폭력은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이다. 우리나라의 법과 정책에서 공식적으로 성폭력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성폭력특별법이 처음인데 이 법안에서는 성폭력을 따로 개념정의하지는 않은 채, 기존의 각 법안에서 해당하는 죄를 열거하고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범죄행위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성폭력의 개념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라는 좀 더 폭넓은 차원에서의 접근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성폭력 범죄 중 강간죄를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간음한 자"로 규정하고 있어 남성은 강간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항문성교나 구강성교, 성기에 이물질 삽입 등의 행위는 강간이 아닌 강제추행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법과 정책의 기조가 되는 개념의 규정에는 좀 더 깊이있는 철학적인 고민과 합의가 따라야 할 것이다.

(2)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통합적인 지원체계 마련과 보호절차 강화

성폭력 피해생존자에게 심리적, 법적, 의료적인 통합적 지원이 제공되어야 한다. 여성부에서는 올해부터 대한법률구조공단과 연계하여 여성폭력 피해생존자에게 무료 법률지원을 시작했다. 이 사업의 실효성 있는 성과를 위해 중간 평가와 함께 담당자들의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많은 성폭력피해 생존자들이 호소하고 있는 수사과정에서 겪는 2차 피해에 대처하기 위해 대검찰청(1999)과 경찰청(2002)에서는 각각 수사지침과 실무 매뉴얼을 개발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들이 어떻게 운용되느냐 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교육과 홍보, 실행계획 등을 세워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재판과정에서도 성폭력피해생존자들은 피고인의 변호인에 의한 무차별적인 반대신문을 받고 있어 이에 대한 보호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최근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무고, 명예훼손으로 역고소 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도 시급하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진료와 보도시의 문제점들도 산적해 있다.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은 평균 2-3곳의 개인산부인과나 종합병원을 전전해야만 제대로 된 의료적 처치와 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현재 <여성폭력 긴급 의료지원센터>가 전국 7개의 병원으로 지정되어있고, 각 상담소당 45명분의 의료지원비가 지급되고 있지만 보다 효과적인 운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찰에서 조사받는 과정에 들이닥치는 보도진들에게 성폭력피해 생존자들은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실제 이로 인한 인권침해를 호소하는 경우들이 있어 이와 관련한 피해자 보호조치와 관련인 교육이 요구된다 하겠다.
이외에도 수사·재판과정에서 비디오 녹화를 통해 반복진술을 피하고 신뢰관계에 있는 자의 동석제도를 확대시키는 조치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법적 규정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운용을 위한 체계적인 담당자 교육이 절실하다.

(3) 민·관의 진정한 파트너쉽 형성

우리나라의 성폭력추방운동은 20여년의 역사성을 갖는다. 이 운동에서는 성폭력을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임을 천명하고 우리사회내 불평등한 남녀의 권력관계와 남성중심적인 성문화를 바꿔가기 위해 인식의 전환과 정부의 제도적 장치마련을 촉구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기반위에서 정부의 성폭력추방정책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폭력추방을 위한 여성운동단체의 요구가 제도화되어가면서, 특히 정부가 예산 지원을 하면서 행적적 지도·감독을 하고 있고, 운동의 측면을 배제한 상담서비스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어 서로 갈등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정책 수립과정에서 정책대상의 요구와 의견을 수렴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최근의 주요 정책인 통합상담소의 경우, 정책간담회가 있었지만 왜 통합상담소로 가야하는지, 그 방향은 어떠해야하는지 등의 논의에는 전혀 의견수렴의 절차가 없었고, 이미 준비된 안의 일부를 수정하는 식의 진행이어서 민주적 정책수립절차로 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여성위기전화 1366은 각 상담소로의 연계기능인지 상담의 기능인지가 여전히 불분명한 채 진행되고 있다. 더욱이 올해 시행계획인 시설평가는 평가기준과 평가주체 등이 명확하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민·관의 협력체제란 둘의 관계가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였을 때에 가능해진다. 실제로 담당 공무원의 일부는 성폭력피해자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의 행정을 펼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성폭력 추방 정책에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각 상담소의 노하우와 조직 등을 활용하여야 한다고 본다.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성폭력 관련 정책에 거는 기대도 크다. 정부는 성폭력 추방정책을 기존의 범주에서 벗어나 성폭력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종합적인 계획과 장·단기 계획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성폭력 추방운동을 시작하고 이끌어온 민간단체, 상담소 등과의 진정한 파트너쉽은 성폭력 추방정책의 수립과 이행에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한편 성폭력추방운동에서의 성폭력 위험성의 강조가 여성들의 성(sexuality)을 무서운 성으로 각인시키는 역효과가 있다는 조심스러운 지적들이 있다. 성폭력 추방정책에서도 앞으로 긍정적인 성적권리 등과 연계한 정책마련도 함께 고민해볼 것을 제안한다.


* 이 글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라는 용어대신에 성폭력 피해 생존자(survivor)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성폭력 상담 현장에서 만나는 수 많은 피해여성들은 분노와 고통, 절망 속에서도 그 내면에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용기와 힘을 갖고 있음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피해를 당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로서 수사, 재판, 진료, 일상생활에서의 권리를 존중받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 이미경(본 상담소 소장) [ 2003 봄, 나눔터 44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