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연대] 함께 할 준비되셨나요? ▶ [보통의 연대]란? 성폭력을 '피해자'나 '가해자' 개인, 혹은 '여성'만의 문제로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고 성폭력 주변인으로서 사회구성원의 목소리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캠페인이에요. 모든 사람은 성폭력 주변인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사람들이 성폭력에 대해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인터뷰하고자 해요. 성폭력이 일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성폭력 주변인으로서 어떤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여러분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세요. ▶ 성폭력이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동의 없이 성적으로 가해지는 모든 신체적·언어적·정신적 폭력을 뜻합니다. 동의 없는 성적 행위로 강간, 강제추행뿐 아니라 시각적·언어적·비언어적 성희롱, 스토킹, 피해자의 거부에 대한 불이익 조치, 불법 촬영, 비동의유포, 통신매체를 이용한 성적 괴롭힘 등이 포함됩니다. |
※ 성폭력 주변인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윤문 및 편집 외에는 인터뷰 참여자의 말을 충실하게 실었습니다. 저마다의 관점과 논점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인터뷰 취지에 맞게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존중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인터뷰 참여자에 대한 인신공격 등이 있을 경우 수정 또는 삭제 요청드리거나 관리자가 삭제할 수 있음을 안내드리며, 반성폭력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용기 있게 경험을 나눠주신 인터뷰 참여자 분들께 비난과 질타보다는 지지와 격려를 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보통의연대] 028. 반성폭력 운동, 뭘 더 열심히 했어야 친구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까? 로로의 인터뷰
안녕하세요. 저는 로로입니다.
Q. 본인이 성폭력 주변인이라고 생각하나요?
네.
Q. 성폭력 주변인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체크리스트 중에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성폭력과 관련된 상황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경험이 있다’라는 항목과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대학교에 다닐 때,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서 피해자가 연락해온 적이 있어요. 제가 여성주의적인 아젠다를 가지고 소모임도 많이 하고 단체 활동도 많이 해서 저한테 연락했던 것 같아요.
저만 있는 자리는 아니었고 같이 여성주의 관련 모임을 하는 자리였어요. 한 친구가 이야기하길, 다른 동아리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술자리에 갔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까 날이 지나 있었고 자기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한 정황이 있는 상태로 깼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의를 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어요.
너무 많이 일어나는 일이어서 이런 일은 항상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남의 이야기로 듣기도 하던 시의성 높은 사건에 대해서, 정말 그 당사자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사건에 대해서 당장 어떤 대처를 해야 하는지 물어왔을 때, 느낌이 새삼스럽게 남달랐던 기억이 있어요.
Q. 그때 본인은 주변인으로서 어떻게 대응했나요?
원래 그 친구도 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이것저것 공부를 해왔던 친구여서 일단 병원도 갔다 오고, 가해자한테도 나름대로 생각을 해서 연락하고 사실 정황 관계를 파악했던 상태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어봤죠.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맨 처음에는 일단 괜찮은지 들었어요. 제가 뭘 물어본다기보다는 그 친구 말을 일단 많이 들어주고, 그 친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들어주려고 접근했던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심하게 놀라든지 어떤 식의 반응을 보였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어떤 식으로든 거슬리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의 반응이나 행동 때문에 당사자가 자기의 이야기를 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가로막히지 않았으면 해서요. 그리고 제가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너무 심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해서 나름대로 신경을 썼던 것 같아요.
그런 일이 있었냐고, 내가 신경을 쓴다는 거, 그 친구를 걱정하고 당연히 그 친구 편을 들 거라는 뉘앙스를 열심히 풍기면서 최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들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Q. 다른 주변인들은 어떤 반응을 했나요?
그 이야기가 나왔던 모임 자체가 여성주의 관련 모임이어서 그 친구도 믿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가 학과나 이런 건 다 달랐기 때문에 (구성원 중에) 사건이 발생한 그 동아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저희가 조금 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가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저희도 어떤 말을 하든지 그 친구한테 직접 전달되는 무게가 얕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었어요.
그 모임 안에서는 일단 다들 걱정을 했죠. 괜찮은지. 지금 이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소위 사후처리를 이 친구 혼자 했는지,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물어보고 지지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그 안에서도 어쨌거나 그 친구 말고 소모임에 참여하는 친구들끼리도 서로 무언의 압박을 주기도 했던 것 같아요. 서로 어느 정도 이상의 믿음은 있었지만, 막상 이런 일을 겪었을 때 각자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는데 다들 조심하고 신경을 되게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를 서로 만들었죠. 각자.
Q. 그때 당시 개인적인 느낌이나 소회가 있었나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친구가 어떤 면에서는 남들로부터 함부로 평가당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이슈를 모임에서 털어놓은 거잖아요. 그런 민감한 이야기, 자기 이야기를 여기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줬다는 게 고맙기도 했어요. 이 모임이 그래도 믿음이나 안정감은 줄 정도로 운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 평소에 떠들고 다니는 게 도움이 아예 안 되지는 않았구나. 내가 여성주의를 생각하고, 수업도 듣고, 책도 읽고, 이야기를 막 하고 다니고, 일부러 내 입장을 설명하고 다녔던 게, 어떤 면에서는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지기도 했던 것 같아서 중요성을 더 느꼈던 것 같아요. 평소보다도 더.
