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8. 단호한 시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친족 성폭력 엄벌하라
지난 4월 30일, 국민청원 “저는 아버지에게 15년동안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도와주세요.”에 대한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이 발표됐다. 해당 청원인은 15년간이나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친부를 용기 내어 고소했지만, 보복을 두려워해야 하는 현실에 억울함과 분노를 느끼며 피해자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가해자를 엄벌해달라고 청원했다. 또한, 가해자가 다른 가족을 통해 연락을 시도하고 합의를 요구하는 2차 피해도 호소했다. 해당 국민청원은 총 24만 8천 명의 국민의 동의를 받았다.
이에 청와대 국민청원답변에서 강정수 디지털소통센터장은 “국민청원에는 이번 청원 외에도 친부 혹은 친족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호소가 있었고, 해마다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으며, “친족에 의한 성범죄에 엄정히 대응하고,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피해자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어 죄에 상응하는 형벌이 선고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진정으로 친족 성폭력 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한다면 모든 친족 성폭력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친족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범죄자들이 ‘가족’을 앞세워 피해자의 입을 막는 행태를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이에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모든 친족 성폭력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되어야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답변에서도 언급했듯, 2012년 국회는 13세 미만 아동·청소년 대상 강간 등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앴고, 2020년 4월 29일에는 의제강간·추행죄 기준 연령을 13세 미만에서 16세 미만으로 상향하고 공소시효 배제범위를 확대하는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의 공소시효 배제범위는 특정 연령을 기준으로 한정되어 있어, 해당 연령 이후의 친족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소시효의 벽에 박혀 고소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다. 더욱이 2012년 이전에 피해를 겪은 피해자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은커녕 사과조차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은 세월에 따라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2019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상담 총 912건 중 친족 성폭력 상담은 87건으로 9.5%에 해당했다. 그중 13세 이하 아동·청소년 피해는 51.7%로 7세~13세 어린이 시기 피해가 가장 높았지만, 14세 이상 청소년과 성인 피해도 40.2%에 달했다. 게다가 친족 성폭력 피해를 상담소에 상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미만은 24.1%(21건)이고 10년 이상은 55.2%(48건)이었다. 특히 친족 성폭력의 경우는 다른 성폭력 피해보다 피해를 드러내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친족 성폭력은 ‘가족’이 가해자라는 범죄 특성상 피해 시기에 바로 신고하거나 도움을 청하기 어렵다. 그들의 삶의 공간이 피해의 공간이었고, 어려서부터 지속돼온 성폭력을 범죄로 인식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범죄로 인식한 이후에도 신고를 결심하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신고하려면 집을 떠나야 하고 가족과 절연해야 하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만만치 않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말하기 시작한 피해자에게 공소시효라는 장벽은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2. 가해자가 ‘가족’을 앞세워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하고 감형받고자 하는 2차 가해를 가중처벌해야 한다.
친족 성폭력에 대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가해자와 그 가족의 접근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그들이 피해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접근하려고 할 때는 가중처벌하도록 해야 한다. 친족 성폭력 가해자들은 가해 행위가 드러나기 전에는 피해자의 입을 막고, 드러나면 다른 가족들의 힘을 빌려 피해자의 입을 막으려고 한다. 특히 아동·청소년 또는 장애가 있는 피해자에게는 친권을 가진 다른 가족들의 회유와 협박이 성폭력 가해 못지않은 폭력이다.
가해자의 가족이기도 하고 피해자의 가족이기도 한 피해자의 어머니, 오빠와 언니, 조부모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그래도 아버지인데”, “그래도 가족인데”라며 합의를 종용해서 얻어낸 처벌불원서를 양형에 반영해서는 안 된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의 처벌불원서는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용서 의지라기보다는 피해만큼 무서운 가족의 절연 의사, 자기 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겪는 괴로움을 더 걱정해서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이런 절절한 심정을 이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처벌불원서를 받아내고야 만다. 친족 성폭력 재판 시에 처벌불원서가 제출된다면 오히려 가중처벌해야 마땅하다. 진정한 반성의 결과가 아닌 회유와 협박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청주지방법원 2019고합131 판결은 7년간 친딸을 강간, 강제추행하고 학대한 가해자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며 “피해자가 자신과 동생들을 보살펴주지 않은 모친과 달리 자신과 동생들을 키워준 피고인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면서 피고인에게 한 번 기회를 주고 싶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여러 차례 제출하였으나,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피고인을 장기간 격리시킴으로써 피해자가 올바른 성적 정체성과 가치관을 정립할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설시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오랫동안 부양해왔고, 심지어 피해자가 이를 이유로 선처를 원하더라도 이를 감경 사유로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유의미한 판결이다. 이러한 판례가 더 많아져야 한다.
3. 성폭력뿐만 아니라 친권을 악용한 죄에 대한 처벌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친권은 말 그대로 아동·청소년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치고 키우는 권리를 말하며, 이는 보호자의 권리가 아니라 아동·청소년 자녀의 권리이다. 아동·청소년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은 부모와 사회와 국가가 당연히 져야 할 책임이지, 친권을 가진 보호자가 아동·청소년 자녀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는 등 친권을 악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보호받고 양육 받을 권리가 있는 아동·청소년이 오히려 보호자에 의해 범죄 피해를 입고 제대로 양육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피해자는 당연히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4.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민법상 미성년자일 때, 가해자인 친권자들의 허락 없이는 통장도 개설할 수 없고 휴대전화도 개통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현행법으로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민법상 미성년자이고 가해자나 가해자를 지지하는 양육자가 친권자일 경우, 가해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존 친권자의 친권이 바로 정지되지 않는다. 형사 처벌이 확정된 이후 별도의 절차를 거쳐 민사상 가해자의 친권 박탈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부적절한 권행 행사를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친권자가 보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아동·청소년 피해자들의 행위능력을 인정할 다른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전국에 있는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36개소에서는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통합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의식주 지원과 교육지원, 의료지원, 법률지원은 기본이며 피해자의 상황과 특성에 따라 적절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호시설을 이용하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한 실정이며 지원 체계 안에서도 민법상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제약이 따른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보호시설에 생활하는 동안에는 시설장이 피해자의 편의를 위한 행위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권한 부여가 필요하다.
통장개설조차 친권자의 허락이 필요하니, 생활에 필수적인 행위들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당연히 누려야 할 일상에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으므로 삶의 질 또한 떨어지게 된다. 친권자가 가해자일 때, 피해자가 시민으로서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피해자의 일상을 회복하는 시작일 것이다.
2020.5.8.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참고 자료 : 청와대 국민청원 <저는 아버지에게 15년동안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도와주세요.>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5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