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삶에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 페미니스트 주권자 선언
2022년 정치의 모습 : 페미니즘을 혐오하거나 거리두거나
처참한 선거 국면이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거나 페미니스트를 혐오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나, 이렇게 무책임하게 증오 선동 정치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정당과 대통령 선거 후보에 의해서 말이다.
미투운동 이후 첫 대선, 성평등한 정치 비전은 어디 있나?
2016년 촛불운동은 비민주적인 정권을 교체했고 2018년 미투운동은 정치권을 비롯하여 모든 곳에 만연해있던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성차별을 고발했다. 특히 선출직 지자체장에 의한 성폭력은 정치권 내 공고한 성별권력구조를 드러내었고 민주주의 완성은 미완의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정치인에 의한 성폭력은 단지 개인의 윤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그가 여성 국민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 질문하게 했다. 여성을 동등한 동료로,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 정치인이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가? 성차별이 구조적으로 만연하고 한 정치인의 권력을 비호하기 위해 성폭력 피해자가 침묵해야 하는 곳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는가? 진지한 물음과 성찰이 제도 정치 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미투운동 이후 이루어지는 이번 선거에서는 성평등한 정치, 성평등 정부를 무엇보다 과제로 내걸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 정치권은 ‘역차별론’에 근거해서 성별에 따른 불평등 자체를 부정하며 여성 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증오를 선동한다. 또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소한 것이라며 거리둔다. 그러는 사이 성폭력 피해자, 성매매 피해 여성, 한부모, 이주여성 등, 젠더관점으로 약자/소수자를 지원하는 부처인 ‘여성가족부’에 대한 폐지론이 거론되었다. ‘성폭력 무고’의 처벌 강화 정책이 대통령 후보들에게서 앞다투어 나왔다. 실제 성폭력 무고의 불기소율은 80%를 상회하고 유죄에 이른 비율은 0.68%에 지나지 않지만 피해자를 압박하기 위하여 가해자의 보복성 역고소 전략으로 활용되는 실정이다. 이러한 이번 대통령 선거가 미투운동 이후 이루어지는 선거가 맞는가?
누구도 제대로 대표되지 않는 현실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개정,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낙태죄 폐지 이후 성과재생산 권리에 대한 법제도의 마련 등 실질적인 변화가 여전히 시급한 상황에 성평등에 대한 진전은 없고 백래시가 거세다. 백래시는 페미니즘에 반감을 갖고 있고 스스로를 성차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대남’이라는 세대 집단의 정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대남의 정서, 언어, 농담에 남성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이대남은 더욱 가시화, 세력화 되어간다. 선거국면에서 ‘이대녀’는 커녕 여성시민들의 삶과 목소리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거대한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남초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 두 성별간의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고 여성의 특혜만을 주장하는 비상식적 주장으로 왜곡되어 가고 있으며, 대선후보들은 이에 동조하거나 거리를 둘 뿐이다. 언론에서는 20대 남성의 지지율과 표심을 잡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페미니즘은 모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비전을 ‘젠더’라는 관점으로 제시하고 이를 위해 불평등을 제거하자는 실천이자 입장이다. ‘젠더 갈등’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지만 젠더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는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젠더는 개인의 삶과 사회를 구성하는 규범이기도 하기에, 인간의 출생, 노동, 교육, 돌봄, 관계, 건강, 주거, 죽음 등 삶의 모든 면면에서 작용된다. 페미니즘은 시민들의 삶이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지 젠더관점으로 제시하고, 성별 뿐만 아니라 연령, 장애, 학력, 빈곤 등 다른 사회적 위치와 상황이 만들어내는 부정의를 함께 고려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무지한 것은 전략이 아니라 시민들의 실질적인 삶을 다룰 역량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정치권에서 말하는 것처럼 20대 남성들의 삶이 힘든 것이 정말 페미니즘 때문인가? 대선 국면에서 남초집단의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 정서만 반영될 뿐 남성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이 고려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혐오 선동을 통해 지지기반을 다지려고 하는 정치권에 실망하고 분노한다.
후보와 정당, 주권자 모두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선거를 바란다.
모든 후보와 정당이 정치적 책임을 갖고 선거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언제까지 정권교체를 위한 또는 정권연장을 위한 선거를 봐야하는가? 언제까지 선거 기간에만 의미있는 유권자나 표심으로만 여겨져야 하는가? 우리는 유권자이기 이전에 주권자이며 차별과 혐오로 부정되어서는 안되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다. 차이를 가로질러 다른 소수자 약자 동료 시민들과 연결된 존재이고, 연대를 통해 정치적 장을 만들어가는 주체이다. 미투운동이 남긴 사회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가 성찰과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다른 이들이 겪는 부정의에 함께 맞서며 우리는 정치적 책임을 공유해왔다. 여성, 소수자, 생존자들의 경험, 고발, 운동의 의미를 대통령 후보와 정치권이 그들의 권력으로 모두 부정하며 지워가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시민주권을 짓밟는 월권이다.
여성을 비가시화 하고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남성중심정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 또한 투쟁의 결과였다. 여성의 참정권은 ‘여성도 동등한 인간이므로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달라’고 목숨을 바쳐 싸웠던 여성운동가들의 투쟁으로 쟁취되었다. 여성의 노동권, 교육받을 권리,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말하기 위해 정치에 주권자로서 참여해왔다. 정치에 참여할 권리의 행사는 ‘어느 후보에게 표를 던저야 사표가 안되고 최악을 막는가?’와 같은 게임논리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어떤 정치로 완성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성평등에 투표한다
우리는 성평등한 사회를 비전으로, 정책으로 제안하고 실행하는 정치에 투표할 것이다. 선거 시기에는 모든 후보와 정당에 따져 묻고 제안할 것이다. 선거 시기에만 호명되는 ‘유권자’로서만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더욱 가시화하고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움직이고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1명이 10명에게, 100명이 1000명에게, 1만명이 10만명에게 지금 필요한 변화를 더 많이 말하고 요구하자. 환멸과 낙망에 좌절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연대하며 우리가 원하는 정치를 만들어 내자. 우리는 성평등에 투표한다.
2022년 2월 24일
한국성폭력상담소