친구가 겪은 사건과 그 전에 제가 연대했던 사건들을 연관 지어서 좀 좌절감 같은 것도 느꼈어요. 제가 1학년 들어가서부터 어쨌거나 학생회 활동도 하고, 학내 소위 정치체에 발을 담갔다 뺐다 하면서 있었는데요. 그러다 보면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학내 성폭력 이슈들을 많이 이야기 듣게 되잖아요. 아예 학생회 활동을 안 할 때 보다는.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자세한 내막까지 일부러 캐본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이야기만 듣고 연대 활동을 한다거나 필요한 지원 활동을 할 때 같이 참여한 적은 몇 번 있었어요. 크게 이슈된 사건들이 2~3번. 나름대로 학생회 차원에서 연대한 활동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이슈를 다룰 때, 개인으로든 단체로든, ‘아, 이게 참 잘 해결됐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항상 학교가 피해자를 압박해서, 특히 피해자 부모님을 압박해서 사건을 빨리 정리하게 한다던가. 아니면 예를 들어 피해자가 교환학생일 경우에는 호소할 곳도 없고 가해자도 더 기세등등한 거죠. 그냥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니냐, 너도 이런 일이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지 않느냐. 그런 식으로 추가적인 가해들도 있다거나. 학교에서 대응하는 방법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피해자를 학교 심리 상담사랑 연결해 준다든지 그런 차원에서 끝나는 거예요. 학교 전체의 이슈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학생들끼리 다툼이 있었네. 그런 경험들만 쌓여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가까운 사람이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나? 내가 뭘 더 열심히 했어야 했지?’ 이런 생각도 들고 좀 좌절감을 느꼈어요. 그 자리에선 티를 내지 않았지만.
Q. 그때 당시의 경험을 시간이 지난 지금의 자신으로서 돌아본다면 뭔가 다르게 행동했을 것 같나요?
큰 틀에서는 바뀌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저도 계속 공부를 하면서 조금 더 어떤 식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지원체계나 연락할 수 있는 단체나 기관이나, 거기에 연락을 취했을 때 어떠한 절차를 거쳐서 일이 진행되는지, 이런 것들을 훨씬 더 잘 알게 되었거든요. 그런 것을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제가 정확한 정보까지는 전달을 못 해줬어요. 그냥 ‘내가 들었는데 그런 데도 있다더라’ 단편적인 정보만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이 사람은 이 체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한테 접근하면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어’라는 신뢰감까지는 제가 못 줬던 것 같아요.
그때 그 친구는 결국에는 신고를 안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고, 그 이후에 저희한테 이야기를 안 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만약 제가 정보를 잘 알려주고 그쪽으로 아는 사람도 많았더라면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잖아요. 꼭 신고를 안 하는 게 나쁘고, 하는 게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 친구한테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 더 믿음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드네요.
Q. 그 경험을 하기 이전과 이후로 생각해봤을 때 본인에게 변화한 지점도 있을까요?
공동체에 대한 생각은 변화가 있었어요. 원래도 안전하지 않다고야 생각했지만, 정말 안전하지 않구나. 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학교나, 동아리나, 공간들이 전혀 이 문제를 발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믿음도 주지 못하고, 여전히 이 안에서는 우리가 그런 피해 사실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공간이구나. 물론 그 전에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바꾸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훨씬 더 와 닿게 느끼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Q. 성폭력 문제해결이 잘되지 않는 상황이 변화하려면 어떤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일단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 머릿수가 많아져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주변인이 부족했기 때문에 계속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학교의 경우에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말할 머릿수죠. 학생들 사이에서 여론이 좀 세지거나, 머릿수는 적더라도 권력을 가지고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해결하려는 의지가 더 강하거나. 제가 여러 번 대응했던 경험 중에서 만약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다면 그래도 최소 몇 번은 ‘잘 해결됐다, 우리가 열심히 싸워서 이 사건을 잘 이끌었고, 공동체로서 책임성 있는 대응을 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Q. 본인과 성폭력 사이의 거리는 어떻다고 생각하나요?
가능성의 측면에서는 제가 성폭력을 당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고려해서 일거수일투족을 결정하기 때문에. 아주 가깝다고 생각하고요. 대학교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 그런 경험들이 계속 쌓이다 보니까 일부러 더 그런 이슈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 진로라든지 방향을 더 그쪽으로 설정했던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성폭력 주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까 말씀드린 경험에서 친구가 저한테 상의를 요청했을 때 스스로 좀 안심이 됐던 것은, 제가 완벽한 대응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런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혼자서 꽤 많이 해봤다는 거였어요.
평소에 저는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보통 이런 걸 신경 써야 하고, 이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되고, 최대한 조심해야 하고, 뭘 물어야 하고, 어떤 걸 지원해야 하고, 그런 것에 대해서 시뮬레이션을 되게 많이 해봤었어요. ‘만약에 내가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할까?’, ‘주변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나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시뮬레이션을 많이 해봤어요. (성폭력 사건이) 주변에서 벌어지지 않더라도 어릴 때부터 뉴스나 기사나 이런 경로로 많이 접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시뮬레이션을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 친구와의 대화가 피해자한테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고 지금도 누군가 겪고 있고 나도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가 함께 변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나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속 스스로한테 정보를 입력해놓고, 업데이트도 열심히 하고, 주변인으로서 준비되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아요.
(사진) Q. 성폭력 주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뭘까요?
준비된 지지자로서의 내가 되기
[보통의 연대] 릴레이 인터뷰는 2019년 "의심에서 지지로" 캠페인단이 인터뷰 진행자로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이 인터뷰는 의심에서 지지로 캠페인단 부영님이 진행하였고,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앎이 편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