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VRC활동가성명] 고 손영미 활동가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고 손영미 활동가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상근활동가 추모 성명]
2020년 6월 7일 고 손영미 정의기억연대 쉼터 평화의우리집 소장님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우리들은 놀라움과 슬픔 속에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갑자기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연결되어 있는 수 많은 이들의 안부를 걱정하며 이 자리에 있습니다.
여성인권운동은 ‘여성’을 대상화 타자화하는 종속, 착취, 폭력을 고발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움직임에서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를 불렀습니다. 나와 너라는 존재가 연결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운동이었습니다. 권력에 맞서는 힘은 약자들의 연대였고, 서로를 바라보며 존엄함과 주체성을 알아갔습니다. 나와 네가 다르다는 경험 속에서 삶의 복잡다단함을 응시하며, 타자화되었던 자신과, 타인과 화해하고 통합하는 길, 자유로움을 회복하는 여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여성인권운동은 평가와 성찰의 몫을 깊게 지녀왔습니다. 진솔하게 평가했는지, 운동의 방향은 맞게 설정되었는지, 목표에 대한 성취는 어땠는지, 과정은 어떠했는지, 나이 연차 상근여부 등에 의한 위계과 배제는 없는지,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이들의 기여와 참여가 존중되는지, 새로운 성장으로 환류되는지.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지. 우리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꿈꾸는 세상을 지금, 여기에서 펼쳐내고 있는지.
여성인권운동은 때로는 “그렇게 힘든 일을”? 때로는 “그렇게 쉬운 일을”? 두 가지 시선을 모두 받습니다. 매우 힘들어보이는 일이지만 그렇지만은 않고, 매우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하면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운동을 조직하고 재생산하고 지속해 왔습니다.
두 가지 키워드, 여성인권운동을 만들어온 저변의 라포(rapport)와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말하고 싶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한다든지 어떤 일이라도 터놓고 말할 수 있거나, 말하는 것이 충분히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상호 관계’인 라포는 ‘여성’으로 호명되어 온 자신의 타자성과 주체성과 인식한 사람들 사이에, 때로는 내담자와 지원자로 관계 맺게 된 사이에, 동료관계를 맺은 활동하는 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신뢰관계입니다. 좋은 말을 하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갱신해가는 것입니다. 갈등하고 부딪히고 극복하고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은 달콤하지만은 않지만, 라포는 우리 서로의 안전망이자 연대의 근간입니다.
또 하나 ‘위기와 실패의 상황에서도 딛고 오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인 회복탄력성입니다. 거대한 좌절과 번번히 닥쳐오는 절망 속에서, 자책과 원망이 나를 집어 삼키지 않도록 다시 또 다시 마음의 탄력을 회복하는 것. 회복탄력성을 만들고 속도와 두께는 다르더라도 다시 활력과 탄력의 상태로 돌아오게 해주는 과정은 여성인권운동을 지속하게 하는 핵심적 힘이고, 이것은 혼자서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동료와, 지원-내담 관계와, 외부와의 관계와, 목표와 도전과 실패와 평가와의 거리와 긴장 사이에서 건강하게 존중되는 환경에서 가능합니다. 여성주의 운동이 추구해온 가치들은 이 라포와 회복탄력성을 여성인권운동을 지탱하는 기술로 힘으로 체화되게 해 왔습니다.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운동, 또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운동을 만들어온 이들의 보이지 않는 라포와 회복탄력성에 힘입었습니다. 전쟁의 참상과 죽음의 환시, 성폭력과 트라우마, 2차 피해들, 그리고 지원자들의 자기 트라우마의 연결, 대리 외상 속에서 서로를 살려내고, 운동을 여기까지 이끌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갈등과 논쟁과 부딪힘 속에서 만들어 왔을 그 라포와 회복탄력성의 내공에 힘입어 우리도 전시성폭력 문제해결을 위한 운동에 함께 해올 수 있었습니다.
한 달 전에 제기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 선생님의 문제제기는 오랫동안 형성해온 라포 위에서 가능했으며, 그 위에서 강력하게 제기된 논의의 필요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달 전이 아니라 그 전부터, 훨씬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온 여러 냉철한 토론과 논의들은 역시 라포와 회복탄력성이라는 기술과 힘들 사이에서 다루어져 왔거나, 다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달 사이, 많은 언론과 언론을 통해 견해를 형성한 사람들은 오랜 시간 갱신해온 여성인권운동가들 내의 라포를 부인, 부정하고 비난하고 무화시키고자 했고, 그 안에 누구보다 주체였던 많은 이들을 각각 배제해버리고, 박제하고, 일방적으로 재현했습니다. 검찰은 주거시설이자 안전이 보장되어야 할 쉼터에 약속과 절차를 무시하고 들어가 수색하였습니다. 그동안 서로 연결해오며 운동을 형성해왔던 많은 이들은 말을 잃었고, 이 일을 표면적으로 접한 사람들이 운동의 역사와 흔적들을 수색하고 편집하고 훼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합리적인지, 필요한지, 적당한지, 그래서 반복될 수도 있는 것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평가와 성찰의 환경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라포가 외부의 힘으로 훼손되고 회복탄력성이 끊어져 내린 상황을 목도하며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다시 또 다시 하고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 깊은 마음과 힘을 모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분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서로의 용기가 되어 우리의 길을 함께 치열히 돌아보고 또 새로이, 힘차게 내딛는 시간이 회복되기를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
2020년 6월 9일
한국성폭력상담소 상근활동가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